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시 마약은 카수스가 101번째 테라리움의 가지를 차지하기 위해 벌인 음모가 아니었을까? 혼자서 그곳에 주둔한 모든 전력과 전투를 할 필요 없이 성공적으로 풀어 놓기만 한다면 알아서 자멸하니 어찌 보면 효과적인 수단이었다.
미미르가 의심하는 것처럼 마약을 만드는 공장이 테라리움 내부에 따로 존재하진 않을 것이다. 그건 너무 눈에 띄기 때문이다. 카수스가 사람을 시켜 밖에서부터 들여왔거나… 혹은….
“사건을 파헤친 일로 부당한 처사를 당했지만 네가 나쁘기 때문에 이런 일을 당하는 건 아니야. 시기가 좋지 않았을 뿐이야.”
설명을 끝마치고 시무룩한 얼굴을 하고 있는 미미르를 위로했다.
“101번째 테라리움은 현재 불에 의해 멸망했어. 이건 네가 회담에 정상적으로 참여했다면 들을 수 있었던 일이었을 거야.”
“멸망했다고요…? 혹시 마약과도 관련이 있나요?”
미미르는 겁에 질린 얼굴로 몸을 흠칫 떨었다.
“관련이 있다고 보지만 누군가는 그렇게 보는 걸 원하지 않을 거야. 그래서 네가 여기 잡혀 있는 거고. 네가 빨리 풀려나고 싶다면….”
그에게 중앙 행정부가 이번 사건에 대해 함구하길 원한다면 순순히 그 지시에 따르라고 당부했다. 미미르는 혼자 1번째 테라리움에 맞설 수 없었다.
이후 미미르를 향해 낮은 거목의 사과가 이어졌다. 그가 벌인 일은 아니나 테라리움에 속한 사람으로서 죄책감을 느끼는 걸 테지.
“네 조사 덕분에 많은 걸 알게 되었어. 풀려나면 보자. 조금만 참아.”
확인 결과 미미르에게 정말 큰 죄는 없었기에 밖에서 전해 들은 대로 오늘 안에 풀려날 수 있을 것이다.
이야기를 나누며 너무 오랜 시간을 보냈다고 생각한 것인지 낮은 거목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테라리움이 낮은 거목에게 마약 건에 대해 일부러 알리지 않은 만큼, 그가 이곳에 있다는 걸 불안하게 바라보는 이들도 많을 터였다.
가면을 쓰고 미미르가 갇혀 있는 방을 빠져나와 참회의 복도를 걸었다. 올 때와 달리 안내자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좀 더 편안한 마음으로 걸을 수 있었다.
그리고 복도를 걷다 멀리, 다시금 갇혀 있는 크레아시온에게 눈길이 갔다. 그 안엔 놀랍게도 이전에 없던 파피루스 드라이어드가 함께 있었다.
“헉… 죄인이 드루이드일 경우 드라이어드가 나올 수 없도록 아티팩트를 막아 놓을 거라 생각했어요.”
“드루이드와 드라이어드를 영영 만나지 못하도록 떼어 놓는 건 아무리 죄인이라 할지라도 비윤리적인 행위라고 보기 때문입니다.”
주변에 보는 사람이 없으니 대화 또한 편해졌다.
“하지만 드라이어드가 주인을 탈출시키기 위해 힘이라도 쓴다면….”
“드라이어드는 갇히기 전, 세계수를 향해 맹세를 합니다. 아무런 문제를 일으키지 않고 주인의 곁에 있는 것과 이를 포기하고 죄인이 석방될 때까지 아티팩트에 갇혀 있는 것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지요. 후자를 선택할 경우 죄인의 아티팩트엔 구속 고리가 채워지게 됩니다. 그 서약은 세계수의 힘으로 관리되기 때문에 한 번 맹세한 이상 다른 마음을 품을 순 없습니다.”
그 말을 듣고 파피루스 드라이어드를 자세히 보니 마치 거미줄에 걸린 것처럼 온몸이 가느다란 빛의 실로 묶여 있는 것이 보였다. 혹시 저것이 세계수의 힘이라는 걸까?
“외람된 말이지만… 세계수 같은 존재가 이런 일에 자신의 힘을 빌려줄 거라고 생각되지 않아요. 세계수가 개입하기엔 너무….”
