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14화 (514/604)

카이시아의 정신을 뒤덮고 있던 기운이 점차 걷혀 나가는 게 보였다. 마침내 그녀의 눈빛이 그나마 정상으로 돌아왔을 때, 난 긴장되는 마음으로 반응을 지켜봤다.

지금까지는 기운에 취해 망나니짓을 했지만 멀쩡한 정신으로 돌아온다면 자신이 벌인 사태에 대해 무슨 생각을 하고 어떻게 행동할까?

“어어….”

그녀는 자신을 향한 수많은 사람의 눈초리가 얼떨떨한지 몸을 떨며 주변을 돌아봤다.

“어떻게….”

“괜찮아요? 이제 대화를 좀 나눌 수 있을까요?”

“넌….”

“제가 기억나시는 거죠?”

나와 눈이 마주친 카이시아는 돌발 행동을 했다. 온 힘을 다해 날 밀쳐 내고 회장 밖으로 뛰쳐나가 버린 것이다. 균형을 잃고 넘어질 뻔한 걸 다행히 시들링이 부축해 줬다.

“카이시아!”

갑자기 도주해 버릴 거라곤 전혀 생각하지 못했기에 너무나 당황스러웠다.

“쯧쯧.”

“행정 관리원이 맞긴 할까? 외부인이 잘못 들어온 거 아냐?”

“대체 어느 테라리움이라고 합니까?”

그녀가 자리를 떠나자 비난이 봇물 터지듯 쏟아졌다. 회장 안을 가득 채운 조롱과 질타의 목소리만이 그녀가 조금 전까지 그 자리에 있었음을 나타낼 뿐이었다.

“48번째 테라리움은 불참이군요.”

뒤늦게 다가온 키르켄이 혀를 쯧쯧 차며 말했다.

“이해할 수가 없네요. 그런 상태라면… 차라리 아예 소집령에 응하지 않았으면 되지 않나 생각되거든요.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담에 참여하기 위해 오긴 했잖아요?”

“아직도 그녀가 자의가 아닌 타의에 의해 마약에 취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시는 건가요?”

“보통은… 그걸 먼저 걱정해 줘야 하는 게 맞지 않나 싶어서요.”

뛰쳐나간 카이시아를 따라갈 생각과 여유는 없었다. 이곳은 1번째 테라리움이니 그녀가 기이한 행동을 벌이더라도 경비대에 잡힐 것이다. 신분이 보장되어 있으니 그에 따른 조치를 받겠지.

“곧 회담이 시작될 예정입니다.”

때마침 직원이 들어와 회담의 시작을 알렸다. 찝찝한 마음으로 자리를 이동하려는 때에 새하얀 로브를 입은 사람들이 회장을 향해 걸어오기 시작했다.

그들 중 몇은 안면이 있었다. 파라다이스 테라리움 건으로 열렸던 청문회에서 본 얼굴들이었다. 그들이 중앙 행정 관리부의 핵심 인물들임을 알 수 있었다.

무리의 뒤를 졸졸 따라가는 드라이어드도 눈에 띄었다. 커다란 바구니를 품에 안은 올리브 드라이어드도 있었는데 나와 눈이 마주치자 해맑게 손을 흔들었다. 그녀의 행동에 뒤따르던 다른 드라이어드들도 호의가 가득한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어라?”

그런데 인사만 하고 지나칠 줄 알았던 드라이어드가 점점 날 향해 다가오는 것이 아닌가. 두 드라이어드의 돌발 행동에 주인으로 추정되는 자는 물론 흰 로브를 입은 사람들이 당황한 눈으로 이곳을 바라보며 걸음을 멈췄다.

“피어나는 축복의 작은 세계수.”

여러 번 만나 이젠 친근감이 느껴지는 올리브 드라이어드가 초면의 낯선 드라이어드에게 나를 소개하는 것처럼 행동했다. 새하얀 솜털에 휩싸인 듯한 드라이어드에게선 자애로움이 가득한 분위기가 풍겨 왔다.

“새로 태어난 이들이 모두 당신의 영혼을 노래했어요. 만나고 싶었답니다.”

“아… 안녕?”

내 인사에 드라이어드가 화사하게 웃으며 두 손으로 내 손을 가볍게 붙잡았다.

“당신에게 꼭 필요한 꽃을 얻길 바랄게요.”

그러자 나와 맞잡은 손에서 은은한 빛이 감돌다가 금방 사라졌다.

“절차 없이 그런 행동을 안 되십니다.”

우리의 곁으로 다가온 흰 로브의 사람이 정중한 목소리로 드라이어드에게 말했다.

“내게 꼭 필요한 꽃?”

