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24화 (524/604)

그녀는 결국 내게 도움을 줄 것처럼 보였다. 이럴 때면 드라이어드들이 무척이나 순수하다는 생각이 든다.

나와 올리브는 몇 번 만난 것 외에 큰 인연도 없는데, 오로지 그녀가 태어나기 전 세계수 안에서 내 영혼을 느꼈다는 것만으로도 올리브는 날 호의적으로 대한다.

사람들이 누군가에게 무조건적으로 애정을 주는 일이 쉬운 일이 아닌데, 드라이어드들은 오로지 드루이드라는 이유만으로 일방적이며 과분한 애정을 준다. 그 드루이드가 자신의 주인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내가 소파에 반쯤 누운 채로 이불을 끌어 올리자 올리브가 꼬물꼬물 소파에 등을 기댔다. 다른 드라이어드들은 올리브의 면적이 넓은 머리칼과 옷, 그리고 한 자리 크게 차지하는 바구니 때문에 소파에 더 가까이 다가오지 못한 채로 날 올려다봤다.

“낮은 거목은 그 나무를 별로 좋아하지 않아. 우리와 다르거든.”

낮은 거목이 목화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고? 그래서 1번째 테라리움에서 주요 역할을 수행하는 드라이어드들이 옹기종기 모인 이 방에 목화 드라이어드의 모습만 보이지 않는 걸까?

“다르다는 건 어떤 의미인데?”

“넌 그 답을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해. 그 나무는 오롯이 사람들의 염원으로 태어난 존재야. 그래서 그렇게 사람들의 염원을 잘 들어주는 게 아닐까? 사람들은 그 나무가 세계수의 가지에서 태어났다고 말하지만 낮은 거목은 그 말을 믿지 않아. 하지만 눈감아 주고 있어. 낮은 거목이 은퇴를 하며 그 이후로 일어나는 모든 행정에 대해 간섭하지 않겠다고 선언했거든.”

“내가 그 답을 알고 있을 거라고…?”

“쿠울….”

올리브는 내 질문에 티가 다 날 정도로 자는 척을 했다.

“드라이어드는 잠을 자지 않는다는 거 다 알아.”

“쿨… 쿨….”

올리브 선에선 여기까지가 자신이 베풀 수 있는 최대한의 호의였던 듯하다. 더 이상 알려 줄 마음이 없다는 걸 깨달았기에 묻는 것을 관뒀다.

난 쿠션에 머리를 대고 천장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내가 그 답을 알고 있을 거란 뜻이 무엇일까?

여기 드라이어드들과 다르며 낮은 거목은 반기지 않는 존재. 세계수의 가지에서 태어났다고 하나 낮은 거목은 그 말을 믿지 않는다라…. 설마?

“설마 목화가….”

내 말에 기대어 있던 올리브의 어깨가 움찔 튀었다. 어느 정도 죄책감이 느껴지는 행동이었다.

목화 드라이어드가 인공 개량 드라이어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모든 조건에 부합하는 건 그것뿐이었다. 하지만 뭔가 이상했다.

이 세계의 논리에 의하면 인공 개량은 세계수의 힘에 반하는 행위이며 1번째 테라리움에선 이단 감찰관을 만들어 감시할 만큼 중대한 금지 사항으로 보고 있었다.

16번째 테라리움의 연금탑이 뒤집어졌던 이유도, 그곳의 책임자인 크레아시온을 비롯해 다수의 연금술사들이 끌려간 이유도 모두 세계수에 반하는 금기를 저질렀기 때문이다.

그런 1번째 테라리움이 인공 개량으로 태어난 목화 드라이어드를 보유 중이라고? 너무나도 믿기지 않았다.

혹시 목화 드라이어드가 인공 개량 드라이어드라는 사실을 소수만 알고 있는 걸까? 테라리움이 존경하는 낮은 거목에게까지 가지에서 태어났다고 거짓말할 정도라면 목화를 만들어 낸 소수가 작정하고 눈을 가리고 있을 확률도 충분했다.

그런데 이상한 건 그뿐만이 아니었다. 인공 개량 드라이어드에 대한 문제는 16번째 테라리움의 연금탑 사건 이후로 크게 대두되었다. 그 연금탑에서 자행되던 기술력은 오로지 인페르노의 것으로 1번째 테라리움이 외부 유출을 우려해 연금탑의 모든 정보를 깡그리 긁어가 버렸다.