“그렇습니다. 사사로운 일이지요. 인간 사회에서 벌어진 일일 뿐이니까. 역시 순례자답게 영특하시군요.”
어찌 보면 무례하다고 볼 수 있는 발언임에도 낮은 거목은 오히려 날 칭찬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저건 1번째 테라리움의 행정 관리원의 힘입니다. 구속의 힘이지요.”
“가드닝 스킬이군요. 이것 또한 극비일 것 같은데 제게 말해 주셔도 괜찮나요?”
1번째 테라리움은 행정 관리원에 대한 정체를 꼭꼭 숨기고 있기 때문에 아주 사소하더라도 관련된 정보라면 전부 극비로 여길 터였다. 그런데 무려 가드닝 스킬을 내게 알려 주다니.
내 물음에 낮은 거목은 옅은 웃음만 지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막 크레아시온이 갇혀 있는 감옥 앞을 지날 때였다. 걱정 어린 눈으로 제 주인만 바라보고 있던 파피루스가 대뜸 유리 벽에 바짝 붙어 우릴 바라봤다. 그 바람에 그와 눈이 마주쳤다. 그의 눈엔 어떠한 확신이 담겨 있었다.
설마 가면을 쓰고 있는데 내 정체를 알아본 것인가?
파피루스는 우릴 향해 무어라 말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뻐끔거리는 입만 보일 뿐 어떠한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감옥의 방음 수준이 아주 높았기 때문이다.
“저 드라이어드가… 왜 저런 행동을 보이는 거죠?”
파피루스의 이상 행동에 다른 이들의 눈길이 이곳으로 주목되는 건 곤란했다. 난 그대로 무시하고 빨리 지나쳐 가야 하나 고민했다.
“기운이 잠잠한 걸 보니 문제를 일으키려는 행동처럼 보이진 않는데…. 꼭 이쪽을 향해 뭔가 말하고 싶은 것처럼 보이는군요. 저보다는 당신에게.”
“제가 16번째 테라리움의 연금탑에서 저들을 만난 적이 있어요. 아마 저들이 이곳에 잡혀 오는데 제가 많은 공헌을 했겠죠. 그래서 절 알아본 걸까요? 가면을 쓰고 있긴 한데.”
“그 가면엔 특별한 장치가 있기 때문에 사람들과 보는 시각이 다른 드라이어드의 눈도 속일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런 모습을 보인다는 건, 파피루스는 속임수 따윈 뛰어넘을 수 있는 혜안을 가지고 있는 걸지도 모르겠지요.”
우리가 서로 대화를 하든 말든 파피루스는 계속 이쪽을 향해 무어라 말하고 있었다.
“어쩌지….”
“참회의 복도는 누구든 죄인의 모습을 볼 수 있도록 만든 공간입니다. 잠깐 머무는 것 정도는 큰 의심을 사진 않을 겁니다.”
그렇게 말하며 낮은 거목이 먼저 다가갔다. 그의 뒤를 따라 나 역시 파피루스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드라이어드의 모습도 주인만큼이나 수척해 보였다. 모노클 너머의 눈도 생기가 많이 사라져 있었다. 연금탑이 망한 그날부터 지금까지 갇혀 있는 거겠지. 종자 보관소에서 촐싹대는 모습을 많이 봤기 때문인지 참 미운 정이 많이 든 드라이어드였다.
가까이 다가가도 파피루스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그의 입 모양은 좀 더 선명히 보였다.
“도와줘… 라고 말하는 것 같은데. 역시 절 알아본 걸까요?”
“유리 감옥엔 아무 죄인이나 갇히지 않습니다. 어쩌면 평생을 감옥에서 살아야 하는 자들만 갇히지요. 그러니 당신이 도울 수 있는 일은 없을 텐데 말입니다.”
낮은 거목의 말이 맞았다. 내겐 1번째 테라리움을 상대로 세계수에 반기를 든 죄인을 빼내어 올 힘이 없을뿐더러 그럴 마음도 없었다.
난 좀 더 파피루스가 말하는 걸 지켜봤다.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는 걸 인식했는지 그는 좀 더 천천히 또렷하게 말을 하기 시작했다.
