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이시아에게 얻을 정보는 그게 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폴룩스는 없고 행정 관리원은 마약에 빠져 허송세월을 보내고 있으니 48번째 테라리움의 현재와 미래는 불 보듯 뻔했다. 60번째 테라리움이 파산하여 경매에 나왔던 것처럼 그곳도 머지않아 파산 판정을 받고 경매에 나올 것이다.
수확제조차도 제대로 진행되고 있을지 의문이었다. 아니, 근본적으로 그 테라리움의 가지에서 열매가 정상적으로 맺히긴 했을까 궁금했다.
가지를 건강히 관리하기 위해선 원활한 다이아 수급이 기본 철칙이었다. 궁핍한 생활을 했던 60번째 테라리움의 세계수 가지도 직전에 다이아를 들이붓지 않았으면 열매를 맺지 못했을 거라는 판정을 받았었다.
폴룩스가 그토록 기대하던 수확제마저 망쳤을 테니 48번째 테라리움의 끝은….
“그러고 보니 미미르가 수확제가 시작되기 이전에 48번째 테라리움의 가지 검사를 맡았을 텐데? 이봐요. 38번째 테라리움에서 품질 검사를 받긴 한 건가요?”
카이시아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대답에 불현듯 불길한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어쩐지 미미르가 현재 경비대에 수감되어 있는 원인에 뭔가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느낌을 받았다.
“48번째 테라리움에서 성행 중인 마약에 대해서도 들켰을 텐데요?”
“그거에 대해선 잘 몰라…. 그저 38번째 테라리움에서 방문했다는 것만 알아.”
가지 품질 검사가 진행되는 중요한 순간에도 카이시아는 약에 취해 있었다는 소리였다.
난 시들링에게 그녀를 풀어 주라고 눈짓을 보냈다. 회장을 그렇게 뛰쳐나가 버린 모습을 보고 어쩌면 그녀에게 도움의 손길이 필요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다. 무시할 수 있었음에도 시들링에게 부탁해 그녀를 찾게 한 것은, 그래도 한 번은 얼굴을 마주하고 이야기를 나눴던 인연이란 게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는 도움이 필요하지도, 아니 도움을 받을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다. 그날 그런 모습을 보여 줬더라도 동생의 죽음을 계기로 변화하려는 모습이 조금이나마 존재했다면, 그때 내가 퀘스트를 수락하지 않은 죄책감이 움직여 그녀에게 손길을 내밀었을지도 모른다.
자리에서 일어나 비척비척 떠나는 그녀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내가 너무 매정한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자꾸만 들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돕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그녀는 악당이 아니었다. 물론 그녀가 소유한 48번째 테라리움의 주민들에겐 악당이나 다름없는 인물이겠지만 내게는 어떠한 해도 끼치지 않았기에, 적어도 내게는 악당이 아니었다.
사람 간에 맺어진 모든 인연은 소중하며 악연 또한 무시하지 않아야 뒤탈이 없었다. 난 그걸 더쉬맨의 일로부터 배웠다. 제대로 마무리하지 못한 악연이 끈질기게 날 쫓으며 끝내는 내 주위 사람을 다치게 만들었다.
카이시아에게 최소한의 호의를 베풀어, 우리의 악연이라고 부르지도 못할 애매한 인연을 적당히 마무리할 수 있는 선택을 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끝내 나는 48번째 테라리움을 떠날 때 그랬던 것처럼 멀어지는 퀘스트 마크를 무시하는 선택을 했다.
어쩌면 훗날 오늘 선택에 대해 고찰해 보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 그래도 끝까지 그녀를 붙잡지 않았다.
“시들링, 내가 카이시아를 도와줘야 했다고 생각해? 지금이라도 그녀에게 마약 중독을 떨쳐 내고 그녀의 동생과 테라리움의 주민들에게 회개할 기회를 줬어야 했다고 말이야.”
답은 알고 있지만 그에게 어떠한 위로를 받고 싶었던 걸지도 모른다. 내 물음에 그는 덤덤하게 답했다.
“넌 신이 아니다.”
그 말에 난 어떠한 말도 할 수 없었다.
늦은 밤이 될 때까지 나와 시들링은 돌아가지 않고 기다렸다. 한가한 편이었으나 칼미아가 열심히 이야기했던 생태 공원은 끝내 방문하지 않았다. 데이트할 기분이 전혀 아니었기 때문이다.