“무슨 소원을 비신 겁니까?”

내가 먼저 행동한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자는 나를 타박하는 말투였다.

“소원을 빌었다뇨? 그런 적 없는데요?”

“그럼 왜 드라이어드가 당신에게… 아닙니다. 가시지요.”

매몰차게 대화를 끝내더니 드라이어드를 재촉해 회담이 진행될 홀로 홀연히 가 버렸다.

“방금 무슨 상황인 건가요?”

“저도 잘 모르겠네요. 저 드라이어드는 저도 처음 보는데, 뜬금없이 제게 무슨 힘을 사용한 것 같기도 하고….”

“1번째 테라리움에서 극진히 모시는 드라이어드라면 꽤나 굉장한 드라이어드가 아니겠습니까? 축복 같은 걸 받은 거겠지요.”

키르켄이 부러움이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난 여전히 떨떠름했기에 그의 부러움에 동조해 줄 수 없었다. 내게 축복을 내렸다고?

“시들링, 저 드라이어드 무슨 꽃인지 알아볼 수 있겠어?”

“어쩌면 목화가 아닌가 싶다.”

“목화?”

모르는 꽃은 아니었다. 그러고 보니 드라이어드의 장비 곳곳에 달린 솜방울을 닮은 장식이 목화와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목화라면 뒤 번대에서 흔히 볼 수 없는 식물이긴 하나 그렇다고 아주 희귀한 식물은 아니지요. 4번째 테라리움 근방에 목화를 재배하는 농장이 있을 겁니다.”

“도통 연관성을 모르겠네요. 저희도 회장으로 들어가죠.”

특이한 일이었다. 올리브 드라이어드가 호의적으로 대한 걸 보면 목화 드라이어드에게 나쁜 의도는 전혀 없다는 건 알겠다.

내게 꼭 필요한 꽃이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지 궁금해졌다. 지금 내게 가장 필요한 꽃은 날 떠난 마거리트였다. 혹시 목화의 힘이 내가 마거리트와 다시 만날 수 있는 운을 조정한 것이라면 그야말로 최고의 축복이긴 했다.

하지만 포인세티아가 아무리 뛰어다녀도 머리카락 한 올 찾을 수 없었던 카수스를 이런 방법으로 다시 만날 수 있긴 하는 걸까?

“모두 입장해 주시기 바랍니다.”

중앙 행정 관리부 사람들이 모두 회장 안으로 들어가자, 기다리고 있던 우리를 향해 직원이 이제 회담이 시작될 것이라고 알려왔다.

“난 밖에서 기다리고 있겠다.”

회장은 행정 관리원들만 들어갈 수 있기에 시들링은 함께 들어갈 수 없었다.

“오래 걸릴 것 같으니까 어디 식당이나 카페에 가서 기다리는 게 어때?”

“그렇게 하겠다.”

명령은 아니었으나 시들링은 착실히 따르며 내가 회장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건물 밖으로 나갔다.

“미미르는 결국 오지 않는 건가….”

웅성웅성.

회장 안은 들어가자 청문회 때 사용했던 구조를 그대로 사용한 것으로 보였다. 다만 테라리움을 대표하는 행정 관리원들을 모은 자리다 보니 그때와 달리 좀 더 격식이 갖춰졌다.

객석은 둥글게 반원으로 위로 갈수록 높아지는 구도였고, 아래로는 일렬로 앉은 중앙 행정 관리부의 사람들이 한눈에 보이는 구조였다.

“앞자리는 벌써 다 찼네요?”

키르켄은 그나마 행정 관리원 중 가장 자주 만나 친분이 있는 사이다 보니 동석을 하게 되었다. 아마 미미르가 오늘 참석했다면 그 또한 나와 동석했을 것이다.

“한 자릿수 테라리움의 행정 관리원들일 겁니다.”

“오….”

가장 유명한 테라리움의 행정 관리원들이 이곳에 와 있다니. 다들 신원을 특정할 수 없도록 후드를 깊게 눌러쓴 로브를 입고 있어서 가늠은 불가능했다. 이 세계는 체형만으로 성별을 특정하는 것도 힘들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가 대기실에 몰려 있을 때 저 로브의 사람들을 본 적은 없었다. 그러니 그들은 회담이 시작하기 전까지 대기실에 우리와 함께 있던 것이 아니라 이미 회장 안에서 대기하고 있었음을 뜻했다. 한 자릿수를 위한 특별 대우쯤인 건가?

그렇다면 혹시 이곳에 베일에 싸인 1번째 테라리움의 행정 관리원도 있는 건가 싶어 좀 더 유의 깊게 앞을 바라봤다. 그러나 딱히 누구다 싶은 건 느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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