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모습을 다시 보게 될 줄은 전혀 몰랐다. 1번째 테라리움의 아주 깊숙한 곳에 수감되어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다름 아닌 미미르를 만나러 가는 복도에서 마주칠 줄은. 그것도 훤히 보이는 방 안에 그가 있다니.
놀란 마음에 잠깐 발걸음이 멈췄는데 이를 눈치챈 낮은 거목도 걷는 것을 멈추고 내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그자로군요.”
낮은 거목도 크레아시온을 알고 있었다. 그의 목소리엔 옅은 혐오감이 배어 있었다.
크레아시온을 가두고 있는 감옥은 유리창처럼 보여도 무척 단단한지 별다른 경비가 보이지 않았다.
사생활이라곤 조금도 없는 그 안에서 새까만 죄수복을 입은 그는 의자에 앉아 멍하니 바닥만 보고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나이 든 노인인 그는 모진 생활을 했는지 무척이나 수척해 보였다.
미미르가 있는 곳으로 안내해 주던 이가 우리의 걸음이 멈추자 의아한 시선을 보내왔다. 그래서 그를 더 살펴볼 시간 없이 이동해야만 했다.
“전 그가 좀 더 꼭꼭 숨겨진 곳에 감금되어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목소리를 낮춰 낮은 거목에게 말을 걸었다.
“이곳은 참회의 복도입니다. 죄질이 아주 나쁜 죄인들이 수감되는 곳이지요. 죄를 숨기지 않고 내보임으로써 이곳을 지나다니는 이들에게 경각심을 주기 위한 명목입니다. 그들의 말로가 어떤지 이곳을 방문한 모든 이들이 확인할 수 있지요.”
크레아시온 외에도 유리 감옥에 갇힌 다른 사람들이 보였다. 저들 모두가 죄질이 나쁜 죄인들이라는 거지…?
다행히 미미르는 유리 감옥이 아닌 평범한 면회실에서 만날 수 있었다. 연금되어 있다곤 하나 그와 만남의 자리를 가지니 테이블 위엔 차와 다과가 제공되었다. 푹신한 소파와 온기가 느껴지는 방, 유리창 너머로 봤던 삭막한 죄인들의 방에 비하면 손님방이나 다름없었다.
우리와 마주 앉은 미미르는 무척이나 불안해하는 눈빛을 보내왔다. 그는 자신이 왜 연금되어 있는지 이유를 알까?
우리를 제외한 모두가 방을 떠나는 걸 확인하고서야 난 가면을 벗었다. 내 얼굴을 확인한 미미르가 화색이 되었다.
“제이…!”
“쉿.”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보내자 미미르가 황급히 두 손으로 입을 막았다. 마음고생으로 얼굴이 상하긴 했으나 걱정했던 것보단 괜찮아 보여서 다행이었다.
“네가 잡혀가는 걸 내 일행이 목격했어. 그리고 회담이 끝날 때까지 네 모습을 볼 수 없어서 걱정된 나머지 찾아오게 되었어. 그런데 내 신분으로 정당히 들어온 건 아니야. 여기 계신 분께 도움을 받았어.”
“…….”
미미르는 입을 틀어막은 채로 나와 낮은 거목을 향해 연신 고개를 숙여 감사의 의미를 전했다.
“너도 회담에 참여하기 위해 1번째 테라리움으로 온 거 맞지?”
내 질문에 미미르가 세차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말해도 괜찮아. 다만 혹시 모르니 목소리 크기는 조금 낮추자.”
내 말에 미미르는 그제야 입을 틀어막은 손을 뗐다. 손이 떨어지는 것과 동시에 그의 두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히기 시작했다. 서러움이 밀려왔나 보다.
“잘 지냈어? 28번째 테라리움에서 본 이후로 오랜만이지?”
“…….”
말을 해도 괜찮다고 했지만 눈물 때문에 목이 막히는지 그는 그저 고개만 끄덕거렸다.
“38번째 테라리움에 대한 소식은 간간이 전해 들었어. 돌아가자마자 자문 위원회를 해체시키고 테라리움을 정상적으로 돌리기 위해 많이 노력했다지. 정말 기특해. 번호 연계법으로 묶인 만큼 더 신경 써 줬어야 했는데 그간 내가 바빠서 직접 보러 내려가진 못했네.”
