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미르를 알아? 걔한테 무슨 일이 생겼어?”
원래대로라면 미미르 또한 행정 관리원이기에 이 회담에 참여해야 했다. 그러나 회담이 시작되고 한참이 지나도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 아닌지 걱정이 됐는데, 갑자기 시들링이 뜬금없이 미미르를 언급하니 불안이 더욱 커졌다.
“경비대가 그를 구속하여 데려가는 것을 봤다. 너와 안면이 있는 자이니 알아 두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알려 주러 온 것이다.”
“미미르가 구속됐다고? 혹시 이유는 알아? 걔가 사고 치고 그럴 성격은 아닌데…. 뭔가 오해가 있었던 게 아닐까?”
“이유는 잘 모른다. 다만 그 행정 관리원은 경비대에 무언가를 알리려고 했고 그것이 그들을 자극한 것처럼 보인다.”
미미르의 발언이 경비대를 자극했다고?
“어떡하지….”
“지금은 회담이 먼저가 아니겠습니까?”
지금이라도 미미르의 상황을 살피러 가야 하는 건 아닌가 싶었는데, 나를 기다리고 있던 키르켄이 은근한 어조로 나를 재촉했다. 일의 우선순위를 파악하라는 뜻이었다. 그에겐 미미르의 안위보다 고위험군 지원 정책에 대한 회담이 먼저였기 때문이다.
물론 일의 중요도로 따지자면 이쪽이 맞긴 했다. 하지만 내가 아는 미미르는 심성이 여리고 손이 많이 가는 애인데 하필이면 경비대에 끌려가기까지 해서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넌 회장으로 돌아가라. 네가 걱정하는 것에 대해 내가 대신 알아보도록 하겠다.”
“아니. 너도 나서지 않는 게 좋겠어. 미미르가 어리긴 하지만 한 테라리움의 행정 관리원이야. 그런 신분을 하고도, 더구나 오늘 이곳에서 행정 관리원들이 모여 회담이 진행되고 있음에도 그가 끌려갔다는 건 정말 큰일이 일어난 걸지도 몰라. 행정 관리원도 아닌 네가 괜히 들쑤셔 봤자 너까지 잡혀갈 수도 있어. 회담이 끝난다면 내가 알아서 알아볼게.”
“잘 생각했습니다.”
키르켄이 흡족한 웃음을 지으며 회장 안으로 내 팔을 잡고 끌었다.
“대신 다른 걸 좀 알아봐 줄래? 이전에 여길 뛰쳐나갔던 48번째 테라리움의 행정 관리원 말이야. 그녀가 어떤 상태인지 궁금해.”
“알겠다. 알아보도록 하겠다.”
미미르 대신 카이시아에 대한 소식을 시들링에게 맡긴 후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회담은 이변 없이 고위험군 지원 정책이 확정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중앙 행정부는 우리가 걱정했던 대로 각 테라리움이 의무적으로 병력을 우선적으로 지원해야 한다는 주장에 힘을 싣고 있었다. 그들의 말이 곧 법이라 어떠한 반론이 나와도 바뀌지 않을 것이다.
애초에 행정 관리원들을 소집 후 회담을 열었던 것도 이미 만들어진 정책을 공표하기 위한 자리나 다름없었음을 깨달았다.
뒤 번대 테라리움의 행정 관리원들이 우는 소리를 하고 앞 번대 테라리움의 행정 관리원들은 저마다 편을 짜 최대한 손해를 덜 볼 궁리를 하고 있는 와중에, 한 자릿수 테라리움의 행정 관리원들은 아무런 반응이나 미동도 없이 자리를 지키고 있을 뿐이었다.
우리가 사업 동맹이나 해안 테라리움 연합으로 함께 뭉치듯, 한 자릿수 테라리움들도 연합으로 뭉쳐 이런 일엔 암묵적으로 1번째 테라리움의 손을 들어주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혹은 그들이 여태까지 우리들 모르게 져야 했던 의무를, 이젠 덜어 낼 수 있으니 이득이라는 생각에 가만히 있는 걸 수도 있다.
중앙 행정 관리부가 발표하는 안건은 더 있었다.
