스텔라가 떠나기 전의 마지막 밤, 그녀는 나를 따로 불러냈다.
그녀는 내게 28번째 테라리움에서 겪었던 나날을 인생 중 가장 평화로웠던 때라고 감상을 표했다. 누군가에겐 당연한 일상이 그녀에겐 사는 평생동안 꿈꿔왔던 것이라며 맑게 갠 밤하늘을 아쉽다는 얼굴로 하염없이 바라봤다.
“자신감 있게 말했지만, 아가, 네가 나를 좀 더 도와줄 수 있나 해서 불렀단다.”
내 또래의 아들이 있는 만큼 그녀에겐 아직까지 내가 애로 보이나 보다.
“도움이라면 어떤 걸 원하세요?”
그녀가 타고 떠날 마차도, 오랜 여행에 대비한 준비물도 전부 마련되어 있었다. 그러니 그녀가 원하는 도움은 다른 종류일 터.
“내가 인페르노에서 활동할 동안….”
날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엔 난처함이 가득해 보였다.
“애쉬를 인페르노에서 떨어뜨려 놓아줄 수 있겠니?”
“애쉬를…?”
“이미 제 어미의 등에 칼을 꽂았던 녀석이니 두 번은 더 쉽겠지. 그 아인 너무 감정적이니까 세상 베스탈리스들 중 가장 설득하기 어려운 녀석일 거야.”
그녀의 요청은 상당히 당황스러웠으나 이해는 갔다. 가장 큰 걸림돌은 바로 애쉬였다. 태어날 때부터 인페르노의 사상 속에서 자라 온 데다 무척이나 폭력적인 성향을 가진 남자.
스텔라의 마음을 돌리는데도 많은 노력이 필요했으니 현역인 애쉬를 설득하려면 더욱 많은 노력이 필요하겠지. 그리고 인페르노는 그들의 수장의 뜻을 전적으로 따르는 집단이었다.
그래서 베스탈리스들이 본능적으로 힘의 우위에 따라 서열을 만드는 성향이 인페르노에서는 아주 극단적으로 나타난다고 표현한 바가 있었다.
“제가 애쉬의 눈을 돌려 달라는 거죠?”
“그래, 너라면 가능할 거라고 생각해. 그날, 넌 아무 상처도 입지 않고 애쉬와 헤어지지 않았니? 전에 말했듯 내 아이는 널 찾는 데 큰 집착을 보였단다.”
파라다이스 테라리움에서 스텔라와 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16번째 테라리움 사건 이후 애쉬가 나를 찾기 위해 난리라고 했던가. 그에겐 꽤나 굴욕적인 패배를 맛보게 해 줬으니 불같은 성격에 가만 두고 볼 자가 아니었다.
“마주치면 적어도 몸의 반은 태워 버릴 거라 생각했지. 그런데도 넌 말끔한 상태로 그를 돌려보냈어. 내가 쓰러지고 난 이후의 일은 너에게 전해들은 것만 알뿐이지만 도저히 애쉬가 했다고 믿기지 않는 일 처리니 너라면 가능할 거라고 생각했단다.”
물론 나에겐 그를 효과적으로 다룰 수 있는 목줄이 있긴 했다.
“가능은 해요. 하지만….”
그날 했던 고민이 다시금 떠오른다. 그를 구속할 힘이 내게 있으나 정작 걸맞은 장소가 없다는 고민. 세상 천지에 시한폭탄과 같은 그를 어디에 가둬 둔단 말인가?
문득 1번째 테라리움에서 봤던 유리 감옥이 나열된 참회의 복도가 떠올랐다. 그곳이라면 애쉬를 가둘 수 있을까?
“그의 눈을 돌리기 위해선 제가 계속 함께해야 한다는 단점이 있어요. 하지만 그와 대체 어디에서 함께해야 할지 당장 떠오르는 곳이 없네요.”
위험인자를 내 테라리움에 묵게 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렇다고 남의 테라리움에 폐를 끼칠 생각 역시 없었다. 더 큰 문제는 그를 지켜보느라 낭비할 시간도 없었다.
“제멋대로인 성격을 죽이고 제어만 된다면 꽤나 쓸모 있는 녀석일 텐데.”
