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12화 (512/604)

모든 테라리움이 수확제로 갖은 비명을 지르고 있던 때에 각지의 행정 관리원들에게 갑자기 비상소집령이 떨어졌다. 1번째 테라리움의 중앙 행정 관리부가 참여 가능한 모든 행정 관리원들은 모여 달라는 알림을 보낸 것이다.

“아직 수확제가 끝나지 않았는데 이 시기에 행정 관리원들을 호출한다고?”

집 나간 행정 관리원도 돌아와 일을 해야 하는 중요한 때에 모이라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저 말고 다른 행정 관리원들도 연락을 받았다고 하나요?”

“네, 급하게 확인한 결과 모든 행정 관리원들이 연락을 받은 걸로 보입니다.”

난 테라리움을 3개 소유하고 있기 때문에 연락도 셋이었다. 빠짐없이 연락이 온 걸 보면 확실히 무슨 일이 있나 본데.

“이런 경우가 과거에 또 있었나요?”

“아니요. 중앙 행정 관리부가 존재하더라도 운영은 각 테라리움에서 독자적으로 진행하니까 이런 경우는….”

“아.”

듣고 있던 디케가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 짧게 소리쳤다.

“들어 본 적은 있어요. 아주 과거의 일이라….”

“아주 과거? 얼마나요?”

“저희들이 태어나기 훨씬 이전에, 그러니까 아주 오래전의 옛날이야기를 들려주는 책에서…?”

디케는 목소리엔 민망함이 가득했다.

“세상에 커다란 재앙이 닥쳐올 때에 각지의 테라리움을 관리하는 사람들이 모여 회의를 했다는 내용이 있었어요….”

“이야기책에나 겨우 존재한다는 건 행정 기록에도 없다는 거 아닐까?”

“아마 그렇겠지. 어쩌면 그저 꾸며 낸 이야기일 수도….”

난 디케의 이야기를 듣고 생각했다. 카수스로 인해 재앙이 닥쳤다면 이를 대처하기 위해 각지의 행정 관리원들이 모여 의논할 법도 했다.

그렇다면 지금 소집령이 떨어진 건 그에 준할 정도로 큰 위기가 세계에 닥쳤다는 뜻이 아닐까? 설마 이번에도 카수스가 무슨 짓을 한 게 아닐까?

“불안감만 커지네요. 하필 축제 시기에….”

“참여하실 거죠? 행정 관리원님께서 자리를 비워도 문제가 없도록 준비하겠습니다.”

“가진 테라리움이 3개라 무시할 수도 없겠네요. 일단 출발 일정을 빠르게 잡아야겠어요.”

보좌관들이 돌아가자 곧바로 포인세티아를 불러냈다. 사방에 새하얀 눈꽃이 휘날리며 오늘도 활기찬 은발의 요정이 나타났다.

“혹시 카수스에 대한 정보는 아직 없어? 모든 행정 관리원이 모여 달라는 거면 꽤 큰일이 벌어진 거 같은데. 그가 연루되어 있을 수도 있어.”

“으음….”

포인세티아는 다른 드라이어드들과 다르게 카수스를 추적하는 데 집중하느라 바빴다. 하지만 그녀가 곳곳에 분신들을 만들어 내어 살펴도 여태 카수스에 관한 정보를 조금도 찾지 못했다.

포인세티아가 애먹는 것도 이해는 갔다. 카수스는 나보다 훨씬 오래전에 이 세계를 모험했던 사람이니 남들에게 절대 들키지 않을 은신처가 한두 개가 아닐 테지.

포인세티아가 분신을 통해 정보를 수집한다는 건 달리 말하자면 그녀의 분신이 없는 곳에 대한 정보는 알지 못한다는 것을 뜻했다. 어쩌면 카수스는 이미 포인세티아에 대해 알고 있기에 제대로 대처하고 있는 걸 수도 있다.

“미안하지만 아직 카수스에 대한 정보는 찾지 못했어. 그런데 네가 말하는 큰일에 대해선 짐작 가는 게 있어.”

“어떤 건데? 재앙급이야?”

“지도상에 존재하는 마지막 100번대 테라리움이 불의 습격을 받았다고 전해 들었어. 그곳이 무너지면 90번대까지는 금방이야. 어쩌면 이제 지도가 80번대까지로 압축될 거라고….”

“불의 습격? 테라리움이 불의 습격을 받는 건 큰일이 맞긴 하지만….”