시기상으로 따지자면 그들이 인페르노의 기술을 접한 이후 목화 드라이어드가 태어났어야 했는데, 플로라의 말에 의하면 목화와 같은 능력을 사용하는 드라이어드의 등장은 훨씬 이전부터였다.

그러니 연금탑에서 정보를 긁어가기 전부터 1번째 테라리움은 인공 개량에 대한 정보를 보유 중이었어야 말이 된다.

그렇다면 인공 개량에 대한 시초는 1번째 테라리움과 인페르노, 둘 중 어느 곳이지? 어째서 1번째 테라리움에서 자신들이 금기시하는 인공 개량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던 거지? 그래 놓고는 어떻게 뻔뻔하게 인공 개량을 연구한 자들을 탄압하겠다고 한 걸까?

아니, 어쩌면 인공 개량에 대한 정보가 있는 인페르노 단원 중 하나가 아주 오래전부터 1번째 테라리움에 잠입해 있는지도 모르겠다.

“더 복잡해졌어….”

“역시 알려 주지 말 걸 그랬나?”

“자고 있던 거 아니었어?”

“아! 쿨… 쿨….”

플로라의 말에 따르면 한 자릿수 테라리움엔 목화 드라이어드와 같은 힘을 사용하는 드라이어드가 각각 더 존재한다고 했다. 그러니 어쩌면 인공 개량은 겉으로는 금지하는 척하면서 자기들끼리 공공연하게 사용해 왔던 건 아닌가 싶다.

이렇다 보니 연금탑의 정보를 급하게 모조리 긁어 가고 요란하게 이단 감찰관까지 세웠던 이유도, 좋은 정보는 자신들이 독점하기 위해서 난리를 피웠던 건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어쩌면 이 세계의 정말 비밀스러운 조직은 인페르노가 아니라 한 자릿수 테라리움들이 아닐까?

“큰 도움이 되었어.”

“정말? 기뻐!”

정말 큰 도움이 되었다. 내 머릿속은 혼란으로 가득 찼으나 그 속에서 묘한 희열감이 빼꼼 머리를 내밀고 있었다. 목화의 존재는 1번째 테라리움의 약점이었다. 어떻게 쓰는지에 따라 거대한 파도를 불러올지도 모르는 치명적인 카드.

난 1번째 테라리움의 행정 관리원은 이 사실을 알고 있을지에 대해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잠에 들었다.

새벽에 가까운 이른 아침, 내 잠을 깨운 건 올리브의 뚱뚱한 새였다. 내 얼굴에 둥지를 틀고 앉는 바람에 숨이 막혀 죽기 직전에 깨어났다.

“으헉! 에퉤퉤, 입 안에 깃털이 들어갔어.”

“와 일어났다. 많이 피곤했나 봐, 아무리 깨워도 일어나지 않았어. 좀 더 자게 내버려 두고 싶었지만 일찍 일어나서 해야 할 일이 있잖아?”

잠이 많은 나를 아주 효과적으로 깨울 수 있는 방법이었다.

물론 그 방법은 내 생명을 위태롭게 만드는 방법이기도 해서 내 드라이어드들의 원성을 샀다. 지금 내가 있는 곳을 메스키트가 잘 알고 있지 않았다면 깜짝 놀라 튀어나온 데이지가 대뜸 뚱뚱한 새에게 무기를 들이밀 뻔했다.

“씻고 나서 이걸로 갈아입으래.”

“하얀 로브…네?”

“응, 변장을 해야 한다고 했잖아. 낮은 거목을 모시는 사람들은 전부 이 옷을 입어.”

그 말에 난 군말 없이 세수 후 하얀 로브를 걸쳤다. 그러자 올리브가 기다렸다는 듯이 나무 가면을 건넸다.

“이것도 착용해야 해?”

“응, 옷만 입는다고 변장이 끝난 건 아니잖아.”

그 가면은 중앙 행정 관리부의 사람들은 물론 내가 방문했던 행정 건물에서 일하던 모든 사람들이 착용하는 가면이기도 했다.

가면을 들자 문득 땅굴에서 사람들이 가디언을 흉내 내며 썼던 마법 가면이 떠올랐다. 그 기억은 썩 달갑지 않았기에 찝찝한 마음으로 손에 든 가면을 썼다.

“혹시 이 가면에 어떠한 장치 같은 게 있어? 연금술이라든가.”

내 질문에 올리브는 말없이 빙그레 웃음만 지었다. 무슨 장치가 되어 있는 것이 분명하다.

“준비는 다 되었습니까?”

