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20화 (520/604)

칼미아의 모습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날 찾으러 온 칼미아의 안내를 받아 시들링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손님이 별로 없는 한적한 식당에 카이시아가 마치 구속된 모양새로 시들링과 함께 앉아 있었다. 그는 행여라도 카이시아가 도망갈까 봐 감시하고 있는 듯했다. 거의 무력을 써서 앉혀 놓은 격이라 잠깐 동안 카이시아가 짠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카이시아, 우리 이야기 좀 해요. 당신이 정말 원치 않는다면 그냥 보내 줄게요.”

“…….”

그녀는 말없이 테이블 위의 물 잔만 바라봤다.

“48번째 테라리움에서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요? 폴룩스는 당신이 마약에 손댄 걸 알고 있나요?”

“…….”

“카이시아?”

한참 동안 침묵하던 그녀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그는 죽었어.”

내가 잘못 들은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누가 죽었다고?

“카이시아, 전 폴룩스에 대해 물었어요. 방금 그가 죽었다고… 말한 건가요?”

“그래, 내 동생 폴룩스는 죽었어.”

일말의 주저함도 없이 그녀는 그렇게 말했다. 옅은 분노 밑에 아주 짙은 자책감이 깔려 있는 목소리였다.

그가 죽었다니, 대체 왜? 그곳을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은 듯한데, 아직도 두 남매가 싸우던 소리가 귓가에 선명한데 죽었다고?

혹시 그녀가 마약에 손을 댈 정도로 망가진 건 동생의 죽음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난 약을 끊은 부작용 때문인지 수시로 덜덜 떨리는 카이시아의 손을 말없이 바라봤다.

“…….”

우리 사이에 긴 침묵이 흘렀다. 도저히 그녀에게 죽음의 원인에 대해 물어볼 수가 없었다. 이미 난 48번째 테라리움을 외면한 채 떠난 전적이 있었다. 활성화된 퀘스트 마크를 내버려 둔 채 떠난 것처럼 말이다. 이미 무시하기로 마음먹었던 만큼 그 속사정을 알 자격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 남매의 갈등을 직접 목격했고 48번째 테라리움의 중심이 되는 두 인물의 배경에 대해서도 엿듣게 되었다. 어쩌면 내가 개입하여 그들에게 새로운 길을 제시해 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것이 내 모험과 큰 상관이 없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항상 좋은 결과만 냈던 건 아니지만 그런 식의 개입은 여태 자주 해 왔고, 이미 손을 댄 이상 최대한 마지막엔 좋은 마무리를 할 수 있도록 노력했다.

대표적으로 필라와 루프를 예로 들 수 있었다. 둘의 능력을 높이 사 28번째 테라리움이나 향후 내게 많은 도움이 될 것 같아 적극적으로 그들을 내 편으로 만들기 위해 힘을 썼다.

루프가 가지고 있던 빚을 탕감시켜 주고 그들을 안전한 테라리움으로 이주시켰다. 그 과정에서 둘 모두 오랫동안 해 왔던 연구직을 그만두게 될 정도로 본인들이 여태 그려 오던 미래가 달라지기도 했다.

따지고 보자면 이리스 파티도 로웰라도 그리고 시들링까지. 전부 내가 끼어들며 그들의 미래가 달라지게 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테라리움 단위로 개입했던 일도 여럿 있었다. 모험의 산물이긴 했으나 어찌 보면 48번째 테라리움도 같은 범주 내에서 볼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내가 본 폴룩스는 망나니짓을 일삼는 누이의 뒷수습을 도맡으며 자신의 몫이 아닌 테라리움이 간신히 굴러갈 수 있을 정도로 노력하는, 어찌 보면 대단한 인재라고 볼 수 있는 사람이었다. 즉, 충분히 내가 자주 해 왔던 인재 영입의 범주에서 그에게 손길을 내밀고 남매간의 갈등 해소에 도움을 줄 수 있었던 상황이란 것이다.

카이시아는 마음에 들지 않지만 폴룩스를 잘 영입해 둔다면 번호 연계법으로 묶이는 48번째 테라리움과 함께 상부상조를 하며 적잖은 혜택을 얻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에 대해 생각하면 할수록, 내가 그날 48번째 테라리움에서 떠오른 서브 퀘스트를 단호히 무시한 결과로 인해 폴룩스의 죽음이라는 안타까운 결말까지 생기지 않았나 하는 죄책감이 들었다. 충분히 다른 결말을 낼 수 있는 힘이 내게 있었는데….

