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르신, 많이 바쁘시겠지만 잠깐 이야기 가능할까요?”
수확제로 정신없는 와중에 필라가 찾아왔다. 그가 지금 찾아올 일은 새로운 연락 시스템 개발 외에 없기에 기대되는 마음으로 그를 집무실로 불렀다.
“뭔가 진전이 있나요?”
“네, 메모리아 학장님의 연구에서 정말 많은 걸 배웠습니다. 그분이 먼저 닦아 놓은 길이 아니었다면 아직도 책상 앞에서 머리만 붙잡고 있었을 겁니다.”
“루프는 같이 안 왔어요?”
연구는 필라와 루프가 함께 진행하는 걸로 알고 있었다. 루프 역시 은근히 자신의 연구를 자랑하기 좋아하는 성격이라 이런 자리에 꼭 빠지지 않고 동행할 텐데, 찾아온 것은 필라뿐이었다.
“…….”
내 물음에 필라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시선을 회피했다. 어둠이 드리워져 있는 얼굴, 안 좋은 일이 있었다는 건데….
“혹시… 목걸이를 사 간 그날, 루프에게 고백했어요?”
“…숨겨서 뭐 합니까, 어르신이 그 자리에 있었는데. 네, 맞아요. 꽃과 목걸이를 줬는데… 거절당했어요.”
“아이고….”
괜한 걸 물었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둘의 사이가 틀어지면 협동 연구도 원활하게 진행되지 않기에 어쩔 수 없었다. 필라와 루프는 정식 연금술사가 아니었다. 다른 연구원들보다 실력이 월등하고 발상이 색다르며 풍부하다는 건 알고 있지만, 그래도 연구원과 연금술사 사이에는 간극이 존재했다.
정식 연금술사이면서 연금탑의 학장이기까지 한 메모리아도 대나무 숲을 개발하기까지 수많은 연금술사 동료는 물론, 연구원 제자들과 합동하여 힘을 쏟아야만 했다. 이와 같은 스케일의 연구를 겨우 연구원인 둘이 해내기 위해선 무엇보다도 협동이 중요했다.
개발에 필요한 인력을 지원해 주겠다고 했으나 거절한 건 그들이었기에 둘만으로 해내야 했는데….
한쪽이 고백하고 한쪽은 그 고백을 거절한 사이가 되었으니 이보다 더 어색한 관계가 있을까 싶었다.
“사실 그전에는 선물 같은 걸 주면 잘 받아 주긴 했는데 이번엔 아니더라고요.”
“이유는 들었어요?”
“…남자 친구가 생겼다고….”
“헉, 루프에게 남자 친구가 생겼어요?”
나도 모르게 짝 하고 손뼉을 치고 말았다.
루프는 어떻게 그런 이야기를 내게 안 해 줄 수가 있지? 쓸모없는 파필리온의 이야기 말고 그런 이야기를 해 주면 더 좋았을 텐데. 아니, 굳이 우리가 그런 말을 할 사이가 아닌 건가?
“누군지도 말해 줬어요?”
“단체에서 같이 활동하는 사이라는 것밖에….”
“아… 결국….”
결국 거리가 문제였다. 거리가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고 했던가.
연금탑에서 봤던 둘의 모습은 서로에게 미묘한 끌림이 존재하는 모습이었다. 물론 필라 쪽이 좀 더 강력했기에 그가 그녀를 좋아한다는 건 단번에 눈치챌 수 있었다. 루프의 경우는 애매했지만 필라를 그렇게까지 밀어내진 않는 것 같았고.
28번째 테라리움으로 함께 이주를 하고 루프의 경우 살림살이가 훨씬 나아졌으니, 필라가 노력한다면 둘이 잘 이어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한 적 있었다. 그렇기에 은연중에 관심사도 같고 성격도 잘 맞는 둘이 커플이 된다면 잘 어울릴 거라 생각했는데….
문제는 둘 다 연구원을 그만두어서 예전처럼 매일 마주칠 구실이 없어진 데다, 더구나 루프가 윤리의 지붕 활동을 하게 되면서 주 활동지를 16번째 테라리움으로 옮겨 버렸기에 더더욱 거리가 멀어지게 된 것이다.
