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테라리움인지도 나와 있나요?”
설마 그 정보까지 기록되어 있나 싶었지만 궁금했다. 카수스가 처음으로 모험을 시작한 테라리움이 대체 어디일까?
“그건….”
페이지의 어느 부분을 짚으며 그가 침음을 내뱉자 나는 안달이 났다.
“적혀 있는 건가요?”
“네, 아마도 적혀 있는 듯하지만 기이하게도 이 부분만 암호로 적혀 있군요. 그러고 보니 저자의 기록물 중엔 드문드문 암호가 섞여 있어 읽더라도 기억에 남지 않은 부분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암호요?”
모든 기록을 다른 이들이 알아볼 수 있도록 적어 놓고 가디언을 개화한 테라리움만 암호로 감춰 뒀다고?
“제가 한번 봐도 될까요?”
내 요청에 그가 책을 내 쪽으로 돌려 주었다. 적혀 있는 암호를 확인했는데 놀랍게도 내가 알 수 있는 암호였다. 숫자 대신 적혀 있는 것은 한자 ‘百’과 ‘一’의 조합으로, 해석하자면 101번째 테라리움을 뜻했다.
<테라리움 어드벤처>에서는 마치 한글 패치가 된 게임처럼 자연스럽게 내가 쓰던 언어들을 사용할 수 있었는데, 내가 외국어로 인지하는 글자들은 이곳 역시 범주 외의 글자로 취급되는지 암호가 되고 말았다.
“101번째 테라리움….”
카수스가 모험을 시작한 테라리움이 101번째 테라리움이라니. 그것도 하필 최근 멸망으로 화두에 오른 그 테라리움인 건 그저 우연일 뿐일까? 100번대의 마지막 테라리움이자 1번째 테라리움이 지켜 내려고 했던 그 테라리움.
“카수스는 101번째 테라리움에서 어떠한 가디언을 개화했군요.”
혹시 그가 101번째 테라리움의 최후와 관련이 있을까?
여행을 하며 드라이어드 열매와 가지에 관련된 이야기를 많이 접했다.
하나의 가지에서 태어난 드라이어드들은 마치 메스키트와 엘더처럼 인연이 깊을 확률이 높은데, 이런 점 때문인지 인간들도 같은 고향 출신의 사람들에게 더욱 유대감을 느끼듯 드라이어들도 한 가지에서 태어난 드라이어드들을 형제처럼 여기기도 했다.
이리스 파티의 경우 유독 팀 내에 모체의 신화를 따르는 드라이어드들이 많은데 그들 모두 한 가지에서 태어난 드라이어드들이었다. 이와 같은 점을 미뤄 볼 때 성향이 비슷한 드라이어드들이 한 가지에 몰려서 태어나는 경우도 있는 듯했다.
혹은 열매 뽑기에 과몰입한 사람들 사이에선 높은 등급을 가진 종의 경우 한 가지에서 중복으로 나타나지 않는다거나 이미 높은 등급이 앞서 개화된 경우, 다음에 높은 등급이 나올 확률이 현저하게 줄어든다는 등 근거 없는 낭설이 떠돌기도 했다.
이처럼 특정 가지 자체에는 상징성이 있는 듯한데, 어쩌면 카수스가 이 상징성을 노리고 101번째 테라리움에 방문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가 노리는 가디언이 메스키트처럼 죽지 않고 세계수로 돌아간 것이라면, 열매를 통해 다시 세상으로 나올 확률도 있었다.
메스키트가 특이 케이스라 생각하여 그녀 외에 열매로 또 가디언을 얻을 수 있는 확률에 대해선 전혀 생각지도 못했다. 나머지는 전부 여행을 통해서 만나야 할 거라고 생각했었다.
마거리트가 제 의지로 내게 오기 위해 28번째 테라리움의 가지에 맺혔던 것을 떠올려 보면, 카수스가 노리는 가디언도 주인과 만나기 위해 제 의지로 가지로 찾아갈 가능성은 없을까? 둘 사이에 처음으로 만난 가지라는 약속의 증표만 있다면, 가디언이 세계수의 품 안에서 카수스의 부활을 알아차리고 행동에 나섰다면 둘이 다시 만나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
“낮은 거목님… 101번째 테라리움은 어떻게 멸망한 건가요? 진실로 불에 의해, 테라리움에 주둔한 병사들이 불의 전력을 이겨 내지 못해 망한 것이 맞나요?”
