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책장을 밀자 마치 미닫이문처럼 부드럽게 밀리며 그 뒤로 감춰진 공간이 나타났다. 비밀 입구를 통해 어디론가 사라졌던 그는 잠시 후, 다시 돌아올 땐 거대하고 아주 낡은 책을 가져왔다. 한눈에 봐도 범상치 않은 책이란 걸 알 수 있었다.
“이 기록이 완벽하게 사실이라고 말할 순 없으나 비교적 신뢰도가 높은 편이랍니다.”
낮은 거목은 그 책을 테이블 위에 조심히 내려 두었다.
“그 드루이드가 살던 시대에 집필한 책을 구하는 건 현재 거의 불가능할 겁니다. 그는 재앙을 몰고 오기도 했지만 한편으론 그 사실을 후대에 알리기 싫어서 관련 기록들을 전부 소거해 버렸다고 전해지지요. 오늘날 많은 이들이 과거에 대해 알지 못하는 건 이 때문입니다.”
분서갱유, 그건 내가 살던 세계에서도 어떤 나라가 과거에 행했던 일이다. 과거 일에 대해 기록이 거의 없는 이유에 그런 내막이 있을 줄은 몰랐다.
“부끄러운 짓이란 건 알았나 보네요.”
한편으론 드루이드 하나가 제 기록을 모두 불태울 만큼 힘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이 놀랍기도 했다. 그는 정말 마왕과 같은 자였다.
“하지만 세상 모든 기록을 없애는 데는 실패했기에 지금까지 이야기가 전해지는 거겠죠?”
난 은둔자의 정원에서 살았던 사람들을 떠올렸다. 그들은 카수스를 비롯한 그의 최측근들의 후손들로, 세상에 재앙이 도래했을 때 폐쇄된 섬으로 대피해 살아남아 지금까지 피가 이어진 자들이었다. 그곳의 공중 정원 벽화엔 카수스가 미처 없애지 못한 재앙의 전말이 담겨 있었다.
하나 지금은 그 섬이 거대한 해일로 인해 가라앉아 버렸기 때문에, 사실상 신뢰성 높은 기록이 하나 더 세상에서 소멸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러고 보니 이 기록이 완벽하게 사실이라고 말할 수 없는 이유는 뭔가요?”
“이건 그때 당시에 살았던 사람이 기록한 것이 아닌, 후대의 사람이 여행을 하며 보고 들은 정보를 바탕으로 작성한 것이기 때문이지요. 후대라고 하더라도 지금보다 훨씬 옛날의 것이긴 합니다.”
난 만지기만 해도 금방 바스러질 것처럼 낡은 책을 빤히 바라보았다. 표지가 없는 책이었다.
“기록하길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기에 지금까지도 과거가 전해지는 것이겠지요.”
“기록하길 좋아하는 사람들…. 그러고 보니 기록에 특화된 드라이어드들이 있는 걸로 아는데. 직접 만나기도 했거든요. 파피루스라고. 그 드라이어드들을 통해 과거를 확인하는 것은 어려울까요?”
“그 종들이야말로 걸어 다니는 역사라고 볼 수 있지요. 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머릿속에 있는 기록을 입 밖으로 내뱉는 순간 가치가 사라진다고 믿는 종들입니다. 자신들이 과거의 역사를 폭로함으로써 현재가 달라지는 것을 부정한 개입이라고 여깁니다. 관찰하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자신들의 개입으로 인해 무언가 바뀌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는 거지요. 그들을 설득할 수만 있다면 세상엔 수많은 진실이 풀려날 것입니다.”
난 16번째 테라리움의 연금탑에서 만났던 파피루스를 떠올렸다. 그 드라이어드는 잘 지내고 있으려나? 주인이 1번째 테라리움에 끌려갔기 때문에 잘 지내고 있진 않을 것 같지만.
“하지만 혹시 모릅니다. 드라이어드들은 주인인 드루이드에 대한 충성심이 높으니 파피루스 중 유독 주인을 위하는 이가 있다면 과거를 발설했을지도요.”
그 파피루스는 크레아시온에게 카수스가 활동하던 때의 과거를 이야기해 줬을까?
