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력은 아무래도 공급이 떨어지니 비용이 많이 들겠죠?”
슬쩍 운을 떼니 다른 행정 관리원들이 곧바로 동조해 왔다. 회장 안에서 어떻게 참은 건지 쉴 새 없이 불만을 토로하며 한숨을 쉬어 댔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세계수의 축복을 품고 태어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것도 그렇지만 좋은 등급의 드라이어드를 많이 모으고 전투 경험도 노련해질 만큼 쌓아야 비로소 용병으로 써먹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급하다고 갓 초행길에 오른 드루이드들을 의무 병력으로 보내 봤자 크게 다치거나 전사라도 하면 피해 보상금을 챙겨 줘야 하니 일이지요.”
“요즘은 피해 보상금을 걸어도 실력 좋은 드루이드를 구하기 힘들어서 장비며 물품까지 다 지원해 가면서 부른다고 하던데 말입니다.”
“불과의 전투에서 피해를 입으면 최소 화상인데, 자칫 잘못하다간 여생을 병상에서 보내야 하는 큰 위험을 안고 누가 뒤 번대 테라리움까지 내려가겠습니까? 아무래도 이번 안건이 확정된다면 저희 테라리움은 병력이 아닌 다른 방향의 기부를 생각해 봐야겠습니다.”
“다들 그 방법을 택하지 않겠나요? 이러다 손해를 감수하고 병력을 보내는 테라리움이 부족해져 강제로 지원해야 될 병력 지원 수가 지정되는 건 아닌가 겁납니다.”
뒤 번대보다 상대적으로 사정이 나은 10번대 테라리움의 행정 관리원들이라도 우는 소리가 나오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제 막 동맹 사업으로 오랜 골칫거리였던 식량 문제가 해결되려던 참이었다.
테라리움들이 공동으로 관리하는 평야엔 작년에 뿌린 씨가 봄을 맞아 싹을 틔우고 있었다. 무사히 성장 시기를 지나 수확 철이 된다면 다량의 작물들을 거둬들여 상당수의 테라리움들이 숨통을 틀 수 있게 될 것이다.
하지만 이 즐거움을 맛보기도 전에 벌써부터 고위험군 지원 정책이 숨통을 조여 오고 있었다.
행정 관리원들을 가득 잠식한 불만엔, 그동안 각 독자적으로 운영되던 각 테라리움에 다짜고짜 연대를 요구하는 중앙 행정 관리부의 일방적인 선언도 한 몫 거들었을 것이다.
테라리움의 위기는 알아서 해결해야 하는 룰 때문에 혼자 끌어안다 자멸한 테라리움도 많았다. 그러니 행정 관리원들은 더욱 이기적으로 굴 수밖에 없었고 그런 상태인데 이제 와 다른 테라리움을 위해 가진 것을 내놓으라 하면 고깝게 여길 터였다.
뒤 번대 테라리움의 행정 관리원들도 속이 쓰리긴 마찬가지일 거다. 그쪽은 할당량을 채우려면 당장 테라리움을 경매에 내놓아야 될지도 모르는 상황이 많았고, 지원을 받더라도 주변 테라리움의 곱지 않은 시선과 참견 그리고 독자적 운영을 포기하는 것을 견뎌 내야만 했다.
“드루이드와 드라이어드 말고도 불을 퇴치할 수 있는 존재들이 있다면 인력 시장에 공급이 늘어, 병력 지원이 강제되더라도 조금은 살 만할 텐데 말이죠. 식량이나 의료품, 생필품 등을 지원해 주는 것도 꼭 필요한 일이지만 근본적으론 테라리움을 위협하는 불이 퇴치되어야 하니까 전력 지원이 가장 큰 문제라고 생각해서요. 불을 몰아내 전투를 소강상태로 만들지 않는 한 그만큼 물품은 다량으로 계속 소비될 테니 깨진 그릇에 물 붓는 격이 아닐까요?”
세차게 뛰는 심장을 진정시키며 슬쩍 운을 떼어 봤다. 긴장으로 인해 손이 축축해져 이를 감추기 위해 팔짱을 꼈다.
