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27화 (527/604)

드디어 스텔라가 활동할 때가 되었다. 마지막으로 받은 검진에서 의사는 스텔라의 몸 상태가 보통 사람과 다를 바 없을 정도로 완전히 회복되었음을 확인해 주었다. 그녀는 내게 새살이 돋아 그 부분만 색깔이 다른 검상 부위를 보여 주며 자신이 그렇게까지 연로하진 않다고 농담 삼아 이야기했다.

내가 수확제 준비로 바쁠 동안 스텔라는 우리 테라리움 소속의 드루이드들과 함께 주변을 정찰하며 불을 소탕하는 임무를 수행해 왔다. 그 과정에서 그녀는 패배에 대한 자존감을 대부분 회복하고 성취감과 새로운 목표를 얻은 것으로 보였다.

28번째 테라리움으로 돌아와 가장 먼저 한 일은, 스텔라를 비롯한 나와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 베스탈리스들을 불러 모으는 일이었다. 온건파 베스탈리스들은 그 자리에서 오랜만에 악연이나 다름없는 인페르노의 전 수장 스텔라와 마주하게 되었다.

이들 중 대부분은 베스탈리스임에도 불구하고 인페르노에 가담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스텔라에게 오랫동안 괴롭힘을 당했던 자들이었다. 첫 만남이 곱지 않을 거란 건 예상하고 있었다.

하지만 만남이 있기 전부터 그들에게 이 일이 급작스러운 상황이 되지 않도록 충분히 정황을 전달했었다. 내가 다른 베스탈리스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스텔라와 연합한 일, 스텔라는 더 이상 인페르노 소속이 아니나 아직까지 조직에 많은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인물이므로 조직 와해를 위해서라도 그녀와 함께하려는 상황까지 모두.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텔라와 한자리에 있는 걸 달갑지 않게 여기는 사람들은 분명 존재했다. 그들이 당장 자리를 박차고 뛰어나가지 않는 것만으로도 감사할 지경이었다.

“여기 계신 분들 모두 서로의 신분은 알고 있을 거라 생각하여 소개는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불의 기운이 강한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이니 방 안이 후끈 달아올랐다. 정화를 통해 그들이 무의식적으로 뿜어내는 화기는 잠재워졌지만, 불을 대표하는 자들이다 보니 기운 자체가 남달랐다.

“얼마 전 1번째 테라리움에서 모든 테라리움의 행정 관리원을 소집하여 회담을 열었습니다. 저 역시 그곳에 참여했다가 겨우 도착한 참이고요.”

“피곤하시겠어요. 우리 미미르와는 만나셨나요? 그 아이도 이번 회담에 참여한 걸로 아는데.”

에트나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내 상태를 묻다가 자연스레 자신의 사랑하는 막내아들인 미미르에 대해 물었다. 역시 그녀는 미미르가 연금되었단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알아 봤자 좋을 일은 없으므로 그 사실에 대해 일부러 숨겼다.

“네, 놀랄 만큼 많이 성장했더라고요.”

내 대답에 에트나가 더없이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미미르는 이대로 성장한다면 아주 훌륭한 행정 관리원이 될 거예요.”

48번째 테라리움에서 일어난 사건을 토대로 범인을 역추적해 마약의 출처까지 찾아낸 미미르의 능력은 상당히 놀라웠다. 그가 마약의 출처를 밝혀내지 않았더라면 101번째 테라리움과의 연관성을 끝내 모를 수도 있었다.

아들의 칭찬에 에트나의 기분이 한층 풀린 건지, 방 안을 맴도는 불편한 기운이 많이 가라앉았다. 방 안에 모인 이들을 조금만 살펴봐도 누구의 주도권이 높은지 한눈에 파악이 가능했다. 베스탈리스들과 오랫동안 만나며 알게 된 사실인데, 그들이 모일 때면 힘의 크기에 따라 보이지 않는 서열이 만들어졌다. 이를 가장 극단적으로 적용한 게 인페르노지만, 베스탈리스들이 셋 이상만 모여도 마치 본능적으로 행동하게 되는 듯했다.

서열이라고 해 봤자 힘의 크기가 더 높은 자의 의견을 존중해 주고 발언권이 달라지는 정도지만, 어쨌든 그들은 영혼 속 불의 힘이 더 강한 자의 분위기를 많이 따랐다. 이 중에서 스텔라를 제외하면 에트나의 힘이 압도적으로 강했고, 그녀를 잘 공략한다면 앞으로 대화가 많이 수월해짐은 뻔했다.