테라리움을 불의 위험도에 따라 나누는 과정에서 여러 가지 점수 산정을 통해 등급을 매기고, 이 등급에 따라 지원해야 할 병력과 물품의 크기를 차등적으로 나눈다고 했다. 즉, 테라리움의 일급 보안 사항이나 다름없는 내부 재정 상황을 오픈하는 것이 많은 반향을 일으켰으니 다른 방식으로 차등 적용을 하겠다는 건데….
어차피 반대가 심할 경우 미리 준비한 플랜B를 꺼내는 거나 다름없었으므로 정책을 발표하는데 거리낌이 없어 보였다.
점수에는 테라리움의 월간 방문자 수, 드루이드 의뢰 달성률, 상점 유치율, 주변 치안 상황 등이 반영되며, 이는 굳이 보안 침해 없이 외부의 시선으로도 확인할 수 있는 사항들이었다.
이 점수들로 테라리움에 등급이 매겨지게 되면 암묵적으로 뒤 번대가 겪던 차별이 이젠 공식적인 차별이 되는 거나 다름없었다.
예를 들면 잘나가는 테라리움은 A등급 테라리움, 뒤떨어지는 테라리움은 D등급 테라리움이 되는 건데… 마치 드라이어드에 등급을 매기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드라이어드에게 매겨진 등급이 어떤 상황들을 야기하는지 이미 충분히 겪어 왔다. 이젠 그 상황들의 대상이 테라리움이 되는 것도 머지않았다.
“중앙 행정 관리부는 대체 무슨 속내를 가지고 있는 걸까요? 현재에 이르러 테라리움 등급제를 도입하고 의무 지원 정책까지 들이밀고….”
이 세계에서 지낸 지 1년여 정도밖에 되지 않는 내게도 중앙 행정 관리부의 행보가 이렇게나 당혹스러운데 다른 이들은 얼마나 어이가 없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중 그 누구도 저 부당한 정책에 나서서 호소를 하고 바꿀 수 있는 힘이 없다는 사실이 슬프군요. 그나마 맞서 볼 수 있는 한 자릿수 테라리움의 행정 관리원들도 침묵 중이니 더욱더 말입니다. 중앙 행정 관리부의 권력이 너무 견고해졌어요.”
키르켄이 누가 들을세라 개미만 한 목소리로 내게 속삭였다.
중앙 행정 관리부의 견고한 권력은 결국 세계수로부터, 세계수를 침입한 불로부터 온다. 악의 횡포에 신권이 더욱 강력해지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등급제만큼은 반대해야 될 것 같은데요.”
“점수에 1번째 테라리움과의 협력이 포함되어 있을지 그 누가 알고 나서겠습니까? 잘못 보였다간 F등급을 받을지도 모르는데.”
여행 위험 지역과 더불어 낮은 등급을 받은 테라리움은 많은 사람들의 기피 대상이 될 것이다. 이건 불의 침입 외에도 테라리움의 경제력을 저하시킬 수 있는 큰 문제였다.
1번째 테라리움이 마치 죽을 날을 앞둔 사람처럼 권력으로 찍어 누르고 횡포를 부리는 모습이 믿기지 않을뿐더러 이해도 가지 않았다. 혹시 아직도 인페르노의 끄나풀이 숨어들어 분탕질을 치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이번 회담에서 그들이 공표한 정책들이 이제 시작일 거란 예감이 들었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테라리움 등급제로 인해 앞으로 중앙 행정 관리부가 다른 테라리움들에 적극적으로 관리하고 개입하겠다는 건 알겠네요. 어쩌면 이단 감찰단을 만들었을 때부터 눈치채야 했던 건지도 모르겠어요.”
긴 시간 동안 진행된 회담이 막바지에 이르며 모두가 침울해진 와중 난 용기를 내어 손을 들었다.
상석에 앉은 이들이 아직도 반박할 의견이 남았냐는 눈빛으로 내 쪽을 바라봤다가 날 알아본 이들의 눈빛이 달라졌다. 난 꽤나 자주 1번째 테라리움과 부딪혀 왔었기에 벌써 눈에 익는 인물이 되고 말았다.
“본 정책에 대해 추가 의견이 있어 제시하고 싶습니다. 회담이 있기 전 다른 행정 관리원분들과 논의를 나누었고 다들 긍정적으로 반응해 주셨기에 의견을 내고 싶습니다.”