“아니… 에요.”
울음을 힘겹게 참은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회포를 풀기엔 자리가 많이 아니지? 그럼 본론으로 들어가서…. 대체 경비원에게 무슨 말을 했길래 잡혀 온 거야? 뭘 했길래 회담에 참여하지도 못하고 계속 여기 있어야만 했던 거래? 그 이유는 알아?”
“전 그저….”
미미르는 낮은 거목의 눈치를 보았다. 1번째 테라리움의 관계자가 있는 곳에서 이야기를 꺼내도 될지, 그로 인해 또다시 자신에게 무슨 문제가 생기는 건 아닌지 걱정하는 눈치였다.
“괜찮아. 이야기해 봐. 그리고 너무 걱정하지 마. 밖에서 듣기론 넌 빠르면 오늘 오후 중으로 풀려날 수 있을 거래.”
미미르도 여기에 오기까지 복도에 있던 죄인들의 모습을 봤겠지. 어린 나이에 그 모습들이 자신의 미래에 대입되어 얼마나 심적으로 괴로웠을까.
“어디서부터 말해야 될지…. 전 테라리움에 도착 후 경비원에게 마약에 관해 1번째 테라리움에 전달해야만 한다고 말했어요. 큰일이 생길 것 같다고. 어쩌면 1번째 테라리움에도 문제가 생길 수 있다고 말했어요.
“…마약?”
어째서 미미르의 입에서 그 단어가 나온 거지?
“제가 너무 경황없이 군 것 같아요. 좀 더 정식으로 1번째 테라리움과 자리를 만들어 이야기를 전달했어야 했는데. 머릿속이 빨리 이 사실을 알려야 된다는 생각으로만 가득 차서…. 그런데 경비원은 제 말을 듣고 큰 오해를 했어요. 제 발언이 1번째 테라리움에 큰 모욕을 준 거라고 여긴 걸지도 몰라요. 당연하죠. 마약이라니…. 제가 생각해도 1번째 테라리움과는 전혀 엮여선 안 되는 단어인걸요.”
미미르야말로 큰 오해를 하고 있었다. 낮은 거목이 말하길 어쩌면 중앙 행정 관리부가 경비대에 따로 명령을 내렸을지도 모른다고 했다. 그로 인해 유추해 볼 수 있는 건, 누군가 마약에 대해 뭔가를 알리려고 하면 신분을 막론하고 구금시키라고 했을지도 모른다는 거다.
“너의 신분을 제대로 밝힌 건 맞지?”
“네, 전 정말로 오해가 있는 거라고. 전 그저 회담에 참여하기 위해 온 38번째 테라리움의 행정 관리원이라고 제대로 밝혔어요. 월렛도 보여 줬고요.”
경비대에 끌려간 이후 미미르가 겪은 일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다. 낮은 거목처럼 하얀 로브와 가면을 쓴 사람이 와서 미미르에게 모든 정황에 대해 들었다고 한다.
그 후 풀려날 줄 알았지만 계속해서 다른 사람이 찾아와 했던 이야기를 또 하게 만들면서 무언가를 작성하고 지금까지 역류해 두었다고 한다.
“그럼 그자들에게 했던 이야기를 우리에게도 해 줄 수 있어?”
그의 말에 의하면 이미 몇십 번이나 더 해서 지쳤을 이야기지만 알아야만 했다. 그는 거절하지 않고 자신이 알고 있는 사실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미미르가 마약에 대해 알게 된 계기는 다름 아닌 48번째 테라리움 때문이다. 가지 품질 검사를 위해 사람을 파견했고, 그곳에서 마약에 의해 망가져 가는 테라리움을 목도했다.
48번째 테라리움이 그 꼴이 된 걸 알자마자 차라리 나나 중앙 행정 관리부에 알렸다면 모를까. 그는 그 사실을 알고 어린 나이에 덜컥 겁을 먹어 버렸다.
번호 연계법으로 그 어떤 테라리움보다도 내리 관리해 주었어야 할 곳이 그 지경이 되도록 몰랐다는 사실에 추궁을 당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것이다.
더구나 38번째 테라리움은 자신이 자문 위원회에 이리저리 끌려다니느라 정상화된 지 얼마 되지 않아 행정 능력까지 함께 싸잡아 추궁을 당한다면, 부모님이 준 테라리움을 능력 문제로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어린 생각에 그만 혼자 해결해 봐야겠다고 마음먹었다고 했다. 참으로 위험한 생각이었다.