“사안이 사안이다 보니 급하게 여러분을 소집한 것은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이번 회담에서 101번째 테라리움의 멸망, 이로 인한 여파로 90번대의 남은 두 테라리움까지 축복의 불균형으로 멸망 위기에 놓였습니다. 사실상 세계의 반이 불에 의해 멸망하게 되며 심각성으로 행정 관리원들이 소집된 것이에요.”

“101번째 테라리움에 대한 소식은 들었습니다. 1번째 테라리움에서 마지막 남은 100번대 테라리움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했을 텐데 결국 그렇게 됐군요.”

“네, 그래서 큰 위기를 느낀 1번째 테라리움이 다른 테라리움들을 상대로 실로 부조리한 강경책을 내놓기도 했는데….”

난 회담에서 있었던 일들을 요약해서 그들에게 전해 주었다.

“회담의 일을 저희들과 공유하시는 건 다 이유가 있으시겠죠?”

“큰 위기 상황인 건 맞으나 어떻게 보면 이걸 베스탈리스의 기회로 삼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어요. 본래 난세에 나타난 영웅이 사람들로부터 많은 지지와 환영을 받는 것처럼 여러분들이 새로 일깨우게 된 힘을 극적으로 보여 줄 순간이 왔다고 느낀 거죠.”

내 말에 저마다 진지한 얼굴이 되었다.

“앞으로 불을 해치울 수 있는 유일한 전력인 드루이드에 대한 수요가 급속도로 늘어날 거예요. 1번째 테라리움이 고위험군 지원 정책을 발표함에 따라 테라리움들은 의무적으로 지원 전력을 모집해 둬야 하니까요. 그렇잖아도 각종 상황에서 드루이드는 용병으로서 수요가 높은데 지원 정책까지 겹치게 되면 드루이드의 몸값은 천정부지로 치솟고 더욱 구하기 어려워지겠죠. 그때 이를 대체할 수 있는 새로운 전력의 등장이 그 어떤 때보다 큰 환영을 받게 될 거라고 생각해요.”

“대체할 수 있는 새로운 전력의 등장이라….”

누군가가 무척이나 황홀하다는 목소리로 내 말을 되새겼다. 방 안에 잠시간 침묵이 감돌았다. 어떤 이들은 그간 베스탈리스들이 받아온 핍박들을 떠올리고 있을 터였고 어떤 이들은 베스탈리스가 새 출발할 미래를 상상하고 있을 터였다. 드디어 그들의 운명의 전환점이 찾아온 것이다.

“하지만 베스탈리스가 대체할 수 있는 전력임을 먼저 세상에 보일 필요가 있어요. 우린 아직 아무것도 세상을 향해 증명해 내지 못했으니까요. 또한 너무나 지독한 편견이 사람들의 눈앞을 가로막고 있어서 어지간한 일로는 인식의 전환을 불러오기 어려울 거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우린 뭘 하면 되죠?”

“90번대 테라리움에서 여러분들의 힘을 증명하는 거예요.”

난 회담에서 베스탈리스의 진실에 대해 밝힐지 말지에 대해 수없이 고민했던 일과 끝내 그들에 대한 정체를 애매하게 둘러대며 90번대 테라리움에 대한 단독 무대를 따 온 일을 이야기해 주었다.

“여러분들이 90번대 테라리움에 닥쳐온 위기를 해결한다면 가장 먼저 테라리움의 행정 관리원들이 이를 반길 거예요. 의무 전력난이 해결되니까요. 물론 그 선동도 저와 인연이 있는 테라리움들을 부추겨 베스탈리스에 대한 인식을 더욱 우호적으로 만들 거예요.”

내가 90번대 테라리움을 사수하려는 가장 큰 목적은 베스탈리스들의 화려한 데뷔에 있었지만, 또 하나가 더 있었다. 내가 101번째 테라리움에 안전히 도착하기 위해서라도 90번대 테라리움이라는 축복의 완충지가 필요했다.

90번대 테라리움이 결국 망하게 되고 100번대까지 가는 길이 세계수의 축복 하나 없는 죽음의 대지라면, 아무리 나라도 죽음을 감수해야 될 수도 있었다.