회담에서 중앙 행정 관리부가 101번째 테라리움의 멸망에 대해 이야기했을 때, 그들이 묘한 표정을 짓던 것과 무언가를 숨기는 듯한 태도를 했던 것이 거슬렸다. 그리고 지금 알게 된 카수스와의 연관성. 어쩌면 멸망에 카수스가 관여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강렬하게 들었다.
“물론 극비일 수도 있겠죠. 101번째 테라리움의 멸망은 1번째 테라리움의 자존심이 걸린 문제이니까요. 하지만 진실을 알고 싶을 뿐이에요. 어쩌면 그곳에서 카수스가 가디언을 얻기 위해 무슨 수를 쓴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일선에서 물러난 늙은이에게 너무 어려운 것을 묻습니다만…. 이런 곳에 처박혀 세계수께 기도를 올리는 일이 전부인 제가 테라리움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속속들이 알긴 힘들지요.”
“모르시는 건가요….”
“하지만 이 늙은이를 따르는 아이들이 아직 요직에서 활동 중이라 작은 소문 정도는 얻어듣는답니다. 101번째 테라리움은 의심했던 대로 오롯이 불의 전력에 밀려 멸망한 것은 아닙니다. 그곳엔 1번째 테라리움은 물론 한 자릿수 테라리움의 지원과 각 길드에서 차출된 정예들이 주둔하고 있었으니까요.”
그래, 그것 역시 의문이었다. 작정하고 전력을 밀어 넣었는데 허무하게 불에 진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그런 전력마저 불에 백기를 들었다면, 사실상 이 세계에 이제 불에 맞설 수 있는 전력이 있기는 한 건가 싶다.
“불의 침입에 전력을 다해 맞설 수 없는 상황이었다는 건 압니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모르나.”
“침입 당시 주둔하고 있던 자들에게 무슨 문제가 생겼다는 거죠?”
“그렇지요.”
그들에게 문제가 있었다. 그렇기에 싸움에 패했다. 문제라고 하면… 대체 무엇일까?
“문제에 대해 알아내는 건 제 몫이겠죠? 수상한 점으로 인해 카수스의 개입에 대해 더욱더 의심이 가기 시작했어요.”
“이제 물어볼 것은 다 물어본 것입니까?”
낮은 거목에게 물어보고 싶었던 것 중 가장 중요한 것이 해소되었다. 그리고 아직 남은 것이 있었다.
“금일은 테라리움의 모든 행정 관리원이 소집되어 회담이 열렸어요. 그중 38번째 테라리움의 행정 관리원도 분명 참여를 했어야 했는데… 어떠한 연유로 경비대에 끌려가 구금되어 현재까지 풀려나지 못한 것으로 보여요. 제가 그를 만날 수 있을까요?”
“행정 관리원이 경비대에 끌려갔다라… 이건 결코 좌시할 수 없는 문제입니다만. 자칫 잘못하다간 테라리움 간의 갈등으로 번질 수 있어서 그렇게 과격하게 처리해선 안 될 텐데.”
맞는 말이었다. 더구나 미미르는 베스탈리스 가문의 사랑둥이 막내아들이었다. 그들이 미미르가 끌려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1번째 테라리움과의 조약을 어긴 채 쳐들어올지도 모를 일이었다.
“목격자에게 듣기론 그는 경비대에게 무언가를 말했고 이를 듣자마자 바로 끌려갔다고 해요. 분명 신분도 제대로 밝혔을 거예요. 그럼에도 끌려갈 이유가 대체 뭘까요?”
“어쩌면 중앙 행정 관리부가 경비대에 따로 명령을 내렸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에 대해 들은 것이 없으니 유추할 뿐이지요. 하지만 행정 관리원을 절차 없이 구금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일선에 물러났던 제가 한 번쯤 개입해 볼 여지는 있겠군요.”
낮은 거목은 자신의 권한을 사용하여 미미르와 날 만나게 해 주겠다고 했다. 다만 따로 면회 자리를 마련해 주는 건 어려울 듯하고 자신과 동행하여 만나러 가는 건 가능하다고 했다. 더욱이 내 신분을 가리기 위해 낮은 거목을 모시는 사람들 중 하나로 변장해야 했다.
그는 내가 세계수의 순례자라는 이유만으로 정말 정성스레 도와주었다. 거의 대가 없는 도움이나 마찬가지였는데, 훗날 그가 나에 대한 진실을 알게 된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걱정이 되었다. 이렇게나 많은 도움을 받았는데….
