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19화 (519/604)

회담이 종료되어도 미미르의 모습은 끝까지 볼 수 없었다. 행정 관리원들이 삼삼오오 모여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이 보였지만 대부분 돌아갈 교통편에 대해 의논하는 것이었다. 한시라도 빨리 테라리움으로 돌아가 수확제에 참여해야 하기 때문이다.

“16번째 테라리움으로 돌아가시는 거면 제 마차를 함께 타지 않으시겠습니까?”

키르켄이 동승을 원하는 눈치로 물었다. 마차 안에서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아주 많아 보였지만, 아직 난 1번째 테라리움에 용무가 남았다.

“28번째 테라리움으로 돌아갈 거예요.”

“이거… 16번째 테라리움의 보좌관은 서운하지 않답니까?”

그가 장난스러운 말투로 파필리온을 언급했다.

“걔는 혼자서도 잘하니까요. 그리고 전 아직 할 일이 남아서 당장은 출발하지 않을 예정이에요.”

“38번째 테라리움의 행정 관리원 때문인가요? 같은 번호 연계법으로 묶여 있으니 혹시 제 도움도 필요합니까?”

“음….”

솔직히 이번 일에 키르켄의 도움이 필요할지 안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도움이 되실 수도 있지만… 키르켄 님도 수확제 때문에 빨리 돌아가 보셔야 하지 않을까요? 보아하니 10번대 테라리움의 행정 관리원분들은 벌써 돌아갈 채비 중이시던데 그분들과 동승하시면 금방 테라리움에 도착하실 수 있을 듯해요.”

수십 대의 마차가 일제히 1번째 테라리움에서 빠져나갈 테니 올 때와 마찬가지로 교통 체증이 생기긴 하겠지만, 중간중간 내려서 불의 위협이나 강도에 맞서 싸울 필요 없이 달려도 되니 함께 가는 것이 더 빠를 거다.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 어쩔 수 없군요. 빠른 시일 내에 우리가 다시 만나는 자리를 마련했으면 합니다. 제이 님께선 정말 단독으로 90번대 테라리움까지 내려가실 작정이겠지만 제가 슬쩍 도움을 드릴 수 있을지 또 모를 일 아닙니까?”

키르켄은 그렇게 말한 후 막 회장을 떠나는 10번대 테라리움의 행정 관리원들에게 합류했다.

난 회장 안에서 누군가를 기다리며 좀 더 대기했다.

마침 중앙 행정 관리부도 자리를 파한 후 돌아가는 것이 보였다. 내 목적은 올리브 나무 드라이어드였다.

“올리브.”

조심히 그녀를 불렀을 뿐인데 화색이 되어 날 향해 달려왔다. 그녀가 안은 바구니에서 올리브 열매가 튀어나올 정도로 말이다.

“나를 불렀어? 네가 내 이름을 불러 주는 게 참 좋아.”

내가 올리브를 부르자 좋지 않은 시선들이 쏟아진다. 무슨 수작을 부리려는 게 아니냐며 의심하는 듯했지만…. 수작 맞았다.

“낮은 거목을 만나게 해 줄 수 있어?”

그날, 낮은 거목과의 만남이 이뤄졌던 건 올리브를 비롯한 다른 드라이어드들 덕이었다.

고맙게도 내게 많은 선물을 주고 다시 만나기는 어려울 거라며 헤어졌던 낮은 거목이지만, 이 테라리움에서 영향력을 끼치는 주요 인물 중 내가 아는 이는 그뿐이었다. 미미르의 일을 비롯해 그에게 도움을 구할 것이 몇 있었다.

“낮은 거목? 그를 만나고 싶어?”

“응. 도움이 필요해.”

“네가 원한다면 무엇이든 도와주고 싶지만 조금 어려울 것 같아. 그는 본래 온실 깊숙한 곳에 머물면서 중요한 일이 아니라면 밖으로 잘 나오지 않거든. 그리고 그를 지키는 사람도, 만나지 못하게 막는 사람도 아주 많아.”

“역시 만나는 건 안 되겠지?”

