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 격리를 당한 것 같지 않나요?”
자리에 앉은 키르켄이 아주 작은 목소리로 내 귀에 속삭였다.
“누가요? 저 사람들이요?”
“아니요. 저희들 말입니다. 귀하신 분들께 행여 해를 입힐세라 따로 떨어뜨려 놓은 것 같지 않습니까? 다들 대기실이 아닌 회장에서 대기하는 방법도 있었을 텐데요.”
“그런 관점… 도 있겠네요.”
진지한 말투는 아니었다. 그저 현 상황에 대한 농담조로 들렸다.
“하필이면 대기실에서 그런 일도 생겼으니, 격리시켜 놓은 걸 다행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 일이라면 카이시아를 뜻했다. 그녀가 망나니짓을 했을지언정 해를 끼친 것은 아니기에 병균 취급을 당하는 것이 좀 딱하게 여겨졌다.
“갑작스러운 소집에 바쁜 일정임에도 불구하고 참여해 주신 모든 행정 관리원님들께 먼저 감사 인사를 드립니다.”
그 말에 여기저기서 아주 작게 불만을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확실히 한창 수확제로 바쁠 시기에 불러내는 건 경우가 아니긴 했다.
회담이 시작되고 중앙 행정 관리부의 주도로 먼 길을 온 행정 관리원들에 대한 형식적인 수고와 인사가 이어졌다.
난 그런 지루한 의례는 흘려들으며 좀 전에 만난 목화 드라이어드에 대해 생각했다. 내게 꼭 필요한 꽃….
문득 중앙 행정 관리부 그리고 올리브 나무 드라이어드와 처음 만났을 때가 떠올랐다. 16번째 테라리움을 손에 넣은 건으로 문책을 하려던 자리였는데, 올리브가 내게 너무 과하게 들이대는 바람에 분위기가 이상하게 흘러갔었지.
“여기 이 올리브나무는 세계수의 축복을 매우 민감하게 느낄 수 있습니다.”
“만약 이곳의 세계수의 축복에 흐트러짐이 있다면, 조금이라도 불모지가 될 가능성을 이 올리브 나무가 발견할 것입니다.”
“올리브나무 드라이어드여, 오늘을 위해 특별히 힘을 빌려 당신을 골라내었습니다. 좀 더 신중하게 맡은 바에 책임을 다해 주세요.”
그러고 보니 그때 그 사람이 올리브를 향해 특별히 힘을 빌려 골라내었다는 표현을 했었지? 당시에는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이상한 점을 바로 눈치채지 못했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의미가 이상했다.
올리브는 열매를 통해 개화한 드라이어드였다. 세계수의 품 안에 있을 적의 이야기를 자연스레 꺼내 놓았기 때문에 알 수 있었다.
열매를 개화하기 전까지 어떤 드라이어드가 태어날지 알 수 없다. 그러니 특정한 드라이어드를 열매 단계에서부터 골라내는 건 불가능했는데, 그때 그자의 말을 보면 올리브를 특정하여 골라냈다는 것처럼 들렸다.
아니, 아주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폴리움텔러인 플로라는 ‘플로라의 부케’에 포함되는 꽃들에 한해서 불특정한 운명적인 예지를 느낄 수 있었다. 폴리움텔러들이 테라리움들을 떠돌며 유랑하는 이유도 그런 이끌림에 조금이라도 더 가까워지기 위해서라고 들었다.
28번째 테라리움에 방문했던 플로라가 정확히 마거리트가 태어날 열매를 예지했다는 점에서 이미 선례를 본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그녀는 내게 이런 이야기도 했었다.
“폴리움텔러는 아니지만 저와 비슷한 능력이 있는 분들이 한 자릿수 테라리움에도 여럿 있는 걸로 알고 있답니다. 그들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특정 드라이어드 열매에 가까워질 수 있는 능력이 있어요. 그러니 완전히 사기라든가 불가능한 일은 아니랍니다.”
그렇다는 건 원하는 드라이어드 뽑기의 확률을 임의로 올릴 수 있는 방법이 정말 존재하는 게 아닌가? 혹시… 목화 드라이어드가 그런 힘을 가지고 있는 드라이어드인 건 아닐까?
원하는 드라이어드를 뽑을 확률을 높여 주는 힘, 무척 대단해 보이지만 한편으론 불합리한 힘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누구나 다들 원하는 드라이어드를, 즉 더 좋고 더 강한 드라이어드를 뽑고 싶어 할 텐데 그런 힘이 존재한다는 걸 알면 드라이어드 선호의 양극화를 불러오는 길만 오게 되지 않을까?