파라다이스 테라리움에서 빠져나오며 데드라인을 경험했을 때, 그곳이 얼마나 지옥 같은지 나는 뼈저리게 경험했었다. 이제 그 데드라인이 더 좁혀져 올 터. 생명의 기운이라곤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모든 게 타 버린 무의 대지에서 어디선가 끊임없이 생성되는 불이 아귀처럼 입을 벌리며 꾸역꾸역 전진해 오고 있었다.

“90번대 테라리움을 사수하는 건 능력이 뛰어난 드루이드가 여럿 모여 대항하는 걸로도 무척 어려운 일이 될 거예요. 그래서 더 많은 베스탈리스 동료가 필요합니다. 숨어 살고 있는 모든 온건파 베스탈리스들을 한데 모으고, 인페르노에 가담하여 아직도 과격 행위를 벌이고 있는 강경파 베스탈리스들을 회유해야 해요.”

난 스텔라를 바라봤다.

“인페르노 안에 있는 베스탈리스들을 회유하는 일은 스텔라에게 맡길 거예요.”

스텔라는 그 말에 애매한 웃음을 지었다.

“그럼 남은 온건파 베스탈리스들을 설득시키는 일은 저희가 해야겠군요. 당신이 우리들의 영혼 안에 날뛰는 화기를 잠재워 준 일로 많은 이들이 우리와 함께하겠다며 의사를 표했지만, 아직도 회의적인 이들이 많지요. 세상에 받은 상처가 많을수록 더욱 남을 믿지 못하게 되고 그저 하루를 조용히 살아가는 것만이 큰 목표인 자들입니다. 그들에게 뚜렷한 미래를 보여 준다면, 생각이 바뀔지도 몰라요.”

에트나는 그렇게 말하며 60번째 테라리움에서 미미르의 가문이 벌였던 기부 행사의 결과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그들의 행사 모습이 많은 테라리움에 대나무 숲을 통해 송출되며, 숨어지내던 온건파 베스탈리스들에게도 전해졌고 이로 인해 대중들에게 모습을 드러내는 일에 대한 두려움이 많이 완화되는데 한몫 한 것 같다고 이야기했다.

안건에 대한 회의를 끝낸 후에도 모두들 자리를 떠나지 않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세상은 아직 불에 대한 반감이 크기 때문에 불을 대표하는 베스탈리스들을 여전히 싫어하겠죠. 하지만 그 불과 우리의 불이 완전히 다르다는 걸 보여 줄 수만 있다면….”

반응이 긍정적이라서 다행이었다.

어쩌면 90번대 테라리움을 베스탈리스의 힘만으로 사수하는 건 무척 어려운 일이 아니냐며 난색을 표하는 의견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다. 그 일은 숙련된 드루이드들조차 어지간히 사명이 강한 자들이 아니라면 꺼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베스탈리스들에게 그런 불안은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들은 오히려 호승심을 불태우고 있었다. 어쩌면 그것이 활활 타오르는 베스탈리스들만의 성향일 수도 있고, 마침내 찾아온 기회를 내면의 불안감만으로 걷어차지 않으려는 걸 수도 있다.

난 스텔라를 따로 불러내 그녀와 대면했다.

“90번대 테라리움에 지원 출전해야 할 날짜는 얼마 남지 않았어요. 너무 늦으면 테라리움이 버티다 못해 멸망할 테니 가능한 한 빨리 연합을 만들어야 해요. 당신이 당장이라도 인페르노에 돌아가야 한다는 걸 뜻해요.”

“그래, 더 이상 미룰 순 없겠지.”

인페르노는 다시 돌아온 스텔라를 어떻게 받아들일까?

내부에선 이미 애쉬가 자신의 어머니를 칼로 처단한 일이 퍼져 있을 수도 있다. 그들의 위대한 수장이 벌한 인물이 조직으로 복귀하는 걸 곱지 않게 볼 텐데.

“그러는 너도 준비해야 하지 않겠느냐? 수많은 베스탈리스들의 영혼을 너 혼자 정화해야 할 텐데.”

그런 내 걱정과 달리 스텔라는 인페르노로 돌아가 조직의 입장으론 변절자나 다름없는 이들을 대다수 끌고 올 자신감을 내비치고 있었다.

회의가 끝난 후 스텔라에게 단 하루의 유예 기간이 주어졌다. 하루가 지나면 스텔라는 무슨 일이 있어도 인페르노의 본거지로 떠나야 한다. 그녀가 모든 채비를 끝내기엔 짧다고 생각될 수 있는 시간이나 곧바로 떠나고 싶어 했던 그녀에겐 아무 문제가 없을 듯했다.