올리브가 저렇게까지 말할 정도라면 낮은 거목을 만나는 건 포기해야 하는 건가 싶었다.

“이만 돌아오세요.”

그녀에게 돌아오라고 재촉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나 올리브가 듣는 척도 하지 않자 직접 데리러 올 모양인지 누군가 이쪽을 향해 걸어왔다.

“조금 어렵다고 했지, 아예 안 되는 일이라곤 안 했는걸. 당장은 어렵고 대신 오늘 밤 늦게까지 기다려줄 수 있어? 달이 뜬다면 별관 건물의 정원으로 와 줄래? 내가 그를 데리고 나올게.”

저번 만남의 경우 드라이어드들이 날 만나고 싶다고 성화를 부려서 어쩔 수 없이 낮은 거목이 나오게 됐다고 했다. 이번에도 그에게 조를 모양이었나 보다. 귀찮게 구는 건 미안한 일이지만 어쩔 수 없었다.

“정말 고마워.”

“고맙다면 한 번 꼭 안아 줄래?”

“응? 안아 달라고?”

올리브의 갑작스러운 요구에 당황한 것도 잠시, 곁에 올리브를 데리러 온 사람이 도착하자마자 그녀는 바구니를 내려 두고 한 아름 가득 날 끌어안았다.

“사랑스러운 작은 세계수.”

호의 가득한 포옹에 당황스러웠지만 마주 안아 주었다. 올리브의 행동에 당황한 것은 중앙 행정 관리부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자랑할 거야!”

올리브는 포옹을 끝내자 다시 바구니를 안고 홀연히 뛰어가 버렸다. 데리러 온 사람만 뻘쭘해졌다.

회장을 나가자마자 시들링을 찾았다. 그러고 보니 연락책이 없어 만날 일이 걱정이었다. 적어도 어디서 기다려 달라는 약속을 했어야 했는데. 설마 테라리움 안에서 서로를 잃어버릴까 하는 안일함에 따로 약속을 정해 두지 않은 것이 후회스러웠다.

이곳은 사람이 무척이나 많기 때문에 드라이어드를 사용해 사람을 찾는 건 아주 까다로운 일이었다.

“어떻게 한담….”

경비대에 있을 미미르를 먼저 만나보러 가야겠다는 생각에 발걸음을 옮기는데 누군가 날 불렀다.

“오, 기다렸어요!”

칼미아의 목소리였다. 그녀는 정원의 벤치에 앉아 날 기다리며 새들에게 모이를 주고 있었나 보다.

“와… 시들링이 생각보다 준비성이 좋네. 연락할 길이 막막했는데.”

드라이어드를 남겨 두고 가는 방법은 미처 생각도 하지 못했는데 이렇게 나올 줄이야.

“우리 애가 제법 똑똑하죠?”

그녀가 벤치에서 일어나 내게 다가오자 모이를 받아먹던 새들이 일제히 쪼르르 따라왔다. 새들은 사람이 다가가면 도망가기 바쁘면서 드라이어드에겐 친화적이었다.

아무래도 드라이어드는 속성이 사람보다 식물에 가깝기 때문에 그런 게 아닌가 싶었다. 드라이어드 중에도 새나 동물을 데리고 다니는 종이 꽤 많았다.

칼미아는 시들링에게 받았을 것이 분명한, 어쩌면 사 달라고 졸랐을지도 모를, 모이 상자를 내게 넘겨주었다. 모이 상자의 지분이 내게로 넘어가자 색깔이 알록달록하고 작은 새들이 올망졸망한 눈으로 날 올려보다 보았다.

“와, 1번째 테라리움엔 신기한 새들이 살고 있네.”

“밖으로 나간다면 죽는 건 확정이 된, 작고 약하며 눈에 무척이나 띄는 개체들이죠. 저렇게 화려한 색을 가지고 있다면 환경에 어우러져 숨을 수 없으니까요. 1번째 테라리움엔 이런 멸종 위기 동물들이 아주 많대요! 아마 이곳이 유일한 서식지인 동물들을 많이 볼 수 있을 거예요.”

