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16화 (516/604)

지금까진 한 자릿수 테라리움에만 그 책임을 지웠지만 오늘 행정 관리원들을 모이게 한 걸 보면 그런 의도가 있을지도 모른다.

“충분히 가능성이 있어 보입니다.”

내 말에 키르켄이 어두운 얼굴로 동의했다.

드루이드 한 명을 고용하는 데는 많은 다이아가 필요하다. 실력 있는 드루이드라면 더욱.

아스키아 길드와 길드전을 겪으며 드루이드 인력 시장이 어떻게 형성되어 있는지 많이 알게 되었다. 아스키아를 물 먹이려면 그 시장을 내가 완벽히 파악해야만 했었기 때문이다.

난이도가 어려운 의뢰의 보상금으로 평범한 뒤 번대 테라리움의 하루 예산이 다 날아가는 것도 봤다. 셀럽 킬링이 설치고 다니는 만큼 드루이드 용병업은 잘만 하면 한 번에 큰 다이아를 벌 수 있을 만큼 공급이 부족한 시장이었다.

그런데 테라리움 관리 유지도 벅찬 행정 관리원들이 병력 지원 의무까지 수행해야 된다면 그야말로 엄청난 다이아가 빠져나갈 터였다. 이 자리에 앉은 대부분의 행정 관리원들이 이를 반기지 않을 거라 생각한다.

“불에 의해 테라리움이 멸망한다면 멸망 자체로도 아주 큰일이지만 축복의 균형이 깨짐으로써 모든 테라리움이 간접적으로 영향을 받는다는 사실을 모르시지 않을 거라 생각합니다. 여러분들의 테라리움과 먼 거리에 있는 테라리움이라도 존재함으로써 방어의 큰 구실을 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

서론을 길게 끌었지만 나와 키르켄이 예상했던 대로 테라리움들에서 의무적으로 병력을 뽑아낼 구실을 질질 끌어 설명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세계의 반이 사라졌습니다. 이젠 모든 테라리움이 합심하여 이전과는 다른 행동을 취해야 할 때입니다. 이웃의 불행을 자신과 먼 일이라고 치부하시지 않길 바랍니다. 물론 1번째 테라리움이 선두에 서서 세계를 수호하기 위해 노력할 것입니다. 여러분께 바라는 건 작은 협력입니다.”

“재정이 위태로운 테라리움은 병역 충원까지 맡게 된다면 파산할 위험이 늘겠군요. 조만간 경매에 테라리움 매물들이 대량으로 등장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혹시 구미가 당기시진 않나요?”

마치 내가 경매에 테라리움들이 나오면 전부 사들일 사람처럼 보이나 보다. 이전의 나라면 맞게 봤다.

“더 이상 테라리움은 얻지 않으려고 해요. 셋도 벅차다고요….”

세계 인구 중 드루이드는 수가 매우 적다. 게다가 불을 해치울 수 있는 유일한 직업이라 희소가치도 크다. 불과 싸우는 최전방에 평범한 사람을 전투원이라고 보낼 수 없고. 능력이 있다 해도 죽을 위험이 높은 곳에 일하러 가라고 떠민다면 절대 가지 않을 것이다.

그때, 난 이 순간이 어쩌면 새로운 힘을 개방한 베스탈리스들에 대해 이야기를 꺼내 볼 수 있는 순간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베스탈리스에 대해 생각하자 긴장으로 인해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어쩌면 세계가 끝나는 날까지 가장 부정적인 반응을 보일 1번째 테라리움에서 베스탈리스에 대한 인식을 완전히 바꿔야 하는 순간인 것이다.

스텔라를 설득하려고 했을 때, 그녀의 가장 큰 물음도 이것이었다. 1번째 테라리움과 척을 질 각오가 되어 있는지.

아직 많은 베스탈리스들을 포섭하지 못한 상황이었기에 그들의 진실에 대해 밝히는 순간이 예상했던 것보다 너무 빨리 왔지만, 이보다 더 최적인 순간이 올 수 있을까 싶었다.