내 의견이 혼자만의 의견이 아닌, 다른 행정 관리원들의 힘을 얻은 것임을 내보였다.
“어떤 것입니까?”
“아직 정책 실행의 초기 단계일 때, 시범적으로 이 방법을 도입해 보는 것이 어떤가 싶은데….”
다른 행정 관리원들과 이야기를 나눴던 몰빵 방식에 대해 설명을 하자 그들은 애매하다는 표정을 했다.
“기존엔 한 자릿수의 테라리움들이 함께 해결했어야 하는 일을 단 하나의 테라리움이 홀로 해결해 보겠다는 걸로 이해하는 게 맞습니까?”
“네. 소수가 희생해 다수가 이득을 보는 겁니다. 물론 언젠간 순번이 돌아올 테니 결과적으로 보자면 희생이라 볼 수 없으나 각 테라리움마다 여유가 있는 시기가 있을 테고 그 시기에 맞춰 지원을 보내면 사정이 더 낫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시범적으로 진행한다는 것은 잘못될 경우 당신의 테라리움만 손해를 본 채 무산될 수 있는데 그런 위험을 안고 굳이 먼저 나서는 이유가 있습니까?”
“증명해 보이고 싶은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저 역시 한 명의 드루이드로 세계수를 위협하는 불을 퇴치하는 것이 큰 사명입니다. 여기 계신 몇 분은 아시겠지만 이를 위해 세계수의 순례자 길을 걷고 있기도 하고요.”
물론 그 순례자의 길은 그만둔 지 오래였다. 하지만 이것만큼 내게 불순한 의도가 없음을 설명하기에 좋은 게 없었다.
“증명해 보고 싶은 것이라고 하면?”
“일이 잘되었을 때 완전히 밝히고 싶습니다. 제가 할 일은 실패하기라도 한다면 많은 이들에게 그릇된 희망을 품게 할 수도 있으니 결과로 증명해 보이고 싶습니다. 어차피 실패해도 제가 실패하는 것이니 다른 테라리움들은 손해 볼 것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시범 운영은 당장 불의 위협이 큰 90번대 테라리움을 대상으로 하겠습니다.”
“당장 92번째와 93번째에 홀로 전체 테라리움분의 전력을 투입하겠다는 말이 맞습니까?”
“네, 따지고 보자면 혼자가 아닌 세 개 테라리움분의 전력입니다. 잊으셨을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16, 28, 60번째 테라리움의 주인이니까요.”
길드전이 곳곳에 중계되며 내가 60번째 테라리움까지 먹은 사실은 알음알음 퍼져 나갔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3개 테라리움을 가졌다는 사실을 이 자리에서 처음 알게 된 사람은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날 바라봤다.
내가 눈에 띄게 나설 수 있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다. 테라리움을 하나 가진 행정 관리원보단 그래도 세 개나 가지고 있는 행정 관리원이 상대적으로 큰 발언권을 얻을 수 있을 터. 나 하나의 의견이 3개 테라리움의 의견이나 같기 때문이다.
“그래도 단편적으로 설명드리자면 제 테라리움들에서 이번에 도입한 병력들에 대해 객관적으로 시험해 보고픈 의도가 큼을 안내드립니다.”
“이행 약속은 반드시 지켜야 할 것입니다. 당신을 믿고 92, 93번째 테라리움에 가야 할 지원들이 다음 차례로 밀리게 되었으니.”
다음 차례로 밀렸다는 건, 내가 90번대 테라리움의 방어에 실패하면 지원 없이 버리겠다는 살벌한 선포였다. 애초에 지도가 80번대까지로 압축되었다고 말한 시점부터 90번대는 포기한 것이나 다름없었으면서 이 기회를 틈타 내게 책임을 회피전가하려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아 고까웠다.
“네, 공식적인 석상에서 의견을 낸 만큼 확실히 이행해 보이겠습니다.”
이번 기회에 베스탈리스들을 90번대 테라리움으로 데려가 전력을 시험해 보는 것과 동시에 공식적으로 무시할 수 없는 공을 세우게 만들 작정이었다. 적어도 불의 위협으로부터 구해 준 90번대 테라리움은 베스탈리스들을 배척할 수 없게 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