“확실히… 보통은 사람을 피해 자연 속에서 살아가야 할 동물들이, 불이 위협하는 세상에선 사람의 도움이 없이는 살기 힘들겠구나. 적어도 테라리움 안은 불의 위협이 없을 테니.”

칼미아의 설명을 듣자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모이 상자에서 곡식 낱알들을 꺼내 뿌리니 그 주위로 몰려든 새들이 열심히 부리 짓을 하며 쪼아 먹었다.

본래라면 이 중에 몇 번째 테라리움의 근방 숲이나 평원에서 살아가는 새들이 있겠지.

문득 스노우 필드에서 살아가는 동물들이 떠올랐다. 스노우 필드는 불의 위협이 전무한 곳이라 무척이나 춥고 혹독한 환경임에도 불구하고 살아가는 소동물들이 많았다. 앉은 부채가 따뜻한 품 속에 토끼와 쥐들을 품어 보살피던 모습도 떠올랐다.

“그래서 말인데요. 테라리움 안에 이런 동물들을 위한 생태 숲을 조성한 곳이 있대요. 주변으로 산책로가 나 있고 분위기도 좋고 연인들도 자주 가는 데이트 코스라는데, 여길 떠나기 전에 시들링과 함께 방문해 보는 건 어때요?”

칼미아가 슬쩍 내 팔을 툭툭 치며 말했다. 알고 보니 데이트 코스 추천을 위한 밑밥을 깔아 둔 거였구나.

“여전하네.”

“시들링과 사귀어 주는 제이님께 저희 드라이어드 모두가 정말정말, 대단히! 감사하고 있지만… 요즘 바쁘셔서 저희 애랑 많이 못 놀아 주셨잖아요. 시들링이 얼마나 보고 싶어 했는지 아세요? 일하면서도 계속 제이 님이 있는 과수원 방향만 바라봤단 말이에요. 불쌍하지 않나요? 불쌍하죠? 그러니까 하루쯤은 온전히 시들링과 놀아 주세요.”

나와 시들링이 사귀고 있다 하더라도 가끔 어색한 순간이 찾아오는데 그때마다 저 말 많고 참견 좋아하는 드라이어드의 덕을 많이 보긴 했다. 이로 인해 끊긴 대화가 다시 이어지거나 어색한 순간이 무마되는 경우가 종종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참견을 내버려 두는 편이었는데 슬슬 다시 제재를 가해야 하나 고민이 되었다. 그래도 좋은 데이트 코스를 알았으니 오늘만 봐줄까?

“과수원 방향만 봤다고?”

“네, 하염없이요. 제이 님이 밖으로 나오면 바로 뛰쳐나갈 기세였다니까요.”

그 모습을 상상하니 웃겨서 웃음이 나왔다.

“그래… 요 며칠 내가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긴 했지. 테라리움을 떠나기 전에 시들링과 꼭 생태 공원에 방문할게. 그거면 됐지?”

“그럼요! 단둘이! 오붓하게!”

“너희 방해 없이?”

“당연히 저희의 방해 없… 그냥 멀리서 지켜보기만 하면 안 되나요? 안 끼어들게요. 구경만 하게 해 주세요. 진짜 안 들키게 숨어서….”

카메라나 캠코더를 쥐여 주면 내내 나와 시들링만 찍고 다닐 기세였다.

“그렇게 과보호는 좋지 않다고 누누이 말했잖아. 내 드라이어드들이 데이트 때마다 날 따라다니는 거 본 적 있어? 자꾸 그러다간 언젠가 너희 때문에 시들링에게 실망하는 날이 올지도 몰라.”

“조심할게요. 앞으로 안 할게요! 정말이에요! 시들링과 헤어지지 마세요!”

숫제 내 다리를 붙잡고 애원할 모양새로 칼미아가 눈에 그렁그렁 눈물을 매달았다.

“그것보다 시들링은 어디서 뭐 하고 있어? 카이시아의 행방에 대해 찾아 달라고 했는데 그 자를 찾은 거야?”

“으음… 아티팩트로 돌아가서 시들링에게 말하고 올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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