그땐 다신 인연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이렇게 소집령에 의해 테라리움의 행정 관리원들이 한 자리에 모이게 되고, 그 자리에서 마약에 취한 카이시아를 만나 폴룩스의 죽음에 대해 전해 듣는 순간이 오게 될 줄은 정말 몰랐다.

“후우….”

먼저 내 속에 잔뜩 자리 잡은 부정적인 생각을 떨쳐 내기 위해 크게 숨을 내쉬었다. 자책은 좋지 않다.

“동생에 대한 안 좋은 소식을 듣게 되어 유감이에요. 실례가 아니라면 그의 죽음의 원인에 대해 알 수 있을까요?”

날 괴롭게 만드는 죄책감을 떨쳐 내기 위해선 명확히 알아야만 했다. 아직 동생의 죽음으로 인해 괴로워할 그녀에게 미안한 일을 하는 걸 수도 있었다. 그녀가 원치 않는다면 이유에 대해서 더 캐묻지 않을 작정이었다.

“…….”

“말하기 힘들다면 말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그의 명복을 빌게요.”

“나 때문에 죽었어. 나 때문에….”

카이시아는 넋을 놓은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당신 때문에 죽었다뇨?”

“내 잘못이야….”

오랫동안 자책을 입에 품던 그녀에게서 마침내 48번째 테라리움에서 일어난 진상에 대해 알게 되었다.

내가 떠난 후에도 카이시아는 여전히 망나니짓을 일삼았다. 행정 관리원직은 자신에게 맞지 않다며 늘 그래 왔듯 입버릇처럼 내뱉고 다녔고, 직책을 넘겨받지 않는 폴룩스에게 반항이라도 하듯 더욱더 일에 손을 대지 않았다.

그녀가 비운 집무실엔 폴룩스가 대신 자리했다. 그날 여관에서 대판 싸웠던 일이 무색하게 둘 사이엔 어떠한 진전도 없었다. 아니 더욱 나빠졌다.

카이시아는 자신이 계속 방탕하게 군다면 끝내 지친 폴룩스가 제풀에 못 이겨 직책을 넘겨받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매일같이 기억이 끊길 때까지 비싼 술을 마시고 사람들을 불러 모아 축제를 여는 등 사치와 향락을 일삼았다.

하지만 카이시아를 처음 만났을 때도 느꼈던 것처럼 그녀는 간과하고 있는 것이 있었다.

그녀가 매일같이 흥청망청 낭비하는 다이아가 결코 땅에서 무한정 솟아 나오는 자원이 아니란 것을. 그녀의 주지육림은 테라리움의 금고를 털어서 이루어지고 있음을.

애초에 48번째 테라리움은 부유한 곳이 아니었다. 잠깐 방문한 것만으로도 그곳이 전형적인 궁핍한 뒤 번대 테라리움 중 한 곳임을 알 수 있었다.

고정적으로 다이아를 수급할 수 있는 수출처가 있는 것도 아니었고 대표 상품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과거의 44번째 테라리움처럼 내부 주민들과 이웃 테라리움 모두 쥐어짜는 고리대금업이 활발한 것도 아니었다.

그나마 있는 특색이라곤 행정관리원의 성향으로 인해 발달한 수많은 유흥업소들뿐이었다.

카이시아가 낭비하는 다이아를 채우기 위해선 주민들에게 과도할 정도로 세금을 뽑아내는 수밖에 없었고, 나중엔 더 이상 감당이 되지 않아 여기저기 외상을 걸어 두게 되었다.

행정 관리원 소유인 과수원을 담보로 잡았기 때문에, 나중엔 빚쟁이들이 몰려 과수원 건물의 장식과 구조물을 뜯어 가는 일이 허다했다고 한다.

폴룩스와 빚쟁이들 간에 마찰이 일어나 몸싸움으로까지 번지는 일이 허다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어떻게든 살아가고 있었다.

48번째 테라리움의 마지막 부흥 기회인 수확제를 기다리며. 그는 다가오는 수확제 때 드라이어드 열매를 팔아 빚을 상환하고 다시 시작해 볼 심산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성난 빚쟁이들을 막기엔 수확제까지의 기간이 너무 오래 걸렸고, 그렇게 차근차근 망해 가던 테라리움에 어느 날 누군가 방문했다.

더 이상 외상이 불가해 강제적으로 사치와 향락을 끊게 된 카이시아에게 수상한 자가 접근해 왔다. 신원을 가리기 위해 후드를 깊게 눌러쓰고 마스크를 했지만, 카이시아는 그자가 남성임을 알아봤다.

“그자가 내게 다이아를 아주 많이 벌 수 있는 방법이 있다고 했어. 지금 내가 가진 모든 빚을 상환하고 48번째 테라리움이 앞 번대 테라리움 못지않게 풍요로운 곳이 될 수 있을 거라고 했지.”