서로를 향한 미묘한 끌림이 존재하더라도 그걸 희석시킬 수 있는 거리 차이가 존재하니, 더 마음이 적었던 루프 쪽이 눈을 돌려 버렸나 보다.
“힘내요….”
“지금은 머리를 맞대고 같이 연구해야 하는 사이이니 티를 내지 않으려 노력은 하고 있지만… 조금 힘듭니다.”
“실연당했는데 힘들지 않을 리가…. 그래도 연구에 지장이 가지 않으려 노력하는 점은 프로네요.”
“후련하게 터놓을 데도 없고. 답답해서… 그래서 말인데, 어르신은 이런 경우 어떻게 대처하시나요?”
“네?”
“좋아하는 사람에게 차이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 대처 같은 게 있나 해서….”
이건 좀 어려운 질문이었다.
“그게… 전 그다지 도움이… 음… 차여 본 적이 없어서….”
우리 사이에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세상은 너무 불합리합니다!”
갑자기 필라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그러곤 말릴 새도 없이 집무실을 뛰쳐나가 버렸다.
“단 거! 우울할 땐 단 거라도 많이 먹어요!”
그런 뒷모습을 보며 소리치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그가 들었을지는 잘 모르겠지만.
집무실 근처를 지나가던 직원이 소란에 깜짝 놀라 날 바라봤다.
“아, 별일 아니에요. 일 보세요.”
문을 닫고 자리로 돌아가다 필라가 두고 간 보고서를 발견했다.
원래 그의 방문 목적은 바로 저것이었다. 필라가 얼굴에 고민이 있다고 써 두는 바람에 예정이 달라졌지만.
“루프… 남친 생겼구나. 잘 지내고 있었네.”
난 자리에 앉아 보고서를 살폈다. 이제 막 진행 중인 사항이라서 그런지 이전에 말벌이나 기생충에 대한 보고서를 받아 봤을 때보다 분량이 적었다. 막 밑그림을 그리는 중이라는 거다.
“으음… 대나무 숲에 착안하여 드라이어드의 힘을 이용한…. 다만 이 경우 드루이드만 이용 가능할 수 있을지도 모르는 단점이 있다라…. 참고 문헌은 롬가토와 메모리아의 학술서가 대부분이네. 생각보다 드라이어드의 힘을 적극적으로 이용한 연구들이 없구나.”
이곳에서 취급하는 연금술과 드라이어드의 힘은 생각해 보면 거리가 많이 멀다는 느낌을 받았다. 애초에 연금술은 드라이어드처럼 마법과 같은 힘을 사용할 수 없는 인간들이 이룩해 낸 학문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드라이어드의 힘을 이용하려고 해도 보통의 사람들은 드라이어드와 의사소통이 되지 않으니 연구하는 데 몇 배는 더 힘이 들 테지.
드라이어드의 힘은 오직 드루이드들만이 큰 혜택을 받는 것과 달리 연금술에 매진하는 연금술사나 연구원들 중엔 평범한 사람들이 많았다. 그러니 연금술의 발전도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을 위한 쪽으로 더 많이 이뤄지고 있었다.
간혹 연금물품 중 이쪽을 위해 나온 걸 살펴보면 원저작자는 대부분 드루이드였다. 그마저도 소수가 만들어 놓은 걸 다른 이들이 조금씩 변환하여 개발하는 방식이었는데, 발전이 부진한 또 다른 이유를 꼽자면 드루이드면서 연금술까지 병행하는 이들이 많이 적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면 드루이드가 굳이 연금술 공부를 위해 연금탑에 처박혀 얻을 이득은 많이 없었다. 드루이드는 드루이드로서 활동해야 득이 더 많았다. 이 세상이 지나치게 드루이드들에게 친절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편으론 드루이드가 드루이드로서 활동하지 않을 경우 그다지 좋은 인상을 받기 어렵다는 뜻이기도 했다.
드루이드로서 꼭 지켜야 할 사명이 존재하고 이걸 세상 모두가 알고 있기 때문에, 사명에 맞게 불을 해치우고 여행을 다니지 않는 이들은 직무 유기를 하고 있다는 인상이 생기기 쉽기 때문이다.