난 하늘 높이 떠오른 달을 바라봤다. 세계 어느 곳에선 불에 의해 테라리움이 멸망해 가고 있을 텐데 밤하늘은 지나치게 아름다웠다. 날씨가 무척 맑아서 하늘에 떠 있는 별들이 채 헤아리기 힘들 정도로 많이 보였다.
“별관의 정원으로 나오라고 했었지.”
지금쯤이면 올리브가 약속했던 시간이 맞을 거다. 둘이 움직이는 건 눈에 띄어 시들링을 여관에 대기시킨 후 나 혼자 약속 장소로 나갔다. 회담으로 인해 북적거렸던 건물이 밤을 맞아 조용했다. 하지만 1번째 테라리움답게 아직도 야근을 하는 사람들이 많이 보였다.
사람들의 눈을 피해 별관 정원으로 향하자 누군가 기다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가까이 다가가자 어둠 속에 녹아드는 검은 로브를 입은 자가 날 알아보고 손짓했다. 그러곤 곧바로 등을 돌려 어디론가 걸어가기 시작했다.
따라오라는 뜻으로 여겨져 재빨리 그 뒤를 쫓았다. 우린 인사는커녕 아무런 말도 주고받지 않은 채 뻥 뚫린 복도를 걸었다.
얼마쯤 걷자 주변이 상당히 눈에 익는다는 느낌을 받았다. 낮은 거목과 함께 걸었던 길이었다. 그때 그가 말하길 1번째 테라리움의 주요 건물들은 서로 비밀 통로로 연결되어 있다고 했던가. 외부로 새어 나간다면 이보다 더 치명적인 비밀이 없을 거라 했지.
날 어떠한 문 앞에 바래다준 이는 또다시 아무 말 없이 날 내버려 두고 떠나 버렸다. 난 주위를 살핀 후 문에 노크를 했다.
똑똑, 간결한 노크 소리 이후 잠깐의 고요가 흐르다가 문 너머에서 들어오라는 소리가 들렸다.
“실례합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따뜻한 훈기와 잘 마른 장작의 훈훈한 향이 나를 반겼다.
“오랜만입니다. 그간 잘 지내셨는지요.”
암체어에 앉아 있던 낮은 거목이 반갑게 날 맞이했다. 추운 날씨가 아님에도 방 한쪽에 자리한 돌난로에서 작은 모닥불이 타오르고 있었다. 그 앞에 올리브를 비롯한 드라이어드 몇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초롱초롱한 눈으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갑작스럽게 만남을 요청드려 죄송합니다.”
“사람 사는 일이 어떻게 매번 예정대로 흘러가겠습니까? 이 늙은이는 은퇴하여 남는 것이 시간이니 너무 걱정하지 마시지요.”
우리가 처음 만났던 날, 내게 분에 넘치는 선물을 주고 영원한 안녕을 고했건만 이토록 환영해 주니 미안할 따름이었다.
“자리에 앉으시지요. 밤이 늦어 간식을 내오긴 어렵고 차라도 괜찮겠습니까?”
“아무것도 주지 않으셔도 괜찮아요.”
“그럼 올리브 열매 먹을래?”
지켜보고 있던 올리브가 불쑥 내 앞에 올리브 바구니를 내밀며 해맑게 웃었다. 바구니 가운데에 앉아 졸고 있던 살찐 새가 깜짝 놀란 눈으로 날 바라보았다.
“정말 괜찮아.”
바구니를 밀어내자 올리브가 아쉬운 얼굴을 하며 물러났다.
“그래서 무슨 일로 이 늙은이를 급하게 찾으셨습니까?”
“여쭙고 싶은 게 있어서 왔습니다. 1번째 테라리움에서 가장 지식이 많고 과거 역사에도 능통한 분의 도움이 필요했습니다.”
“과찬입니다.”
그가 농담이라도 들은 것처럼 허허 웃었지만 어느 곳에서도 찾기 힘들 카수스의 과거 이야기를 알고 있는 데다 잠깐 이야기를 나눈 것만으로도 현자라고 느껴질 만큼 아는 것이 많은 노인이었다.
난 오늘 목화 드라이어드를 만났을 때부터 지금 낮은 거목을 만날 때까지 머릿속에 정리한 질문을 하나둘 풀어놓았다.