나보다 훨씬 일찍 일어나서 준비했을 낮은 거목의 모습은 정갈하고 고아했다. 듣기론 이미 아침 식사를 끝내고 독서도 했다고 한다.

“혹시 원래 이 시간에 일어나세요? 어제 저 때문에 늦게 잠드신 것 같은데….”

“늙으면 잠이 줄어서 말입니다. 하루 정도로 제 오랜 생활 패턴이 깨지진 않으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럼 가 보시겠습니까? 저를 모시는 수하처럼 자연스레 행동해 주시면 됩니다.”

자연스러운 행동이라고 해 봤자 그의 뒤를 졸졸 따라가는 것밖에 되지 않았다. 낮은 거목은 외부인이나 다름없는 날 데리고 건물의 비밀 통로를 거리낌 없이 드나들었다. 아무렇지도 않은 그의 행동에 오히려 내가 더 떨릴 정도였다. 나를 너무 믿는 거 아닌가 싶었다.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낮은 거목을 발견하면 자리에서 멈춰서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낮은 거목이 가면을 착용하지 않았다고는 하나 모두가 그의 얼굴을 알고 있었으며 그에게 존경을 표했다. 테라리움의 행정 관리원이라도 이토록 극진한 대접을 받기 어려울 텐데.

사람들은 낮은 거목의 뒤를 졸졸 따르는 나에게 아무런 의심도 보이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무척이나 자연스러운 것처럼 어떠한 시선도 보내지 않았다.

낮은 거목의 방을 떠날 때만 해도 행여 들키면 어쩔까 심장이 쿵쿵거렸는데 걱정이 무색할 지경이었다. 하긴 낮은 거목 정도 되는 인물이 외부인을 변장시켜 데리고 다닐 거라고 그 누가 생각하겠는가?

“전해 듣기론 그 행정 관리원은 경비대에 없다고 합니다. 어젯밤, 사법 건물의 지하 유치장으로 옮겼다고 하더군요.”

“저… 미미르가 그렇게 큰 죄를 지었다는 건가요?”

“지하 유치장은 꼭 죄가 있는 사람만 들어가는 건 아닙니다. 테라리움에서 재판 진행이나 조사를 위해 부득이하게 신병을 묶어 둘 필요가 있을 경우 연금해 두기도 합니다. 실상 그곳에 들어간 사람 중 열 가운데 여덟은 풀려나 밖으로 나가게 됩니다.”

“그럼 나머지 둘은요?”

“죄질에 따라 더 깊숙한 지하로 연행되겠지요.”

그 말이 너무나 음산하게 들렸다. 대체 미미르는 뭘 했길래….

사법 건물 역시 비밀 통로를 통해 지상의 길을 걸을 필요 없이 바로 이동할 수 있었다. 통로를 지나며 감옥에서 탈출한 죄인이 비밀 통로를 발견하기만 한다면 금방 도피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낮은 거목님 아니십니까?”

그가 사법 건물로 들어서자 작은 소란이 일었다. 그들의 반응은 한결같이 낮은 거목의 방문이 도저히 믿기지 않는다는 듯 난색을 표하고 있었다.

“누군가를 만나러 왔을 뿐입니다. 큰일은 아니니 다들 진정하시지요.”

꽤나 높은 사람처럼 보이는 자도 낮은 거목의 방문 소식에 한달음에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일이 커지는 건 아닌가 걱정했는데, 이 역시 낮은 거목의 말 한마디에 빠르게 정리되었다.

“누구를 만나시려고 하십니까?”

“이곳에 38번째 테라리움의 행정 관리원이 연금되어 있다고 하던데. 자칫 잘못하다간 테라리움 간의 분쟁으로 번질 수 있으니 내 미리 사유를 확인하려고 합니다.”

“그… 낮은 거목님께서 우려하실 일은 발생하지 않을 겁니다. 그분께서는 빠르면 오늘 오후 중으로 풀려나실 예정입니다. 조사만 빨리 끝난다면….”

“그건 제가 판단합니다.”

일순 낮은 거목의 분위기가 무겁게 바뀌었다. 내게 인자한 할아버지처럼 친절히 대해도 그가 보이는 것과 달리 무척이나 권위 높은 인물이란 걸 다시금 깨닫게 된다.

이후 일은 속사포처럼 진행되었다. 난 낮은 거목의 동행인 신분으로 어렵지 않게 미미르와 만날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미미르를 보러 가던 길에 의외의 인물을 만나게 되었다. 마치 어항 같은 유리 케이지 안에 갇혀 있는 크레아시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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