16번째 테라리움의 연급탑에서 일어났던 일로 인해 벌어졌던 일련의 사건들을 생각해 보면, 연금술이 드라이어드를 대하는 데 약간 금기를 건드는 것처럼 어려워한다는 인상도 받았다.
특히나 세계수를 가장 충실히 섬기는 1번째 테라리움의 경우, 메모리아가 개발한 대나무 숲을 시범 설치하는 데 적극적으로 반대했었다.
이를 통해 메모리아가 말하길, 1번째 테라리움이 연금술이 주는 혜택을 누리고 있으면서도 연금술을 불성하게 여기고 있다는 이야기를 했었는데, 창조는 세계수의 권능이지 인간이 이를 누리려 하는 걸 지나치게 경계한다는 뜻이었다.
연금을 하는 이들이라면 모두 게재되길 꿈꾸는 가장 저명한 연금학술지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가장 앞장서서 연금술을 탄압하려는 게 1번째 테라리움이라니. 참 아이러니했다.
필라의 보고서를 마저 읽었다.
“흠, 드라이어드의 힘을 이용한 연락 전달 시스템이라…. 드라이어드에겐 다양한 힘이 존재하지만 그중 감지 능력에 집중한다. 거리가 멀더라도 아군의 위치를 정확히 알아차리고 숨겨진 물체를 탐지해 내거나 위험을 감지한다는 점에서 우리가 필요로 하는 모든 요소를 갖추고 있으며….”
바로 떠오르는 드라이어드들이 있었다. 이리스 파티가 벌을 이용하기 전엔 제퍼가 가진 도깨비바늘 드라이어드를 수신기로 이용했었다.
도깨비바늘은 뾰족한 가시 같은 열매를 어느 곳에나 부착시킬 수 있는데 거리가 너무 멀지 않다면 열매가 부착된 생물을 전부 감지해 낼 수 있었다.
이리스 파티는 이를 이용해 수색 임무에서 각자 떨어져 이를 수행해야 할 때, 서로의 거리가 너무 멀어져 능력이 끊기면 합류하거나 혹은 일부러 열매를 없애서 신호를 주는 용도로 사용해 왔었다.
뚜렷한 메시지를 전달할 수는 없으나 단순하면서도 가장 직관적인 연락 방법인 것이다.
드라이어드의 힘을 이용해 자신들만의 연락 방법을 만들어 냈다는 점에서 필라와 루프가 하는 연구와 어느 정도 맞닿아 있었다.
도깨비바늘 외에도 직접 곤충이나 동물을 부려 멀리 연락을 보내는 드라이어드도 존재했고, 같은 종끼리 생각을 공유하는 드라이어드도 존재했다. 드루이드 이용하기 나름으로 벌을 대신할 연락 방법으로 쓸 수 있었다.
“중요한 건 감지 능력이 우수하면서도 비교적 흔히 볼 수 있는 종의 드라이어드가 필요하다는 건데, 아무리 감지 능력이 좋더라도 일생에 단 한 번 볼까 말까 한 드라이어드라면 연구에 적합하지 않다.”
연락을 하기 위해선 양쪽 모두 수단을 보유해야 하는데, 만약 유니크 등급의 드라이어드가 필요하다면 수월한 이용이 불가능했다.
보고서에는 논의 결과 내가 보유한 노멀 등급의 민들레 드라이어드가 새로운 연락망을 구축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될 것 같다고 쓰여 있었다. 마침 가까운 곳에 거대한 민들레 군락지 또한 존재하니 딱 좋았다.
민들레에게도 도깨비바늘처럼 독특한 감지 능력이 있었다. 민들레 꽃씨를 형상화한 빛 가루를 날려 상당히 광범위한 지역을 탐색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꽃씨가 물체가 아닌 힘의 결정체이다 보니 장애물도 통과할 수 있었다.
필라와 루프는, 대나무 드라이어드를 통해 연상을 전달하는 방식과 비슷하게 접근한다면 민들레 드라이어드의 힘을 이용해 벌이 전달하던 것보다 훨씬 많은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을 거라고 보는 듯했다.
민들레 드라이어드들이 벌을 이용하지 못하는 나를 위한 돌파구가 되어 줄 수도 있다는 생각에 기분이 한껏 좋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