내 말에 주위에 있던 행정 관리원들은 잠시 대화를 멈추고 생각하는 얼굴이 되었다. 대다수의 얼굴이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가 다 있냐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드루이드와 드라이어드를 대체할 수 있는 전력은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 세계의 정설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런 대체 가능 인력이 있다면 지금껏 이런 논의를 할 필요가 없었겠지요.”
키르켄이 제일 먼저 내 의견에 동조해 왔다. 그는 다른 이들과 달리 눈빛에 이채를 띠고 있었는데, 그건 꼭 내게서 자신에게 큰 이득이 될 무언가를 발견했을 때와 같았다.
“연금탑에서 불을 퇴치할 수 있는 신종 무기를 개발하기라도 한 겁니까?”
그나마 가장 가능성 있는 경우였다.
“그건 아니지만, 지금껏 몰랐던 어떠한 존재들이 갑자기 불을 퇴치할 수 있는 힘이 생겼다면 하고 가정하는 거예요.”
“세계의 판도가 바뀌겠죠. 아주 많이. 무엇보다도 테라리움들이 불의 위협으로부터 더 안전해지지 않겠습니까?”
베스탈리스가 자리를 제대로 잡게 된다면… 많은 것이 변하게 될 것이다.
“제이 님께서도 현 상황이 상당히 심려스러우신가 봅니다. 그런 가정까지 하시고.”
“제이 님과 같은 드루이드 분들이 열 명만 더 있었어도 세계는 참 안전해질 텐데 말이죠. 하하.”
해안 테라리움 연합의 행정 관리원들이 내게 호의적인 걸 넘어 아부의 말까지 보태며 이야기했다.
“그래서 정말 가정뿐입니까?”
키르켄이 은근한 말투로 내게 작게 속삭였다. 하지만 곧바로 베스탈리스에 대해 말할 순 없었다. 이 자리에서 이들에게 베스탈리스의 역사와 현재에 대해 줄줄 설명해 봤자 자칫 잘못하다간 이단으로 몰릴 위험이 더 컸다. 직접 겪고 이해하려는 마음이 있어야만 했다.
당장 지금의 암울한 상황을 해결해 줄 수 있는 좋은 실마리라 하더라도 단번에 받아들이긴 힘들 것이다. 그래서 방법이 필요했다. 모두를 납득시키고 베스탈리스를 어엿한 사회의 구성원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방법을.
그들 모두가 악명 높은 인페르노처럼 사악하지 않고 오히려 사회에 큰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을 알려야만 했다.
“제가 알고 있는 방법 중엔 이런 게 있는데요…. 모두가 기약 없이 계속해서 지원을 보내는 방법보단 미리 자신 몫을 해치우는 방식은 어떨까요?”
“이를테면?”
“이를테면, 아주 큰 임무를 완수하면 주기적 지원 대상에서 제외하는 방식인 거죠. 가령 하나의 테라리움이 불의 위협을 받고 있을 때 다른 하나의 테라리움이 독자적으로 이 문제를 전적으로 해결해 주면 앞으로 해당 테라리움은 지원 대상에서 장기간 제외시켜 주거나 하는 식으로 말이에요.”
갑자기 떠올랐던 방법은 태국의 추첨 징병제와 관련된 것이었다. 태국은 제비뽑기를 통해 징집과 면제를 결정하는데, 추첨 대신 자원입대를 할 경우 복무 기간을 반 이상 줄여 주는 방식이었다.
물론 고위험군 지원 정책은 추첨이 아닌, 모든 테라리움이 전부 참여해야 한다는 점이 달랐지만 오랫동안 고생하느니 먼저 나서서 짧고 굵게 끝내 버린다는 점에서 유사했다.
“중앙 행정 관리부가 이를 받아들이지 않더라도 주변 테라리움과 연합해서 순번제를 정하면, 적어도 안심하는 기간이 생길 순 있겠군요. 그런데 굳이 이런 방식을 제안하는 이유가 있겠지요?”
“제가 앞서 말씀드렸던 대체 인력이 드루이드와 드라이어드를 완전히 대체할 수 있음을 증명할 수가 없어서 말이에요. 그래서 해당 인력으로만 구성된 팀으로 많은 이들을 애먹이는 골칫덩어리를 해결할 수 있다는 걸 보여 준다면… 이로써 적극적으로 어필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기지 않을까 해서요.”