모였던 베스탈리스들이 떠나기 전 스텔라와 따로 시간을 갖는 걸 보았다. 그들이 미뤄 뒀던 갈등을 다툼으로 해소할 생각이라 해도 내가 끼어들 틈은 없었다.

격렬한 말싸움이 오가거나 불이 튀는 격투가 벌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주변 사람들을 대피시켰는데, 예상 외로 조용히 마무리되었다. 살짝 열린 문 너머로 이글거리는 눈을 한 에트나와 스텔라가 악수를 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결국 미래를 위해 과거를 잊고 손을 잡은 것이다.

길드원들에게 회의로 결정된 사항을 전달하는 건 그 다음이었다.

“제 발로 사지로 걸어들어가는 건 아닌가 걱정이 되는데요.”

이리스는 스텔라가 피의 보복을 당할 걸 우려했다.

“그런데 정말 90번대 테라리움에 저희는 가지 않아도 상관없는 건가요?”

“그곳은 오로지 베스탈리스들의 힘으로 탈환을 해야 의미가 있으니까요. 드루이드가 개입하면 그들의 자질을 의심할 거예요.”

“하지만 베스탈리스들은 그런 전투를 경험해 본 적이 없잖아요? 우리와 같은 드루이드로 치면 이제 막 드라이어드를 개화한 격이 아닐까요?”

“모두를 훈련시킬 시간도 부족할 텐데 괜찮을까요?”

물론 그게 문제긴 했다. 베스탈리스들은 막 정화의 힘을 일깨운 자들이었다. 어찌 보면 이제 막 시작한 초보나 다름없다고 느껴질 터였다.

“제 생각엔 베스탈리스와 드루이드는 차이가 있어요. 정화의 힘은 그들이 여태 다루던 불의 힘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아요. 그들이 평소 하던 대로 하면 그게 정화의 힘이 되는 거죠. 드루이드는 드라이어드를 얻는 순간부터 모험이 시작된다고 본다면, 베스탈리스는 태어났을 때부터 불을 다룰 수 있으니 그들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모험이 시작된 거라고 볼 수 있어요.”

드루이드의 실력은 드라이어드의 능숙도에 따라 달라지기도 했다. 본연의 힘이 드라이어드에게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아무리 실력이 뛰어난 드라이어드를 얻었더라도 드루이드의 영혼의 크기가 작다면 본래의 제 힘을 발휘하기 어려웠다.

즉, 드루이드는 레벨 업의 과정이 필요하지만 베스탈리스는 영혼 정화를 통해 현재 레벨 그대로 새로운 직업으로 전직한 것이나 다름없어서 실전 투입의 시기와 안정성이 훨씬 빠르고 높다고 볼 수 있었다.

물론 베스탈리스가 레벨에 완전히 영향을 받지 않는 건 아니었다. 그들의 레벨은 아티팩트의 광산 레벨을 올리는 것이나 다름없었는데, 더 많은 불을 해치우고 결정을 변환시켜야 더 많은 혜택을 얻을 수 있었다. 베스탈리스의 레벨은 그들의 힘의 지속성과 순수함과 관련이 있었다.

불의 힘을 지속적으로 사용하고 시간이 오래될수록 영혼의 정화 능력은 떨어진다. 베스탈리스의 영혼 속 갈라진 틈 너머에 자리한 불순한 불은 항상 탐욕스럽게 그들의 영혼을 완전히 태워먹어 버릴 타이밍만 노리고 있기 때문이다.

시간이 지나면 그들이 가진 정화의 힘도 다시금 오염되어 평범한 불의 힘으로 변질되니, 몬스터 불을 더 많이 해치워 결정을 많이 만들고, 열심히 난쟁이들의 광산을 레벨 업시켜야 했다.

“날 때부터 파이터라는 거구나….”

제퍼가 약간은 질린 목소리로 말했다.

“하긴 드루이드는 베스탈리스와 달리 직접 정화의 힘을 가진 건 아니니까요. 어디까지나….”

어디까지나 드라이어드가 세상에서 활동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매개체나 다름없었다. 다시금 그 어느 날 나를 고민하게 만들었던 난제가 떠오른다.

불이 모두 사라진 세상에선 드루이드는 어떻게 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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