지금은 밤이 너무 늦어 미미르와 만나는 건 내일로 미뤄졌다. 날이 밝은 후엔 아까처럼 몰래 이곳에 오기 힘들기에 여기서 날이 밝을 때까지 묵은 후 곧바로 변장 후 경비대에게 가기로 했다.
나는 방 한쪽에 있는 긴 소파에 자리를 잡았다. 벽난로 앞에 앉아 있던 드라이어드들이 조심조심 내 곁으로 모이는 꼴이 꼭 커다란 고양이들 같았다.
“아, 혹시 한 가지만 더 물어봐도 될까요? 그렇게 어려운 질문은 아닌 듯한데….”
잠에 들기 위해 침실로 향하던 낮은 거목에게 물었다.
“오늘 회장에서 어떤 드라이어드를 만났는데….”
난 그에게 목화 드라이어드와 만났던 일화를 이야기했다.
“그 드라이어드가 정말 목화 드라이어드가 맞나요? 미처 본인에게 물어보는 걸 잊었네요. 짐작하기론 그 드라이어드에게 세계수 가지에서 소망하는 드라이어드의 열매를 얻을 확률을 높여 주는 힘이 있는 듯하던데 사실인가요?”
그런데 카수스의 정보에 대해 알려 주기 위해 고서를 가져와 뒤지고, 미미르와 만나게 해 주기 위해 직접 나서기까지 하려던 그가 이 질문에 대해선 아무런 답도 해 주지 않았다.
“…금방 일어나야겠지만 좋은 꿈 꾸시길 바랍니다.”
그렇게만 말한 채 느릿한 걸음으로 침실로 들어가 버렸다. 정말 의외였다.
1번째 테라리움에서 극비로 여길 정보나 다름없는 101번째 테라리움의 수비 실패 요인에 대해서도 아는 한도 내에서 알려 줬으면서 목화 드라이어드의 질문에 대해선 어떤 긍정도 부정도 없이 밤 인사만 할 뿐이었다. 그래서 더욱 기묘한 기분이 들었다.
“저기… 올리브, 낮에 내가 만났던 드라이어드 말인데. 하얀 솜 같은 꽃을 단…. 내게 꼭 필요한 꽃을 얻길 바란다고 말해 준 그 드라이어드 말야.”
올리브는 그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내가 어떤 드라이어드를 말하는지 잘 알 것이다.
“목화 드라이어드가 맞아?”
“응, 그 애는 목화에 가까워.”
“가깝다고?”
맞으면 맞은 거지 가까운 건 또 뭐람?
“그 드라이어드에겐 뭔가 특별한 게 있는 거야? 낮은 거목이 언급을 피하는 걸 보니 뭔가 있는 듯한데.”
내 말에 올리브는 빙그레 웃기만 할 뿐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난 네가 정말 좋아. 세계수 안에서 너의 영혼을 느꼈을 때 정말 기뻤어. 그래서 우리가 만나게 된다면 내 모든 힘을 다해 널 도와주겠다고 다짐했어.”
“그건 고마워. 정말 많은 도움이 되었어. 낮은 거목과 만나게도 해 주었잖아.”
“하지만 미안해. 나 또한 어쩔 수 없는 드라이어드이기 때문에 주인인 드루이드를 더 우선할 수밖에 없어.”
“네 주인은 낮은 거목이 아니지 않아?”
분명 16번째 테라리움으로 올리브와 함께 찾아왔던 이는 다른 이였다. 드루이드와 드라이어드는 먼 거리를 동떨어져 있을 수 없었다. 그러니 그때 찾아왔던 중앙 행정 관리부 사람 중에 올리브의 주인이 있을 것이다.
“내 주인은 1번째 테라리움을 무척이나 사랑해. 그리고 낮은 거목은 1번째 테라리움에선 없어선 안 될 아주 중요한 자야. 그러니 주인이 사랑하는 테라리움에 포함되어 있다고 볼 수 있지. 주인은 낮은 거목을 아주 존경하기도 해서 그에게 도움이 되기 위해서, 심심함을 달래 주길 원해서 날 보낸 거거든. 그를 따르는 것이 곧 주인의 뜻이기도 해. 그러니 그가 말하길 원치 않았다면 나 역시 네게 많은 것을 알려 주긴 어려울 것 같아.”
“그렇구나.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그래도 어렵다고 했지. 아예 안 되는 일이라곤 안 했는걸.”
올리브는 낮은 거목에게 데려다주겠다고 약속했을 때처럼 날 향해 해맑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