‘도와줘, 주인이 죽어 가고 있어.’
크레아시온의 건강이 위태한 걸까? 하긴 그는 이곳에서 지내기엔 너무 연로했다.
‘그를 구해 준다면 널 위해 모든 걸 할게. 네가 파피루스가 가진 모든 역사의 지식을 원한다면 기꺼이 내놓을게.’
하필 어젯밤 낮은 거목과 함께 기록의 대가인 파피루스 드라이어드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었다. 걸어 다니는 역사라고 볼 수 있지만 결코 그 기록을 입 밖으로 내뱉지 않는 드라이어드. 그들이 입을 열도록 설득해 낼 수만 있다면 세상에 수많은 진실이 풀려날 것이라고 했지.
“…….”
내가 파피루스의 입 모양을 잘못 해석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다시 봐도 같은 말만 되풀이하는 파피루스에게서 같은 대답만 얻을 수밖에 없었다. 크레아시온을 위해 파피루스 종의 금기를 어기겠다고?
“하지만 혹시 모릅니다. 드라이어드들은 주인인 드루이드에 대한 충성심이 높으니 파피루스 중 유독 주인을 위하는 이가 있다면 과거를 발설했을지도요.”
“너무 오래 공허한 역사가 흘렀으며 그 정체성이 많이 무너졌다는 것을… 그것도 아주 빠른 속도로…. 그 사실을 당신이 모를 리가 없지 않습니까? 이젠 세계수보다 나의 작은 세계수가 진리이고… 내 정체성입니다. 나의 작은 세계수가 추구하는 이치가… 곧 제 이치입니다.”
연금탑에서 만났던 파피루스는 드라이어드가 드루이드를 맹목적으로 따르는 아주 안 좋은 예였다. 그는 크레아시온을 위해 세계수 가지에 몹쓸 짓을 하는 걸 묵인했으며 수많은 인공 개량 드라이어드를 만드는 것도, 그들을 강하게 만들기 위해 고문하는 것까지 전부 지지했다.
다른 드라이어드들은 인공 개량에 대해 듣기만 해도 치를 떨 정도로 증오하는데, 같은 드라이어드면서도 그것이 자신의 주인의 뜻이기에 자신의 뜻이나 다름없다고 말하는 자였다.
만약 내가 크레아시온을 감옥에서 빼낸다면 파피루스는 정말로 자신의 선조 때부터 보고 들은 모든 역사를 토해 낼 것이다.
카수스가 자신의 시대의 기록을 대부분 말소시켜 버린 상황에서 이보다 더 끌리는 유혹이 있을까?
저 파피루스를 손에 넣는다면 이 세계의 모든 역사가 내 손에 들어온다.
“…주인을 굉장히 위하는 드라이어드네요.”
그렇게 말한 후 난 파피루스에게서 등을 돌렸다.
“크레아시온을 해방시켜 준다는 조건으로 파피루스가 모든 역사를 밝히겠다고 하면, 1번째 테라리움이 이를 반길까요?”
“파피루스를 선택한다면 공정성을 해치는 일이 되겠군요. 또한 드라이어드에게 종이 신념처럼 여기는 금기를 깨라고 등을 떠미는 것과 다름없으니 1번째 테라리움은 결코 그런 선택을 하지 않을 겁니다.”
“그렇군요.”
파피루스의 제안은 너무나 탐나는 것이었으나 그게 전부였다. 그걸 얻기 위해 너무 큰 위험을 짊어질 순 없었다. 지금의 나는 혼자가 아니기에 더더욱.
낮은 거목과 함께 지체되었던 걸음을 옮겼다. 등 뒤로 들리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절규하는 파피루스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사법 건물에서 빠져나온 이후로 낮은 거목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한 후 곧바로 28번째 테라리움으로 돌아갈 채비를 했다.
이곳에 방문한 것만으로도 대량의 퀘스트를 잔뜩 수락한 기분이 든다. 세계는 내가 조금이라도 한가할 틈을 주고 싶지 않은 듯했다.
“카수스의 행적을 찾았어.”
그리고 가장 중요한 일. 101번째 테라리움으로 간다면 그에 대한 정보를 얻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