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이 모여 있는 회장엔 불편하고 날카로운 기운이 감돌았다. 기저에 깔린 주된 감정은 분노와 열등감이었다.
모험을 하며 테라리움의 번호 차이로 차별이 일어나는 것을 많이 봐 왔기에 뒤 번대 테라리움의 행정 관리원들이 좀처럼 화를 잠재우지 못하는 이유를 이해할 수 있었다.
그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뒤 번대 테라리움의 멸망이 정해진 순번이라는 것처럼 말하고 있는 앞 번대 테라리움의 행정 관리원들에게 분노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앞 번대는 마치 이 일과 동떨어진 것처럼 말하는 말투도 한몫했다.
“그래도 한 30번대까지는 1번째 테라리움과 가까우니까 금방 지원군을….”
“그럼 40번대부터는 어쩌라는 겁니까?”
난 다툼에 끼고 싶지도 않았고 딱히 말릴 생각도 없었다. 분위기가 험악해지면서 사람들이 서로 드잡이질이라도 할 기세로 한데 모였고 내 자리는 갈수록 회장의 중앙에서 멀어졌다.
거대한 시들링의 덩치를 벽 삼아 사람들의 시선을 차단하며 회담이 빨리 시작하기만을 기다렸다. 나와 안면이 있던 사람들도 시들링 때문에 가까이 오지 못하는 게 보였다.
“아, 저쪽도 왔네.”
회장 입구만 주시하고 있는데 눈에 익은 얼굴이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직전에 만난, 48번째 테라리움의 망나니 행정 관리원 카이시아였다. 결국 동생인 폴룩스가 그 자리를 이어받지 않고 아직까지 누나인 카이시아가 그대로 직권을 가지고 있는 듯했다.
나름대로 공식적인 석상이라고 처음 만났을 때와 달리 정리된 머리와 번듯하게 차려입은 옷차림을 했지만… 어딘가 이상해 보였다.
카이시아가 지나가자 그 곁에 서 있던 사람이 깜짝 놀라 코를 막는 것이 보였다. 그러곤 불쾌한 눈빛으로 그녀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그녀는 그러거나 말거나 대기자들을 위해 마련된 푸드 테이블을 향해 휘적휘적 걸어갔다. 그러곤 음료 한 병을 통째로 손에 들고 벌컥벌컥 들이마시기 시작했다.
“저자… 마약을 한 건가?”
“응?”
날 따라서 카이시아를 주시하던 시들링이 말했다.
“눈이 풀려 있는 데다 저자가 들어오자 여기까지 독한 냄새가 흘러올 정도다.”
시들링의 말과 달리 내게는 독한 냄새가 잘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회장에 가득 꽃 냄새만 느껴질 뿐이었다.
“아마 드루이드라면 저자가 마약을 했음을 더 잘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마치 드라이어드의 공격에 당한 것처럼 보일 테니까.”
“이런 자리에 오는데… 마약을 했다고?”
대체 어디까지 망가질 작정이지, 저 사람은?
시들링의 말에 따라 카이시아의 행동을 더 자세히 살펴보니 확실히 무언가에 취한 사람처럼 보였다. 그녀의 모습이 눈에 띄다 보니 하나둘 주시하는 사람이 늘었는데, 못마땅하게 보는 사람이 대부분이었으나 유독 분노를 담은 눈으로 보는 사람들이 있었다.
어쩌면 저자들이 시들링이 말한 것처럼 행정 관리원인 드루이드들이 아닌가 싶었다.
“끔찍하군.”
시들링이 모처럼 날것 그대로의 제 감정을 전했다.
회장 안에 언쟁이 벌어졌어도 무표정하게 이를 지켜보고 있던 그였기에, 보통은 이곳에 누군가 술에 취해서 나타나든 네 발로 기어서 들어오든 상관하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그가 이리 감정을 표현하는 건 카이시아가 다름이 아닌 ‘마약’에 취했기 때문일 터였다.
난 이 세계에 와서 유일하게 관련 소재에 대해 접했던 카나비스 드라이어드 사건을 떠올렸다.
그때 메스키트가 카나비스 드라이어드에 대해 우려했던 일이 벌어졌다며 내게 이야기한 것이 있었다.