낮은 거목이 낡은 책을 조심히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어쩌면 이 책을 쓴 저자도 파피루스를 데리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이 저자도 드루이드거든요. 다른 기록에서 찾기 힘든 정보들을 꽤 많이 알고 있는 걸 보니 합리적 의심이 들기도 합니다.”
그렇게 말하니 책에 대해 더욱 궁금증이 생긴다.
“비단 이 한 권뿐만 아니라 해당 저자의 기록서가 세상 널리 퍼져 있는데, 제가 죽기 전에 그 책들을 모두 모으는 것이 꿈이랍니다. 허허.”
“저자에 대한 정보는 없나요?”
문득 낮은 거목이 소유하고 있는 책을 비롯해 그 수수께끼의 저자가 남긴 기록을 전부 모으게 된다면 세상에 대해 아주 많은 것을 알게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름도 알지 못합니다. 그저 필체에서 느껴지는 감각을 통해 저자의 성별이 어쩌면 여성이 아닐까 추측하고 있을 뿐이지요. 기록도 특별한 주제를 정해서 하는 것이 아닌 보고 듣는 모든 것을 메모처럼 기록해 둔 느낌이라 어떤 활동을 한 드루이드인지도 특정할 수 없습니다.”
“…….”
낮은 거목의 말을 듣자 문득 떠오르는 게 있었다.
“학자들은 아주 오래전에 발굴된 고서에서 본 이론이라고 했습니다만….”
“비밀로 하겠다더니 결국 책으로 써서 남겼나 보군요. 제 전 주인은 뭐든지 글로 남기는 걸 좋아했어요.”
롬가토의 연구실에서 드라이어드의 등급 책정에 대한 이론을 이야기했을 때, 메스키트가 자신의 전 주인에 대해 언급하며 그런 이야기를 했었다. 뭐든지 글로 남기는 것을 좋아했다고. 그녀가 남긴 글은 학자들의 연구 대상이 되기도 했다.
그땐 몰랐지만 메스키트의 전 주인인 이름 모를 소녀는 내 영혼의 전생과 인연이 있는 자였다. 나를 대신하여 한발 먼저 테라리움 어드벤처 세계로 떠나서 메스키트를 만나게 되었지. 그리고 그곳에서 아주 오랫동안 나를 기다렸었다.
문득 그녀가 그렇게 뭐든지 글로 남기는 것을 좋아하게 된 이유가, 훗날 넘어오게 될 나에게 알려 주기 위해 그랬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여자인 드루이드라고 했으니까 어쩌면….”
“짐작 가는 사람이라도 있으십니까?”
“그저 추측일 뿐이에요. 아니, 확신시켜 줄 존재가 있네요.”
난 아티팩트에서 메스키트를 불러냈다. 밖으로 나온 그녀는 낮은 거목을 향해 정중히 인사를 했다.
“메스키트, 혹시 이 책에 대해 알아볼 수 있겠어?”
내 말에 그녀는 낡은 책을 조심히 집어 들었다. 낮은 거목이 품에 안아 겨우 움직일 정도로 거대했던 책이 메스키트가 손에 쥐자 보통의 책과 다를 바 없는 것처럼 보였다.
“이건….”
“혹시 네 전 주인의 책이야?”
“제 전 주인은 뭐든지 글로 남기는 걸 좋아했었지요…. 맞아요. 이건 그녀의 책이에요.”
메스키트는 책을 바라보며 씁쓸한 웃음을 지었지만 그뿐이었다. 이전처럼 그녀를 그리워한다거나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가슴 아파하지 않았다.
“그 애가 쓴 책이 이게 전부는 아니겠지?”
난 영혼의 과거 기억 속에서 내게 끊임없이 말을 걸었던 그 소녀의 얼굴을 떠올렸다.
“틈만 나면 빈 책을 사다가 보고 들은 것을 채웠지요. 제게서 비밀로 하겠다 당부한 내용이라도 말이에요. 아니면 틈틈이 종이를 꺼내 무언가를 적고 그것을 한데 묶어 책으로 만들기도 했어요. 그녀가 죽은 후 저 또한 곧바로 세계수로 돌아갔기 때문에 그녀의 유품들이 어떻게 되었는진 알지 못해요. 어쩌면 여기 이 책이 있는 까닭이 그걸 잘 설명해 줄지도 모르겠군요.”