“대체… 정말 그런 존재가 있단 말입니까? 드루이드말고도 불을 해치울 수 있는 존재가…?”
실수로라도 베스탈리스를 특정할 수 있는 단어를 내뱉지 않기 위해 주의했다.
“허황된 이야기를 하시는 건 아니겠지요?”
“이런 자리에서 제가 그런 농담을 해 봤자 얻는 이득이 없잖아요? 어쨌든 중요한 건, 세계수는… 만물을 만들 때 이유 없는, 의미 없는 건 만들지 않았을 거란 거예요. 세계를 살아가는 모든 것들은 존재하는 이유가 있어요.”
베스탈리스의 불 기운을 억누르고 남자아이들이 태어날 수 있도록 도운 것이 세계수라는 사실은 후에 보수적인 1번째 테라리움을 설득하는 데 큰일을 할 것이다. 그러니 밑밥을 깔아 두는 것도 중요하겠지.
“어쩌면 우리가 해롭다고 알 수 있는 것들이 알고 보면 도움이 된다는 이야기처럼 들립니다만?”
키르켄이 빙글빙글 웃으며 말했다. 꼭 무언가를 눈치챈 듯한 모습이었다.
“만약 앞서 말씀드린 방법에 모두가 동의하신다면… 그 첫 시작은 제가 하겠어요. 저와 제 테라리움이 가장 먼저 현재 불의 위협이 심각한 90번대 테라리움으로 내려가 해결하고 올게요. 대신 이후의 지원은 다른 테라리움에서 제 몫까지 나눠 가서 배분하면 될 거 같습니다.”
그 말에 다들 안색이 달라졌다. 당장은 나 혼자 다 하겠다는 말이 어지간히 기뻤나 보다.
사실 굳이 이런 방식을 꺼낸 이유는, 갑자기 내가 나서서 홀로 해치우고 오겠다는 걸 납득시키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이득도 없는 일을 오롯이 남을 돕겠다는 명목으로 자처하는 건 무척이나 이상적인 인간상이나 현실은 그렇게 쉽지 않았다. 베스탈리스들만으로 해결하는 모습을 보이려면 명목이 필요했다.
결과적으로 따지면 조삼모사나 다름없으나 시기가 중요했다. 지금은 수확제를 신경 쓰는 데도 바쁜데 당장 회담에서 지원 정책에 확정 도장이라도 찍힌다면 해야 할 일이 산더미였다. 수확제로 벌어들인 다이아 역시 맘 놓고 쓸 수도 없을 터였다.
“악용하는 테라리움이 생기면 어떡하려고 그러십니까?”
“그러지 않도록 중앙 행정 관리부에서 이 방식을 정식으로 받아 주면 좋겠지만, 그러지 않는다면 연합과 동맹을 믿어야겠지요. 만약 이 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는 테라리움은 기존 방식대로 하면 됩니다.”
“만약 그렇다면 제이 님께선 이번 수확제를 반이나 포기하는 것과 다를 바 없는데 정말 괜찮겠습니까?”
“수확제도 포기하지 않을 자신 있어요.”
애초에 나는 이 모든 테라리움들이 걱정하는 문제와 동떨어져 있었다. 결국은 다이아 문제인데 다이아는 내게 전혀 문제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굉장히 실험적인 방법이 될 테지만… 먼저 시범을 보이겠다고 하시니 저희 테라리움은 적극적으로 지지하겠습니다.”
31번째 테라리움의 행정 관리원이 가장 먼저 나서서 동조해 주었다. 어쨌든 이 시기를 안전히 보낼 수만 있다면 뭐든 좋은 듯했다.
“제이 님은 항상 절 즐겁게 만드십니다. 거절할 이유는 없겠군요.”
키르켄의 머리가 맹렬히 돌아가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는 듯했다.
대충 주위에 있는 행정 관리원들의 모든 동조를 얻어 낸 후 곧 시작될 회담에 다시 참여하려던 때였다.
밖에서 기다리고 있어야 할 시들링이 돌아왔다.
그는 회장에 들어가려는 날 붙잡고 당황스러운 이야기를 했다.
“38번째 테라리움의 행정 관리원이라면 너와 안면이 있는 게 맞는가?”
“그렇긴 한데….”
그가 왜 미미르의 이야기를 하는지 알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