“이것도 겨우 주워들은 이야기야. 직접 내 분신을 보내 상황을 살펴보고 싶지만 그곳에 축복받은 포인세티아가 단 하나도 없거든….”

그녀는 난처한 표정으로 말했다.

“50번대만 넘어가도 수색의 어려움이 커져. 삶이 힘들어질수록 기쁨과 행복을 믿지 않으니까. 어쩌면… 카수스는 이 점을 노려 뒤 번대에서 활동하고 있는 걸 수도 있어.”

포인세티아는 드라이어드 중 가장 뛰어난 기동성을 가지고 있는 요정 같은 꽃이었다. 그녀는 포인세티아 장식에 깃들어 마음대로 움직이거나 분신을 피워 낼 수 있었다. 굳이 생화가 아닌 모조품이더라도 그것이 가능했다.

하지만 그녀의 능력은 만능이 아니었다. 꼭 필요한 조건이 있었는데 숨뭄데이에 맞춰 기쁨과 행복의 마음을 담아 장식한 포인세티아에만 깃들 수 있다는 것이었다. 마치 요정들이 나오는 동화 같은 조건이었다.

최근 들어 숨뭄데이 풍습이 많이 잊히는 바람에 옛날처럼 요정의 축복을 기대하며 포인세티아를 장식하는 사람들이 많이 줄어든 것과 과거 전대 포인세티아가 깃들었던 장식들은 이제 사용하지 못하게 된 것이 그녀의 발목을 잡게 되었다.

더구나 하루 살기 바쁜 사람들은 굳이 숨뭄데이 풍습을 잘 지키지 않다 보니, 포인세티아는 열악한 환경이 많은 뒤 번대에 좀처럼 진입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물론 이를 알고서도 문제를 계속 방치한 것은 아니었다. 나는 포인세티아를 받아들인 이후 포인세티아 전설을 소재 삼아 아이들을 위한 동화책을 만들어 테라리움 곳곳에 무상으로 배치하는 일을 했다.

극단을 섭외하고 공연을 만들어 순회하도록 했고, 사람들의 기억 속에 다시금 숨뭄데이 풍습을 자리 잡게 만들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그러나 이미 숨뭄데이가 지나간 터라 당장 해결이 되지는 않았다.

“그럼 당장은 불의 테라리움 침입에 대한 정보를 모으는 데 집중해 줄래?”

“알겠어!”

***

먼 테라리움에서 참석하는 행정 관리원들도 많기에 소집 날짜는 5일 뒤로 잡혔다. 뒤 번대 테라리움에서는 연락을 받자마자 당장 출발해야 하는 날짜지만, 상대적으로 앞 번대들은 하루 전에 출발해도 괜찮을 정도였다. 그러니 수확제를 좀 더 챙긴 후 갈 수 있었다.

연락 문제가 아직 해결되지 않았기에 그 대비책으로 시들링이 1번째 테라리움까지 동석하게 되었다.

도착 후 여러 행정 관리원들과 인사를 나눴다.

“미미르도 어딘가에 있으려나?”

“아, 제이 님 맞으시죠? 역시나 오셨군요.”

해안 테라리움 연합의 행정 관리원들이 가장 먼저 날 알아보고 와 인사를 했다.

해일 사건이 터진 그날 이후 시간이 오래 지났음에도 여전히 영웅처럼 받들어 주는 그들의 태도에 민망할 지경이었다. 그중 31번째 테라리움의 행정 관리원인 플라멘은 나와 이미 안면을 텄다는 점을 이용해 과하게 아는 척을 하는 바람에 다른 이들의 부러움을 샀다.

동맹 사업으로 묶인 10번대 테라리움의 행정 관리원들도 만났다. 만나자마자 사업 진행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는 터라 대부분 파필리온에게 맡긴 채 거의 신경을 쓰지 않는다는 걸 들키지 않기 위해 열심히 노력해야만 했다.

18번째 테라리움의 행정 관리원인 키르켄도 그 무리에 있었다. 그는 언제나처럼 내게서 뭔가 이득을 취할 건 없는지 찾기 위해 은근하게 근황을 물었다.

“이번 세계수 가지 감사 건은 편의를 많이 봐주셔서 고마웠어요.”

“관리하는 테라리움이 하나가 아닌데 많이 바쁘신 분 아니십니까? 친한 사람끼리 돕고 돕는 거죠.”