테라리움을 관리하다 보면 세계수 가지의 품질을 검사하기 용이한 올리브와 같은, 특정 드라이어드의 힘이 필요할 때가 있다. 원하는 드라이어드를 뽑는 힘에 기대는 것도 이해는 갔다. 테라리움에 필요한 드라이어드가 나올 때까지 열매를 마구 뽑을 수는 없는 일이니까.
원래 있던 드라이어드의 힘을 이용하는 거니 불법도 아니고.
어쨌든 목화 드라이어드의 힘이 만약 그렇다면, 내게 꼭 필요한 드라이어드를 뽑을 확률을 높여 준 걸지도 모른다는 건데 약간 애매했다. 꼭 필요한 드라이어드는 마거리트가 있지만 그녀를 열매로 다시 뽑는 것은 불가능했고, 남은 건 새로 맞이하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난 이제 열매 뽑기는 그만 할 생각이었다. 드라이어드를 새로 키울 여유는 없었고 남은 자리는 가디언들을 모으기 위해 남겨 두었다.
잠깐, 생각해 보면 내가 원하는 드라이어드가 아니라 꼭 필요한 꽃이라고 했다. 말은 해석하기 나름이었다. 필요를 느끼는 것이 당장이 아닌 미래일 수도 있고, 거시적으로 보면 내게 필요한 드라이어드는 필드의 가디언이었다. 그렇다면 설마…?
그런데 메스키트처럼 이번에도 드라이어드 열매를 통해 가디언을 얻을 수 있을까?
메스키트는 특이 케이스로, 전 주인이 죽자 전 주인의 바람대로 세계수의 품으로 돌아가 다음 주인을 기다리던 중에 열매를 개화시킨 나와 만나게 되었다.
메스키트를 제외한 다른 가디언들은 전부 열매가 아닌 필드에서 만났다. 가디언들은 대부분 카수스 세대에서부터 자리를 계속 보전해 온 쪽이 대부분이다 보니, 자리를 계승시킨 것이 아닌 이상 열매 속에 있을 리는 만무했다. 가디언은 죽지 않으니까.
하지만 남은 가디언들의 행방은 오리무중이었다. 실새삼처럼 폐쇄된 섬에서 자신만의 왕국을 만들어 거느리고 살 수도 있고, 포인세티아처럼 어느 테라리움에 숨어 은밀한 협력 관계로 지내고 있을 수도 있고, 전대 노멀 필드의 가디언처럼 깊은 땅굴 속에 시체만 남아 있을 수도 있다.
그렇기에 따지고 보자면 이미 메스키트라는 전적이 있는 열매 뽑기에서 행방불명된 또 다른 가디언이 나올 수도 있는 일이었다.
만약 목화가 이를 알고… 가디언을 바라는 내 마음을 읽고 힘을 써 준 것이라면 열매 뽑기를 할 이유가 생겼다.
문득 싸한 기분이 들었다.
카수스가 이걸 모를까?
나보다 훨씬 먼저 오랜 기간 동안 모험을 했던 그가, 나보다 먼저 10그루의 가디언을 모두 모았던 그가 이 가능성에 대해서 모를 리가 있을까? 알고 있다면… 그가 드라이어드 열매가 열리는 수확제를 노리지 않을 리가… 있을까?
하지만 남들 눈을 피해 테라리움의 열매를 모두 획득하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열매 하나를 뽑자마자 가디언이 나올 확률은 극히 적으니 확률을 높였다고 해도 여러 개를 뽑아 봐야 할 테고 극단적인 경우 가지 하나를 다 털어야 할지도 모른다. 더 나아가 한 개의 테라리움으로도 부족할 수도 있고.
개인이 설익은 열매도 아닌 드라이어드 열매 사재기를 하는데 테라리움에서 아무런 의심 없이 내줄 리도 만무했다.
드루이드에겐 COST 시스템이 존재하여 그 많은 드라이어드를 다 자신의 영혼에 거둘 수도 없는 노릇이거니와 전부 양분으로 줘 버린다고 하더라도 다이아를 많이 쓴 만큼 테라리움의 주목을 받게 된다.
카수스는 힘을 비축하기 위해 숨어 다니는 입장이니 주목받아서 좋을 건 없었다. 애초에 드러내 놓고 활동할 생각이었다면 진작 포인세티아의 레이더에 걸렸을 것이다. 하지만 그에 대한 흔적이라곤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와중에 극단적인 행보를 보였을 리도 없고….