다만 조금만 더 상황을 살펴야 한다. 모두가 의무 병력 제공에 불만이 극에 달할 때, 돌파구를 제시한다는 입장으로….

“앞으로 1번째 테라리움에서는 불의 위협에 따라 테라리움별 위험도를 조사하여 15일에 한 번씩 공표할 예정입니다. 가장 위험도가 높은 테라리움에 최우선적으로 각 테라리움의 협력이 전달될 것입니다.”

적절한 조치 같으나 한편으론 걱정되는 것도 있었다.

“자신의 테라리움이 위험 지역으로 규정되면… 도움은 받을 수 있을지언정 대외적 시선은 나빠져서 싫어할 사람들이 생기지 않을까요?”

“당연하죠.”

모든 테라리움 중 가장 불의 위협이 높은 곳이라고 공개적으로 발표하게 되면 사람들은 당연히 피해야 될 곳으로 인식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모든 활동을 꺼리겠지.

아니, 어쩌면 이를 이유로 들어 해당 테라리움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또 하나의 규정을 세워 버릴지도 모를 일이었다.

테러나 안전 등의 위험으로 여행 위험 지역으로 규정된 국가들처럼 말이다.

물론 뒤 번대 테라리움은 항상 불로부터 가장 위험한 곳이라는 인식은 있으나 가능성에 대해 생각하는 것과 아예 확정지어 버리는 것은 달랐다.

그렇지 않아도 사람들이 꺼리는 지역에 사망 선고를 내리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사람들이 해당 지역으로 더 여행이나 이주를 가지 않게 되며 테라리움의 경제는 악순환이 시작될 것이다.

회담이 진행될수록 행정 관리원들의 표정은 더욱 더 어두워졌다. 아마 뒤 번대 사람들의 경우 앉아 있는 게 죽을 맛일 것이다.

나 또한 60번째 테라리움을 소유하고 있었으므로 착잡한 마음이 들었다. 모든 테라리움의 불의 위험도를 공표한다고 했으니 확정 위험 지역은 물론 주의 지역까지 공식적으로 밝혀져 간접 피해를 받을 것이 분명했다.

“여러분들께 요구하는 협력은 다음과 같습니다. 가장 먼저 불의 위협으로부터 테라리움을 구할 수 있도록 드루이드 병력을 지원하는 것입니다. 각 테라리움 출신의 드루이드 혹은 용병을 의뢰하여 의무적으로….”

결국 나올 이야기가 나오고 말았다. 예상했던 대로 의무 병력 지원이었다. 병력을 지원할 수 없을 경우 식량이나 기타 생필품, 의약품 등을 지원해야 한다고 그들은 말했다. 하지만 그것도 전부 다이아였다.

뒤 번대로 갈수록 식량 자급자족이 어렵고 의료 시설도 낙후되어 있어 의료품 또한 전부 수입에 의존해야 했다. 생필품도 테라리움 내에서 자체적으로 생산하는 물품들은 죄다 내부에서 사용하기에 바빠서 다른 곳에 기부라며 내놓을 상황이 못 됐다.

그렇다고 다이아 자체만 기부를 하는 건 또 안 된다고 말한다. 기부 받은 테라리움에서 최우선적으로 병력에 사용하지 않을 수도 있고 이를 막기 위해 다른 테라리움에 사용 내역을 오픈해야 한다는 점이 번거로울 수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키르켄은 이에 자신이라면 기부금을 잔뜩 받으면 테라리움을 경매에 내 버리고 다른 곳에서 새 삶을 살지도 모르겠다며 우스갯소리로 말했다.

그때 누군가가 손을 들었다. 제시된 안건에 대에 발언을 하고 싶었나 보다.

“오, 제법 용기가 있는 사람이군요.”

옆에서 키르켄이 진심으로 놀라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 말에 난 불안감이 더욱 커졌다.