키르켄과 나는 번호 연계법으로, 그가 우리 테라리움을 관리하는 입장이었다. 그가 정말로 우리 테라리움의 편의를 많이 봐줬는데, 재건할 때까지 감사 기간을 무한정으로 넉넉하게 잡아 준 데다 수확제를 앞두고 가지 품질 검사를 급하게 요청했는데도 군말 없이 감사를 보내 최상급 도장을 땅땅 찍어 주었다.

솔직히 저쪽이 마음만 나쁘게 먹으면 우리 테라리움의 평가를 나락으로 만들 수 있는 입장임에도, 뇌물을 요구하거나 갑질을 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물론 동맹 사업이나 여러 가지 방면에서 그에게 많은 이득을 주긴 했지만, 이를 넘어서 두 테라리움이 번호 연계법으로 끈끈한 유대감을 느끼고 있다고 생각했다.

“28번째 테라리움은 수확제 잘 진행하고 있지요?”

“제가 행정 관리원이 되고 첫 수확제인데 무척 성공적이라고 생각해요.”

“대단하다는 소리는 들었습니다. 덕분에 우리 테라리움에 올 수 있었던 잠재 관광객이 많이 줄었을 정도로요.”

“타깃은 확실히 잡았으니 다음엔 잘 피해 가세요.”

서로 농담을 주고받는 동안 26번째 테라리움의 행정 관리원도 발견해 반가운 마음에 인사를 나눴다. 내 첫 테라리움의 행정 관리원이었다.

28번째 테라리움을 얻게 되는 시작 퀘스트를 준데다 보상으로 야생종 엘더플라워를 찾을 수 있는 나비도 줬다. 26번째 테라리움엔 가드너 등급도 보유 중이다 보니 이래저래 친근감이 느껴졌다.

그는 새파란 초보 드루이드 시절에 날 만난 게 엊그제 같은데, 이젠 여기저기서 내 이름이 들릴 정도로 유명해진 데다 테라리움을 관리하는 행정 관리원이 된 것이 놀랍다며 회포를 풀었다.

새삼 내가 많은 행정 관리원들과 알고 있다는 생각에 놀라웠다. 내 세계로 치면 대부분의 시장들과 안면이 있다는 거 아냐? 내가 어디 시장과 말이야….

“미미르는 늦네. 아직 도착 못 한 건가?”

가장 만나 보고 싶었던 행정 관리원은 미미르였는데 회담이 시작할 시간이 다 되어 가도 아직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80번대 이후로는 거의 전멸이군요.”

행정 관리원들과 이야기를 하며 모든 테라리움이 참석한 건 아니란 걸 알게 되었다.

“한창 방어하느라 바쁠 테니까요. 당장은 아니더라도 80번대 라인은 발등에 불똥 떨어진 거나 다름없죠.”

“역시 다들 그 소식 들으셨습니까?”

포인세티아가 알려 준 정보를 토대로 조사한 결과, 불의 침범으로 인해 뒤 번대의 세계수 축복의 균형이 무척이나 위태로워 줄줄이 망하게 생긴 것이 진실임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이번 소집령에 80번대 이후의 행정 관리원들은 한두 명을 빼고 아예 참가하지 않았다.

참가한 사람들도 이 자리에서 도움을 요청할 수 있단 희망을 갖고 왔을 거다.

“어쩌면 이번 회담도 그 일과 관계된 것이겠지요. 곧 불에 의해 망한 테라리움들이 전체 테라리움의 반이나 되는 시점이 다가오고 있지 않습니까?”

세계의 절반이 불에 의해 망했다고 볼 수 있었다.

“세계수의 축복의 균형이 깨진다면 바로 다음 테라리움이 얼마나 빨리 영향을 받는지 다들 잘 아시지 않습니까? 80번대까지 전멸한다면 머지않아 70번대 테라리움들도 지도상에서 사라지겠지요. 언젠간 한 자릿수 테라리움들까지 위협을 받는 날이 올지도 모릅니다.”

“너무 부정적으로만 바라보시는 것 같습니다. 그동안 테라리움과 드루이드들이 가만히 손 놓고 보고만 있을 건 아니지 않습니까?”

누군가 70번대 테라리움의 멸망을 입에 담자 그 근방의 테라리움 행정 관리원들이 발끈하여 분위기가 과열되었다.

“다들 그만, 그만. 이를 위해 회담이 열린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조금만 기다려 보지요.”

하지만 누군가 말려도 한번 과열된 분위기는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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