스텔라는 짐짓 아쉽다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의 말에 묘하게 담긴 바람이 나를 조급하게 만들었다. 내 말만 믿고 사지로 걸어들어가려는 그녀였다. 그런 그녀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어야 했다.
“애쉬의 눈을 돌리는 작전은 수행할게요. 하지만 좀 더 고민할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아요.”
“그래, 부디 내가 인페르노에 도착하기 전까지 결론이 나면 좋겠구나.”
말을 마친 그녀는 별안간 내 손을 잡아 올렸고 손등에 깊게 입을 맞추었다. 갑작스러운 그녀의 행동에 깜짝 놀랐지만 너무나 경건한 태도에 차마 손을 뺄 수 없었다.
“나의 신….”
스텔라에게선 마치 출정을 앞두고 신에게 마지막 기도를 올리는 기사와 같은 모습이 비춰졌다.
“네가 내게 내린 임무는 무슨 일이 있어도 완수하겠다고 약속하마. 돌아올 땐 내 신의 힘이 되어 줄 천군만마와 함께 오겠다고.”
그녀의 행동에 입술이 닿은 손등은 물론 온몸이 뜨거워졌다. 부끄러움이 컸지만 벅찬 무언가가 더 있었다.
“믿고 기다릴게요.”
불의 사람들은 상대를 불타오르게 만드는 능력도 있는 게 분명하다.
이야기를 끝낸 후 스텔라는 내일 아침 출발을 위해 숙소로 돌아갔다. 그녀는 테라리움에서 마련해 주려는 임시 거처도 거부한 채 여관 생활을 했다. 머물 자리를 거절한다는 건 많은 뜻을 내포하고 있었다.
아침이 되고 스텔라는 지체 없이 테라리움을 떠났다. 그녀는 만일을 위해 스스로 마차를 몰아서 떠났다. 인페르노의 본거지에 도착하면 위치에 대해 알게 된 마부를 죽일 수도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난 뜬 눈으로 밤을 새우며 애쉬를 어떻게 할지 고민했다. 그리고 마침내 결론을 내렸다.
본래 101번째 테라리움은 내 길드원들과 함께 갈 생각이었다. 이미 불에 의해 멸망한 곳인 만큼 무척 위험한 지역인데다 카수스와 결전을 벌일 수도 있으니 혼자 행동하는 건 많은 위험 부담이 따를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생각을 바꿨다. 그곳을 애쉬와 함께 가겠다고. 그렇게 한다면 그를 잡아 둘 장소에 대한 문제가 해결된다. 단, 이 경우 예정했던 대로 길드원들을 전부 데려가는 건 문제가 있었다.
바로 나를 제외한 다른 이들을 향한 애쉬의 공격성 때문이다. 난폭한 사냥개를 오로지 목줄 하나로만 붙잡고 있는 격인데 행여 손에서 줄을 놓치기라도 한다면 다른 이들이 피해를 볼까 우려가 되었다. 그러니 인원을 줄여 피해도 줄이는 방안으로 가려는 거다.
이 작전을 알린 후 길드원들에게 많은 반발이 있었지만 끝내 그들은 날 이길 수 없었다. 늘 그래 왔듯 나는 굉장히 독단적인 마스터였으니까….
그래도 전과 달리 모두 떼어 놓고 가는 게 아닌, 시들링은 데리고 가겠다고 하니 원성은 잦아들었다.
“에트나를 비롯한 사람들이 데려올 온건파 베스탈리스들에게 전투 준비를 시켜 줄 사람들도 필요해요. 숙련된 드루이드들의 불과 맞선 경험을 전하면 전투에 많은 도움이 될 거예요. 그리고 수확제를 마무리할 때까지 테라리움엔 아직까지 많은 인력이 필요하니까….”
“알겠어요. 저희는 항상 제 자리에서 맡은 임무를 충실히 수행할게요. 그러니 제이 님도 다치지 말고 돌아오세요. 무슨 일이 있으면 그 자식 목을….”
항상 많은 일들을 수행해 주는 길드원들에게 고마울 따름이었다.
일을 수행하기 위해선 테라리움을 떠나야 했는데 내겐 큰 고질적인 문제가 있었다. 바로 연락 문제였다. 그런데 그 문제 또한 드디어 필라와 루프가 해답을 내놓았다.