드라이어드들의 모체에 축적된 경험들에 대한 논란으로, 모체가 사람들에게 위험한 종들이 문제가 되었다. 바곳과 벨라돈나처럼 치명적인 독성을 가져 사람의 생명에 해를 끼치는 종들보다 더 악랄하게 여기는 종들이 있었는데, 그게 바로 카나비스와 같은 종이었다.
드라이어드들은 그들의 힘을 영혼을 오랫동안 죽음의 기운으로 잠식시켜 회복 불능 상태로 만들어 버리는 힘이라고 칭했다. 바로 마약이었다.
이로 인해 과거에 테라리움이 괴멸될 뻔하기도 했고 테라리움끼리 전쟁이 일어났다고도 했지.
그래서 일부 드라이어드들은 드루이드의 안위를 위협할 수 있는 종들은 세계수 밖으로 나가선 안 된다고 주장까지 할 정도였다고 한다.
하지만 결국 이를 악용하려는 사람들이 잘못된 것이었다. 카나비스는 무서운 힘을 가졌지만 한편으론 의료에 많은 도움이 되는 힘이기도 했다.
드라이어드의 치유의 힘은 사람에게 제대로 작용하지 않기 때문에, 사람이 다친다면 같은 사람에게 치료를 받아야 했다. 이때 카나비스와 같은 드라이어드의 힘이 많은 도움이 되기 때문에 테라리움의 많은 병원들이 양성에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이처럼 드라이어드의 힘이 양날의 검이 될 수 있기 때문에 같은 드라이어드들조차 부정적인 시선을 던지고 있으니, 사람들이 잘 처신을 해야만 했다. 그런데 나서서 막지는 못할망정 악용하는 걸 대놓고 드러내고 있으니….
드라이어드를 아끼는 드루이드들에게는, 특히나 카나비스와 같은 드라이어드들이 어떤 취급을 받고 있는지 알고 있는 드루이드들에게는 카이시아의 행동이 좋게 보일 리가 없었다.
“어느 테라리움의 사람이죠?”
“꼴이 왜 저런 거죠? 행정 관리원이 맞긴 한 건가.”
카이시아의 존재는 좀처럼 가라앉을 기미가 없던 회장의 분위기를 마침내 하나로 통일시켜 버렸다. 이젠 사람들이 그녀를 주시하며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하, 이거 어쩐지 눈에 익숙한 사람이라 불길한 기분이 드는데요.”
키르켄이 슬쩍 다가와 내게 말했다.
“익숙할 수밖에요. 우리 번호 연계법에 묶인 테라리움이에요.”
“어쩐지.”
내 말에 키르켄은 자신의 이마를 치곤 길게 한숨을 내뱉었다.
“저자는 48번째 테라리움의 행정 관리원이에요. 불과 얼마 전에 방문했을 때만 해도 마약을 하는 낌새는 보이지 않았는데.”
“마약이란 말이지요. 드루이드들의 눈엔 마약임이 한눈에 보인단 말이지요? 그렇다면 이 회장 안의 모든 사람들이 이에 대해 알아차리는 건 금방이겠군요.”
키르켄은 누가 들을까 겁난다는 투로 목소리를 낮췄다.
“48번째 테라리움이 거슬리긴 했어도 그렇게까지 타락했다는 정보는 받아 본 적이 없는데 말이죠. 제이 님은 38번째 테라리움으로부터 들은 이야기가 없으십니까?”
48번째의 정보는 38번째로, 38번째는 다시 28번째로 이어지는 것이 번호 연계법의 룰이었다. 그러니 48번째 테라리움의 행정 관리원이 공적인 자리에서 대놓고 마약에 취한 모습을 보일 정도라면 미미르가 이를 심각히 여겨 내게 언질을 줬어야 함을 뜻했다.
“들은 이야기가 딱히 없을뿐더러… 말씀드렸다시피 정말 얼마 전 48번째 테라리움에 방문했을 때만 해도 저 정도는 아니었어요. 혹시 오는 길에 변을 당한 게 아닐까요?”
“드라이어드의 힘에 당했다라… 그런 가능성도 있겠군요. 하지만 온 테라리움의 행정 관리원들이 1번째 테라리움으로 향하는 경로에, 그런 철통같은 보안을 뚫고 한 명만 그런 힘에 당했다는 게 어지간히 불운하지 않아야 말이죠.”