손을 든 사람을 바라보는 중앙 행정 관리부 쪽의 자리도 분위기가 묘했다. 친절한 웃음을 가장한 사람들 중엔 이를 불쾌하게 바라보는 이가 섞여 있었다. 그들은 마치 감히 중앙 행정 관리부의 의견에 토를 달 생각이냐는 눈빛을 하고 있었다.

난 그래서 더욱더 베스탈리스에 대해 이야기를 꺼내기가 주저되었다.

파라다이스 테라리움에 관한 청문회에서도 느낀 적 있는 분위기였다. 상당히 권위적이고 강압적이며 자신들이 절대 틀릴 리 없다는 확고한 믿음이 몇몇에게서 느껴졌다.

세계수의 가장 지척에서 신을 숭배하다 못해 이에 심취한 나머지 자신이 신과 동일한 권력을 가졌다 여기게 된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말이다.

그때 상석에서 봤던 모든 이들이 자리한 건 아니나, 봄버에 대한 진실이 밝혀졌을 때 놀라움보다는 치부를 들켜 치욕스럽다는 표정이 먼저 나왔던 이들 몇이 오늘 이 자리에 함께했다.

“여러분들께서 의견을 내실 수 있는 시간은 이후에 마련되어 있으나 순서에 대한 사전 고지가 없었으므로 저기 손을 드신 분의 의견만 하나 듣고 가려고 합니다. 자, 소속이….”

“안녕하십니까, 저는 63번째 테라리움의 행정 관리원인 ‘바이나’라고 합니다. 듣고 있던 중 도저히 궁금증을 참지 못해 손을 들게 되었습니다.”

불만을 전혀 숨기지 않은 목소리였다. 뒤 번대 테라리움을 운영하려면 저 정도 깡다구는 있어야 했다. 마치 내일은 없다는 마인드로 말이다.

“저희 뒤 번대 테라리움은 앞 번대 테라리움들과 다르게, 찾아오는 드루이드들조차 보기 힘듭니다. 태어난 고향일지라도 일생에 단 한 번도 찾지 않는 자들도 많고요. 그러니 병력은 당장 테라리움의 치안에 쓸 병력도 부족하여 다른 테라리움에 지원 보낼 여력이 되지 않습니다. 다른 방식으로 기부를 할 수 있다고는 하나 그렇게 재정이 여유롭지도 않습니다. 그렇게 무리하여 지원을 하게 된다면 저희 테라리움엔 어떤 혜택이 있는 겁니까?”

“테라리움들의 사정을 봐주다 보면 일부러 참여하지 않는 곳도 발생하여 의무적으로 규정하긴 했으나 그래도 사정에 따라 차등적으로 지원을 받을 예정입니다. 재정 상황이 나은 곳은 상대적으로 더 많은 지원을 요청할 것입니다.”

“그렇다는 건 이제부터 모든 테라리움의 재정 상태를 1번째 테라리움에 오픈해야 된다는 이야기로 받아들여도 되겠습니까?”

그 말에 참지 않은 술렁임이 가득 일었다.

아무리 1번째 테라리움이라 하더라도 각 테라리움의 재정 상태에 대해선 알지 못했다. 그동안 테라리움의 독자적인 운영을 인정한 만큼 세계수 가지만 무사하다면 내버려 둔 데다, 재정 상태는 곧 개인인 행정 관리원의 월렛을 오픈하는 것이나 다름없었기에 철저히 비밀에 부쳐졌다.

테라리움의 사정에 따라 차등적으로 지원 규모를 결정하는 건 맞는 말이나 그 사정을 객관적으로 따져 보려면 그동안 보안이 걸려 있던 테라리움의 재정을 중앙 행정 관리부가 심사를 해야만 했다. 이건 운영 간섭이 될 수도 있는 주요 사항이었다.

“혜택은… 모든 테라리움이 공평하게 의무를 지게 되므로 훗날 귀하의 테라리움이 안전의 위협을 받았을 때, 손을 내민 만큼 거두게 됨을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날이 언제가 될 줄 알고 기약 없이 내줘야 합니까? 제가 행정 관리원을 그만둔 후가 될 수도 있는데, 이런 의무는 뒤 번대 테라리움들에게 너무 많은 짐을 지게 하는 것 같습니다.”