그자가 제시한 방법은….

“어떤 식물의 잎을 이용해 만든 약인데 흡입하거나 체내에 주사하면 술을 몇 병이나 마신 것보다 훨씬 기분 좋게 만들어 줄 거라고 했어. 엄청 환상적일 거라고. 그 약을 유통할 테라리움을 찾고 있다길래….”

“맙소사… 설마?”

수수께끼의 남자가 제시한 방법은 마약 유통이었다.

“그게 마약을 의미하는 건지 몰랐단 말이에요?”

“마약이 불법인 건 알고 있어. 그런데 설마 그런 불법적인 걸 행정 관리원인 내게 대놓고 말할 줄은 미처 몰랐던 거지. 난 그저… 면허 없는 연금술사가 만들어 낸 연금약 같은 건 줄 알고….”

믿을 수 없는 일이지만 카이시아는 곧바로 이 제안을 승낙했다. 빚을 모두 청산해야 자신이 예전처럼 사치와 향락을 즐길 수 있는 데다, 다이아를 많이 벌면 폴룩스의 고생을 덜고 그가 좋아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행정 관리원의 승낙이 바로 떨어지자 48번째 테라리움엔 삽시간에 마약이 퍼지게 되었다. 뒤늦게 폴룩스가 이를 알아차렸을 땐 이미 늦은 후였다. 일에 대해 알아차린 날 두 남매는 내가 있던 여관에서 싸웠던 것보다 더 극심하게 싸움을 일으켰다. 손찌검이 오갈 정도로 심하게.

화가 난 폴룩스가 카이시아의 명령을 무시하고 독단적으로 테라리움에서 마약을 추방하려고 했지만 이미 손을 쓸 수 없게 되었다. 애초에 법을 강제로 집행할 수 있을 만큼 테라리움에 체제가 마련되어 있지 않았다.

급한 대로 마약을 하는 주민들에게 벌을 가하거나 마약 압수를 진행했지만 큰 반발을 사게 되었고, 어느 날 앙심을 품고 과수원에 침입한 약쟁이의 칼에 찔려 폴룩스는 목숨을 잃고 말았다고 한다.

행정 관리원이 아니기에 과수원에 누가 침입해도 폴룩스는 알 길이 없었다. 더구나 과도한 빚으로 인해 상당수의 과수원 직원을 해고시킨 마당이라 경비도 허술했다.

그날 유일한 가족인 카이시아는 약에 취해 술집 거리를 휘청거리고 있었다. 뒤늦게 쓰러진 폴룩스를 발견해 병원으로 옮겼지만, 들은 건 의사의 사망 선고뿐이었다.

“상처의 깊이로 보아 빨리 발견해 처치를 받았다면 살 수도 있었다고….”

그날 직원들이 많이 근무 중이었다면, 카이시아가 집무실 안에서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다면 습격을 받은 폴룩스를 빨리 발견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결국 그는 목숨을 잃었다. 너무나 안타까운 죽음이었다.

“동생이 그렇게 죽었음에도… 당신은 변한 게 없네요.”

하지만 동생의 그런 비극적인 죽음도 결국 카이시아를 변화시키지 못했다. 그녀는 여전히 끔찍한 꼴로, 다른 테라리움의 행정 관리원들이 모이는 공식 석상에 약에 취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당신에게 마약 유통을 권유한 그 자는 어떻게 되었나요?”

“그자가 테라리움에 머문 건 일주일도 채 안 돼. 떠난 지 오래야.”

난 카나비스 드라이어드를 납치했던 인페르노의 끄나풀들을 떠올렸다. 혹시 그쪽 소속인 걸까?

뒤 번대 테라리움을 다녔지만 내 귀에 마약에 대한 직접적인 소식이 들어온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인페르노만큼이나 음지에서 활동해야 할 마약상이 어째서 대놓고 48번째 테라리움에 모습을 드러냈는지도 의문이었다.

“난 당신의 이야기를 듣기 전까지만 해도 우리가 만났던 그날, 그대로 48번째 테라리움을 떠나지 않고 당신들을 도왔다면 다른 결말이 나오지 않았을까 하고 죄책감을 가졌어요. 겨우 하루 만난 나도 이렇게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데… 당신은 정말 그게 다예요? 어째서 바뀌지 않은 거예요?”

답답한 마음에 목소리가 커졌다. 내 말을 들은 카이시아는 다시 입을 다문 채 테이블만 바라보며 손을 덜덜 떨었다.

이걸 정말 내가 퀘스트를 외면한 것으로 인해 발생한 결과라고 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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