“세상에 재앙을 불러온 드루이드인 카수스, 그가 모은 10그루의 필드의 가디언에 대해서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그건….”
“물론 같은 가디언들조차 서로의 행방이나 정체에 대해 침묵하는 것은 저도 알고 있습니다. 궁금한 것은 정체가 아니라 카수스가 가디언을 얻은 방법에 대해서 말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가 가디언 중 한 그루를 가지에서 얻은 열매로 개화시켰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혹시 아시는 바가 없으신가요?”
내 물음에 낮은 거목은 말없이 깊은 생각에 빠진 얼굴이 되었다.
“낮은 거목님 덕분에 포인세티아를 만나게 되었고 지금은 저와 함께 여행을 하게 되었습니다.”
내 말에 그는 무척이나 인자한 웃음을 지으며 잘됐다고 답했다.
“그녀와 영혼의 연결을 하기까지 많은 일이 있었는데… 그중 카수스가 죽지 않고 어느 스노우 필드 한 곳에 깊은 동면 상태로 지내던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결국 부활했습니다.”
하지만 이어진 말에 그의 얼굴이 삽시간에 굳었다.
“그 말이 진실됨을 세계수 앞에 맹세할 수 있습니까?”
“전부 진실이라고 맹세할 수 있어요. 부활 후 그의 모습을 직접 봤습니다.”
“이 이야기를 또 누가 알고 있습니까?”
“제 드라이어드들 외엔 아직 누구도 모릅니다.”
세상을 멸망시킨 드루이드에 대해 아는 사람은 은둔자의 정원 사람들을 제외하면 그다지 많지 않다. 드라이어드들 조차도 모르는 이가 많을 정도로 아주 오래전 감춰진 진실이었다.
그러니 그 재앙이 다시 부활했다는 말을 해 봤자 곧이곧대로 믿을 사람도 없거니와 혼란만 불러올 것이 뻔했다.
“인간들 중 당신께 처음으로 이 이야기를 꺼내는 이유는 당신이 일선에서 물러나 폐쇄적인 생활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중앙 행정 관리부로 복귀해 일을 벌일 거라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입니까?”
“네, 10그루의 가디언을 전부 모으는 건 제 숙명입니다. 그러니 필수 불가결로 카수스와 부딪히게 될 것이고 그를 해치우는 건 제가 될 거예요. 수색 능력이 뛰어난 포인세티아조차 꼭꼭 숨은 그를 찾기 어려워하고 있는데 중앙 행정 관리부가 나서 봤자 도움은커녕 그의 부활을 알리는 일밖에 되지 않는다고 생각해요. 먼 옛날 그에겐 수많은 추종자가 있었다고 알고 있습니다. 세상에 재앙을 불러왔지만 이미 정점을 찍었던 드루이드입니다. 현대에도 같은 상황이 되풀이되지 않을 거란 보장이 없어요.”
내 말에 낮은 거목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중앙 행정 관리부는 불을 추종하는 인페르노에게도 쉽게 속을 내주었던 전적이 있었다. 모든 이들이 순수 고결하다고 볼 수 없었다.
“부활한 카수스가 다시금 필드의 가디언을 모으고 있을 가능성이 큽니다. 이미 한 번 모아 봤으니 한정된 정보를 가진 저보다 수월하게 일을 진행하겠지요. 더구나 그때의 가디언들이 후대에 자리를 계승하지 않고 그대로 유지되고 있을 경우, 전 주인인 카수스의 품에 다시 돌아갈 것은 뻔합니다.”
“카수스가 과거 가디언을 얻었던 행위를 반복할 가능성이 크니 제게 도움을 구하려던 것이군요.”
“네, 제게 주셨던 루비 목걸이에 대한 전설도 결국 이렇게 후대에 전해졌지 않나요? 그는 너무 유명했던 나머지 결국 역사에 기록을 남기고 말았습니다. 물론 누구나 그 기록에 접근할 수 없지만 그럼에도 누군가는 그 기록을 알고 있다는 게 중요하죠. 전 카수스가 어떤 테라리움에서 가디언의 열매를 얻은 것이 아닐까 생각하고 있어요.”
“그렇다면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낮은 거목은 자리에서 일어나 벽난로 반대편의 책장이 빼곡히 자리한 벽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