63번째 테라리움의 행정 관리원인 바이나의 입장에선 절대 물러설 수 없는 싸움이 시작된 것이다. 그를 대하는 중앙 행정 관리부의 시선이 갈수록 언짢아지고 있지만, 이미 자리에서 일어나 간접적으로 뒤 번대를 대표하는 입장이 되어 버린 만큼 최대한 맞서는 게 그가 할 수 있는 발버둥이었다.

이번 일로 중앙 행정 관리부에 안 좋게 찍힌다 하더라도 조금이라도 내야 할 다이아를 줄인다면 당장 하루 살기 바쁜 뒤 번대 입장에선 상당한 이득이었다.

어차피 번호 연계법이 존재하는 이상 중앙 행정 관리부는 뒤 번대 테라리움에 대해 신경을 거의 안 쓰다시피 했다. 문득 정말 신경을 안 쓰려고 번호 연계법을 만든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벌써 세계의 절반이 불에 의해 멸망했습니다. 귀하께서 관리하는 60번대 테라리움이 축복 불균형으로 인한 피해를 입는 것도 머지않은 일입니다.”

“그런 불확실한 미래보다 저희 테라리움은 당장 현실을 생각해야 합니다.”

“우선… 이와 같은 담론은 후에 자리가 마련되면 이어 가도록 하지요. 귀하의 의견에 대해서는 이해했습니다. 다만 당장은 반론보다 세계에 닥친 위험과 저희 중앙 행정 관리부의 입장을 충분히 설명드리는 게 먼저일 듯합니다.”

분위기가 과열되자 결국 중앙 행정 관리부 쪽에서 이야기를 끊었다. 바이나의 주장에 힘입어 슬슬 다른 뒤 번대 테라리움에서도 엉덩이를 들썩거리는 게 보였기 때문이다. 물론 모든 뒤 번대 테라리움이 바이나처럼 당당하고 과격하게 주장을 펼칠 마음을 가진 건 아니겠지만.

부정적인 입장을 취하면서도 차마 1번째 테라리움에 반기를 들 자신이 없어 죽을 상을 한 채 땅만 보고 있는 사람들도 많았다.

“앞 번대에서도 들고 일어날까요? 결과적으론 뒤 번대보다 더 많은 것을 내놓아야 할 거 같은데.”

“이익을 따지는 건 앞이고 뒤고 똑같으니 이를 부당하다고 여기는 자들도 분명 있겠지요. 사실 번호만 앞일뿐이지, 뒤 번대만큼 재정이 개판인 테라리움이 많지 않습니까? 이 자리엔 엄청난 빚으로 인해 테라리움이 자신의 것이 아닌, 은행의 것인 자들도 있을 겁니다.”

누구도 양보할 수 없는 싸움, 결국 회담의 첫 타임은 1번째 테라리움의 밑밥 깔기로 끝났다. 휴식 시간이 주어지고 회담을 나가는 이들의 얼굴은 각양각색이었다. 여기저기서 한숨이 터져 나오고 있었다.

“이거 원, 수확제로 벌어들인 돈을 죄다 빼앗기게 생겼는데.”

“80번대 테라리움의 행정 관리원들은 이걸 알고 이 자리에 안 온 거 아니야? 가장 먼저 그쪽이 기부를 받을 거 아니야? 내놓는 거 없이.”

“당장 망하게 생긴 테라리움을 상대로 그런 말은 삼가게나. 불을 막는 데도 바쁜데 그런 걸 따질 여력이 있겠나.”

회장을 나와 키르켄과 좀 전의 안건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데, 다른 행정 관리원들이 유대를 바라는 눈빛으로 다가왔다. 해안 테라리움 연합과 10번대 테라리움의 행정 관리원들이었다.

혹시 이들을 상대로 먼저 슬쩍 베스탈리스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 보는 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