“역시 민들레가 답이었던 것 같습니다!”
내게 찾아온 필라가 다짜고짜 소리를 쳤다. 그 옆에서 말려 주는 역할을 해야 하는 루프 역시 잔뜩 흥분한 상태라 그 답을 듣기 위해선 일단 둘을 진정시킬 필요가 있을 것 같았다.
수확제가 마무리를 향해 달려가고, 오늘 아침엔 길드원 모두가 잔뜩 긴장한 상태로 스텔라를 배웅한 탓에 테라리움이 많이 어수선했다. 그만큼 내 집무실도 내 세계의 방 풍경을 따라가듯 난장판이 되어 가고 있었다.
그들이 앉을 수 있도록 자리를 치우고 집무실 한편에 작게 마련된 탕비실에서 음료와 과자를 가져왔다. 잔뜩 흥분한 상태라 음료를 엎지를 수 있으니 뚜껑이 있는 걸로….
“이 방법이 상용화된다면 테라리움의 연락 시스템에 큰 혁명을 불러올 거예요!”
둘은 당장이라도 뛰어올 것처럼 소파에서 엉덩이를 들썩이고 있었다. 이렇게 보면 둘은 참 잘 어울리는 한 쌍이지만 루프에겐 짝이 있으니 어쩔 수 없지. 그러고 보니 필라는 루프의 연애 사실을 잘 극복해 냈나 보네.
“알겠어요. 좀 진정해 봐요. 천천히 들을게요.”
“먼저 이걸….”
“아니, 이것부터 보세요!”
둘은 각자 내게 보고서를 들이밀며 아우성이었다. 두 보고서 모두 내용은 같으나 연구원에 따라 해석한 관점이 달랐다. 즉, 내가 두 보고서 중 하나를 선택하는 일은, 이번 연구의 주 공로자를 누구로 선택하는지를 결정하는 것과 같은 듯했다.
“민들레 드라이어드를 이용하여 연락 문제를 개발하고 있다는 소식은 들었어요.”
노멀 등급이라 만나기 쉽고 응용하기 좋은 스킬을 보유 중이며 무엇보다도 내가 소유하고 있는 드라이어드라는 점이 가장 컸기에, 그들은 민들레 아이들을 불러다 놓고 집중적으로 연구를 했다.
수확제 진행으로 바빠 자주 살필 수는 없었으나, 아주 가끔 그들이 테라리움 외곽 지역에서 민들레 꽃씨를 날리는 모습들에 대한 목격담을 전해 들었다.
“이건… 우체국 같은 느낌인데?”
이곳에도 우체국이란 개념은 존재했다. 다만 내가 있던 세계에 있는 기관과는 상당히 달랐다. 벌을 이용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편지로 연락을 주고받았는데, 대부분 테라리움 간의 물자 운송을 위해 짐마차를 운용하는 상회에서 이 우편 업무를 맡았다.
상회에 보낼 편지와 의뢰금을 전달하면 해당 상회에서 테라리움으로 물자를 보낼 때 그동안 모인 편지들을 마차에 함께 실어 전달하는 방식이었다.
집집마다 우편물을 배달해 주는 시스템은 테라리움 재량이었다. 심부름 개념으로 테라리움 내의 주민들에게 약간의 비용을 지불하면, 그들이 상회에 모인 우편물들을 배달해 주는 식이었다.
이 서비스가 없다면 사람들이 틈틈이 상회로 찾아가 혹시 자신에게 배달된 우편물이 있나 확인해야만 했다. 즉, 도착했을지도 모르는 우편물을 하염없이 기다려야만 하니 즉각적인 연락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물론 빠른 교신이 필요할 경우 사람을 고용하여 편지를 전달하는 방법도 있었다. 하지만 용병 의뢰와 동일하게 취급되기 때문에 값이 많이 나갔다.
과수원에선 다른 테라리움과의 교류를 위해, 또 서신의 보안을 위해 우편 배달을 전문으로 해 줄 직원을 고용하는 편이지만 일반 사람들이 이렇게까지 하기엔 많은 무리가 있었다.
용병 의뢰라는 특성을 띄고 있는 만큼, 이 일에도 드루이드가 반강제적으로 필요하긴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