“그 애에게 너 말고 다른 드라이어드가 있었어? 파피루스라든가.”
“아니요. 그녀의 드라이어드는 오직 저뿐이었답니다. 영혼이 너무 약해서 저를 감당하는 것만으로도 버거워했거든요.”
그 애의 영혼이 약했던 이유는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서 다른 세계로 넘어가 버렸기 때문이 아닐까?
낮은 거목은 우리의 이야기를 아무 말 없이 찬찬히 경청했다. 그 애가 기록한 모든 책을 모으는 것이 그의 죽기 전 꿈이었던 만큼, 오랫동안 베일에 싸여 있던 저자의 정체가 드러난 순간이 꽤나 감명 깊은 모양이었다.
“그분 덕분에 이렇게 과거가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습니다.”
“내 전 주인을 추억하는 이가 늘었다면 기쁜 일이겠지요. 과할 정도로 기록에 집착했던 그녀의 행동이 좋은 영향을 끼치고 있다면 다행입니다. 그것이 내 진정한 주인, 제희에게 도움이 되고 있다면 더욱더.”
메스키트는 책을 다시 테이블에 내려놓은 후 내 머리에 살포시 손을 올렸다.
“밤이 늦었어요, 제희. 요 며칠 일 때문에 바빠 많이 피곤할 텐데 할 일은 빨리 끝낸 후 잠에 들었으면 좋겠네요.”
그렇게 말한 후 그녀는 아티팩트로 돌아갔다. 메스키트의 손이 닿았던 머리를 매만지는데 어쩐지 낯이 뜨거워졌다.
“그럼… 그 책에서 제 질문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는 건가요?”
“재앙의 드루이드가 열매를 통해 가디언을 개화했는지 궁금하다고 하셨지요. 이 책에서 읽은 기억이 있어서 말입니다.”
낮은 거목이 책을 펼쳐 기록을 찾기 시작했다.
“보기엔 이래 보여도 연금 약 처리를 하여 쉽사리 망가지지 않습니다. 오래된 고서들이 지금까지 읽힐 수 있는 이유는 연금탑이 열심히 연구하는 덕분이지요.”
말을 하면서도 손은 바쁘게 움직였다.
“이렇게 후대에 도움이 되는 역사서만 있다면 다행이지만. 방금 전 드라이어드가 말하길, 보고 들은 모든 것은 물론, 비밀로 하겠다고 당부한 내용까지 기록한다고 했지요? 그렇다면 결코 전해져선 안 되는 기록 또한 저자로 인해 아직까지 세상에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말씀드렸다시피 저자가 기록한 책의 주제가 정말 다양하기도 하고.”
“만약 사실을 알게 되면 자신의 드라이어드를 강하게 만들기 위해 다른 드라이어드들을 죽일 수 있는 것이 사람의 욕심이니까 그렇습니다.”
세계수 밖에 존재하는 동종의 드라이어드 수가 적을수록 해당 종의 등급이 높아지고 힘이 강해진다. 이 이론을 역이용하여 자신이 보유한 드라이어드를 보이는 대로 죽이고 다니는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걸 메스키트는 우려했다. 난 실제로 사람들이 얼마나 잔인하고 사악해질 수 있는지 겪어 보았다.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혼란이었다. 그래서 어떠한 지식은 사람들이 알지 못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결코 전해져선 안 되는 기록….”
77번째 테라리움에서 전대 노멀 필드 가디언을 부활시킨 봉인된 서적에 대해서 떠오르는 건 어째서일까…?
“여기 있군요. 네, 짐작하셨던 것이 맞습니다. 카수스는 10그루의 가디언 중 한 그루를 테라리움에서 열매 개화를 통해 얻었습니다. 그가 드루이드로서 여행을 떠나기 전 처음으로 개화한 드라이어드가 가디언이었군요.”
나는 왜인지 그의 상황이 내가 초보 시절 메스키트를 개화한 것과 많이 유사하단 느낌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