적어도 어느 테라리움의 가지에서 열릴 거라는 확신이 있는 거라면 모를까.
한창 딴생각을 하던 와중에 회담을 여는 인사가 끝이 났고 본론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바로 얼마 전, 수확제로 모두가 풍요로운 시기를 보내야 할 때에 세계수의 101번째 테라리움과 92번, 93번 테라리움에서 비극적인 일이 일어났습니다. 불의 습격을 받아 마지막 방어선인 과수원이 무너졌고, 이에 따라 잠정적 회생 불가능 상태가 되고 말았습니다.”
역시나 소집령의 원인은 포인세티아가 알려 준 불의 습격 때문이다. 다만 이전에도 불의 습격으로 멸망한 테라리움은 많았고, 그때마다 행정 관리원들을 소집하진 않았기에 이번 모임의 큰 원인은 다른 이들이 추측한 대로 곧 세계의 절반이 불에 의해 망한 시점이 가까워지기 때문일 것이다.
“101번째 테라리움은 세계에 남은 마지막 100번대 테라리움으로 그 의미가 커, 저희 1번째 테라리움을 비롯해 여러 테라리움과 길드가 합심하여 공동 방어를 구축해 놓은 상태였습니다. 하지만 결국 거세지는 불의 공격을 막아 내지 못했고, 축복의 균형이 무너진 여파는 바로 90번대 테라리움에까지 미치게 되었습니다.”
테라리움은 독자적으로 행정을 운영함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100번대를 상징적인 의미를 지키기 위해 1번째 테라리움에서 직접 전력을 파견해 보호 중이라는 사실이 놀라웠다. 더구나 그 전력들이라면 고심해서 골랐을 텐데 끝내 전멸해 버렸다는 사실도 놀랍고.
“흐음….”
듣고 있던 키르켄이 이해가 잘되지 않는다는 것처럼 길게 콧소리를 내었다.
“1번째 테라리움에서 보낸 전력이 정말 불에 전멸을 당했을까요?”
그리고 의미심장한 목소리로 내게 속삭였다. 그의 생각엔 나도 동의했기에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101번째 테라리움은 상징성이 아주 큽니다. 어지간한 드루이드가 아니라면 찾지 않는 그 테라리움을 허울뿐이더라도 지켜 내는 게 1번째 테라리움의 자존심이죠. 무엇보다도 세계가 아직 불에 지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하니까요. 듣기론 1번째 테라리움뿐만 아니라 한 자릿수 테라리움의 유명한 길드들에선 의무적으로 병력을 뽑아 주둔시켜야 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테라리움이 보내야 할 병역 의무를 길드에 대신 지우게 함으로써 그에 따른 혜택을 제공하는 방식이죠.”
한 자릿수 테라리움에 길드가 스톤헨지를 두기 위해서 그런 일까지 해야 하는 줄은 몰랐다.
“그런 전력들이 결국 불에 전멸당했다는 것과 이런 숨기고 싶은 치부를 공개적으로 드러내는 게 조금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만…. 물론 101번째 테라리움이 멸망했다는 사실이 드러나면 숨기려야 숨길 수 없겠지만 순순히 불에 전멸당했음을 인정하는 게 믿기 힘들어서 말입니다.”
1번째 테라리움은 세계수를 가장 가까이에서 받드는 테라리움으로 이단 감찰단을 만들 만큼 세계수에 광적으로 집착하는 곳이었다. 그렇기에 세계수의 숙적인 불에 신의 종인 자신들이 졌음을 순순히 인정하는 건 키르켄의 말처럼 의심이 들긴 했다.
“혹시 불에 전멸했다는 사실 뒤로 더 숨기고 싶은 게 있는 건 아닐까요? 차라리 불에 전멸했다는 게 더 나을 정도로 치욕적인 무언가를 말입니다.”
“이제 보니 키르켄 님은 음모론을 많이 좋아하시는 거 같네요.”
“의심이 많아야 손해를 입지 않는 법입니다.”
키르켄의 말은 충분히 흥미로웠지만 지금으로선 근거 없는 음모에 불과했다.
“두 90번대 테라리움이 불의 습격을 버티는 것도 한계에 이르렀습니다. 전력을 보내는 속도보다 축복의 균형이 깨짐에 따라 방어선이 무너지는 속도가 더 빠릅니다. 지도의 절반이 공식적으로 삭제되는 것도 머지않은 일입니다.”
“행정 관리원들에게 의무적으로 병력을 얻어 내려는 걸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