“도움이 필요할지도 모르겠네요, 후.”
키르켄에게서 은근한 눈치를 받은 터라 내가 직접 나서야겠다고 생각했다. 결국 번호 연계법이 문제였다. 같은 8의 자리로 묶여 있단 이유만으로 테라리움의 연계 관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책을 잡힐 수 있기 때문이다.
번호 연계법의 주된 역할은 세계수 가지에 대한 검사였지만, 가지를 직접적으로 관리하는 행정 관리원이 타락한 모습을 보이고 있는데 가지가 무사할 리가….
정확히는 미미르가 나서야 하지만 이 자리에 미미르가 없는 데다 키르켄보다 내가 번호가 더 낮고, 그와 다르게 나는 전투 능력이 있는 드루이드라는 점에서 결국 카이시아에게 접촉하는 건 키르켄이 아닌 내가 되었다.
카이시아에게 향하는 내 옆으로 시들링이 바짝 붙어 따라왔다. 그의 기세는 여차하면 무력을 행사할 정도여서, 난 그에게 카이시아가 드루이드가 아닌 일반인임을 강조했다.
“이봐요, 카이시아. 저 기억하죠?”
그녀의 곁에 다가가자 오래 묵은 풀의 씁쓸하고 불쾌한 향이 훅 끼쳐 왔다.
“아하…? 아, 이게 누구야. 나의 친우 아니야?”
그녀가 들고 있던 병을 큰 소리가 나게 테이블에 내려놓는 바람에 다시금 주목을 이끌어 냈다. 잔뜩 풀린 눈은 초점 없이 흔들렸고 몸짓도 괴상했다.
“카이시아, 당신 지금 마약에 취한 걸로 보이는데 확실하게 말해 줘요. 드라이어드의 힘에 당한 건가요, 아니면 직접 한 건가요?”
“마약이라니. 무슨 그런 무슨 소리야? 난 그런 거 안 했어.”
낄낄 웃으며 답하는 카이시아의 말엔 조금의 진정성도 보이지 않았다.
“드루이드의 눈을 속일 순 없어요. 그리고 당신의 모습은 지금 평범한 사람이 봐도 마약에 취해 있는 것처럼 보여요.”
“그럼 뭐, 그런 건가 보지.”
“도움이 필요한 건가요? 동생 폴룩스는 당신이 이 지경이 되도록 내버려 두….”
“폴룩스? 하하… 폴룩스….”
이젠 실성한 사람처럼 웃는 그녀에 당혹스러웠다. 멀리서 키르켄이 당장 어떻게 하지 않으면 결국 1번째 테라리움의 경비대가 출동할 거라며 언질을 해 주었다.
일단 그녀의 정신을 말짱하게 돌려놓을 필요가 있었다.
“바곳, 도움이 필요해.”
엘더의 치유의 힘은 이런 상황에서 도움이 되지 않지만, 바곳의 치유 능력은 큰 도움이 된다.
아티팩트에서 빛이 나며 검푸른 바곳이 나타났다. 회장에 드라이어드가 나타나자 좋지 않은 기색이 흐르는 것이 느껴졌다. 행정 관리원 중에는 드루이드도 많았지만 이곳에선 암묵적으로 드라이어드를 꺼내지 않고 있었다.
테라리움을 대표하는 가장 중요한 사람들이 모인 자리다 보니 잘못되면 테라리움 전체를 마비시킬 수도 있었다. 드라이어드는 무기나 다름없었기에 위협이 되지 않도록, 혹시나 나쁜 마음을 품고 일을 벌이지 않도록, 또는 그런 의사가 없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다들 드라이어드를 아티팩트 안에 넣어 둔 상태였다.
한편으론 드라이어드가 과시의 수단으로 이용될 수도 있어서 경계하는 것이기도 했다. 테라리움은 번호 차이로도 차별이 존재했지만, 심지어 행정 관리원이 드루이드냐 아니냐에 따라서 은근한 차별도 존재한다는 걸 얼핏 엿들었다. 이런 자리는 정말 피곤했다.
“바곳, 저 사람을 잠식한 힘을 걷어 내 줘.”
내 말에 바곳이 카이시아를 향해 치유의 힘을 사용했다. 불쾌한 풀 향기를 산뜻한 산약초 향이 뒤덮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