그는 홀로 나에게 배운 대로 막대한 자금을 이용해 마약의 출처에 대해 추적하기 시작했고, 그 과정에서 48번째 테라리움에 마약을 유통시킨 범인의 행적에 대해 알아내는 데 성공했다. 카이시아에게 접근한 수수께끼의 남자였다.
그자가 48번째 테라리움에 방문하기 전 상당히 많은 테라리움에서 사치를 부리고 다녔고 그자가 머문 곳마다 마약 문제가 터졌다.
하지만 카이시아와 달리 테라리움에 충실한 행정 관리원들로 인해 초기 진압에 성공해 그저 해프닝으로 남게 되었을 뿐이다.
마약 문제는 테라리움 입장에서 상당히 치욕적인 일이었고 이 사실이 새어 나가면 평판에 악영향이 생길뿐더러 퍼지기 전에 막아 냈으니 다들 입을 다물었던 것이다.
지금 이 자리에서야 48번째 테라리움 외에도 마약 사건이 터졌던 테라리움이 더 있었다는 걸 알게 됐으니 다른 행정 관리원들이 일부러 언급을 피했던 것임을 깨닫게 되었다.
미미르의 추적 방식은 상당히 체계적이었다. 범인은 마약을 팔아 돈을 번 만큼 사치의 단계가 올라갔고 이를 역추적해 그자가 최초로 모습을 드러낸 지점, 어쩌면 마약을 처음으로 입수한 지점이나 다름없는 곳을 찾아냈다.
그곳은 놀랍게도 지금은 멸망해 사라졌을 101번째 테라리움이었다.
“101번째 테라리움이라고…?”
“네, 아카데미에서 101번째 테라리움은 100번대의 마지막 테라리움으로 무척 상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배웠어요.”
그는 2번째 테라리움에 있는 유명한 아카데미 출신이었지. 아카데미에선 그런 것도 배우는구나 싶었다.
“그래서 1번째 테라리움이 이를 지키기 위해 능력 있는 드루이드들을 파견해 주둔시키고 있다는 것도요. 회담이 열리기 직전에 101번째 테라리움 어딘가에 마약을 생산하는 공장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걸 알게 되었고, 이 사실을 빨리 알리지 않으면 그곳에 주둔 중인 1번째 테라리움의 사람들도 위험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
정황상 그는 출처에 대한 조사에만 집중한 나머지 101번째 테라리움이 이미 불에 의해 없어졌다는 사실을 모르는 듯했다.
미미르의 말을 듣다 보니 그가 왜 연금되었는지 알 수 있었다. 밤사이 낮은 거목이 말한 101번째 테라리움에 대한 이야기까지 조합해 보면…. 그곳에 주둔하고 있던 전력들이 어떠한 이유로 불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고 말했는데, 그 이유가 어쩌면 마약이었을지도 모른다는 확신이 들었다.
모두 마약에 취해 있던 나머지 불의 침입에 전력을 다하지 못했고 결국 테라리움의 멸망으로 이어진 것이다.
불과의 전투에서 최선을 다해 싸우다가 명예롭게 목숨을 잃은 게 아니라 치욕스럽게도 마약에 취했기 때문에 제힘을 다하지 못했다니. 1번째 테라리움은 차라리 뒤의 사실을 숨기고 힘이 달려 불을 이기지 못한 것으로 사건을 공표한 것이 나았을 것이다.
101번째 테라리움에 마약이 퍼졌다는 사실을 숨겨야만 했는데 하필 이를 눈치챈 미미르가 겁도 없이 세상에 이유를 밝힐 뻔했으니 대책을 논의하기 위해서라도, 그가 정말로 진위를 알고 있는지에 대해 확인하기 위해서라도 잡아 둔 거였다.
어쩌면 미미르에게 그가 조사한 마약 건에 대해 함구하도록 강압적으로 주의를 준 후에야 그를 풀어 줄 생각이었을지도 모른다.
“마약… 때문이었네요.”
내 말에 낮은 거목이 무거운 침음을 흘렸다. 그 역시도 101번째 테라리움의 멸망 연유에 그런 것이 끼어 있다는 사실은 지금 안 모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