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09화 (509/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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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들링과의 짧은 산책을 뒤로 하고 28번째 테라리움에 마련된 내 집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곧바로 집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작게 딸린 뒷마당으로 향했다. 한밤중인 터라 주변이 고요했다.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진중한 이야기를 하기에 최적의 시간이자 장소였다.

조금은 오랫동안 마음을 가다듬은 후, 모든 드라이어드들을 제쳐 두고 단 한 그루의 드라이어드를 불러냈다.

“엘더.”

이번에도 메스키트가 대신 나와 방해를 놓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으나, 다행히 밖으로 나온 것은 엘더 혼자였다. 그의 표정은… 말도 못 하게 죽을상이었다.

울었던 게 분명하다. 눈가가 새빨갰다. 예쁜 미모가 빛이 바래질 정도로 초췌했다.

엘더를 보니 가슴속이 커다란 바위로 턱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

아티팩트 안에서 모든 걸 보고 있었겠지. 메스키트가 가로막는 와중에도 아티팩트는 세차게 진동했었다.

이래서… 위험하다는 거다. 드라이어드는 언제 어디서나 함께해야 한다. 매일 얼굴을 봐야 한단 말이다. 그런데 벌써부터 그의 얼굴을 보는 게 힘들다는 생각이 들다니.

정말로 있을지도 모르는 미래에 우리의 관계가 망가진다면… 그렇다면 난 엘더를 아티팩트 밖으로 부르지 못하는 순간까지 올 수 있지 않을까? 상상만으로도 끔찍하다.

“엘더… 이미 알겠지만 그래도 너에게 직접 할 말이 있어.”

너를 향한 내 마음이, 나를 향한 네 마음이 희석될 수 있을지 시험을 해 보기로 했어.

“미안해. 내 잘못이야.”

바다 깊숙한 곳까지 잠겨 버린 듯한 축축한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지만 애써 참는 듯했다. 아니 이미 너무 울어 버려서 더 이상 내보낼 눈물이 없는 걸지도 모른다.

“잘못은 없어. 오히려 내가 너에게 못 할 짓을 했어.”

“아냐. 꼭 필요한 일이었어. 옳은 선택이야.”

옳은 선택이라고? 너를 선택할 수 없어 다른 선택을 한 것이 옳은 선택이라고.

엘더는 고개를 푹 숙인 채 날 바라보지 못했다. 나 역시 눈을 마주하고 이야기할 자신이 없었기에 애꿎은 땅만 바라봤다.

“애초에 드러내선 안 됐어. 무슨 일이 있어도 들키지 않았어야 했어.”

그건 불가항력이었다. 수많은 자물쇠를 걸어 잠근 그의 마음이 강제로 열려 버렸다.

“엘더….”

도무지 그것이 죄라 생각되지 않는데도 크나큰 죄책감을 갖는 엘더를 보기 힘들었다.

“모두 나의 잘못이 맞아. 네가 불완전한 마음을 갖고 흔들리게 만들었어. 난 드라이어드면서 네 마음을 지키지 못한 거야. 그러니 너에겐 내 마음을 멀리할 시간이 필요해.”

시간이 필요하다는 말은 메스키트와 같으나 의미는 달랐다.

“최선을 다해 줘.”

마침내 엘더가 얼굴을 들어 날 마주했다.

“그 드루이드와 함께하는 시간 동안 최선을 다해 줘. 내가 있고 싶었던 그 자리에 선 자를 죽을 만큼 미워하지만.”

아드득, 이가 꽉 다 물리는 소리와 함께 엘더의 턱 근육이 크게 수축했다. 미워한다는 표현은 그의 입장에서 굉장히 순화된 표현이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미움이 오롯이 내 감정인지 확신할 수 없어서 자괴감이 들어. 그러니 최선을 다해서 확인해 줘. 이 감정이 진짜인지 아니면 흉내 내는 것에 지나지 않는지.”

엘더가 자신의 감정을 의심하게 된 건 메스키트의 개입이 확실해 보였다. 내게 자신의 마음을 고하는 순간엔 단 하나의 의심도 보이지 않았었다.

“최선을… 다할게.”

“지금도 너의 곁에 서고 싶고 널 만지고 싶고 안고 싶어.”

엘더가 조심히 내 곁으로 다가왔다.

“인간이 되고 싶어, 제희야. 그럼 아무 고민 따위 없었을 텐데. 내가 그 드루이드와 같은 인간이었다면 열렬한 사랑을 맹세하는 붉은 장미꽃을 네게 줄 수 있었겠지.”

그는 아주 조심스러운 손길로 내 왼팔을 붙들었다.

“네 감정이, 우리의 감정이 진실된 거라 확인된다면 난 붉은 장미꽃이 아닌 네 꽃을 줘도 괜찮아. 네 꽃말은 열중이잖아? 네 꽃 역시 마음을 표현하는 데 부족함이 없다고 생각해.”

드라이어드는 인간과 다를 바 없는 모습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고려해야 할 것이 너무 많다. 하다못해 그 마음까지도 의심해야만 하다니.

“먼 훗날 내 마음이 거짓이었다 증명될 날이 올 수도 있겠지만, 지금만큼은 이 마음으로 널 품에 안아 봐도 될까? 마지막으로. 이 마음이 진실이라고 여겨지는 순간에.”

난 아무 말 없이 엘더의 품에 안겼다. 새하얗고 보드라운 천 조각이 볼에 비벼졌다. 그는 숨 막히도록 날 끌어안고 내 머리에 입을 맞췄다.

“오늘이 마지막이야. 더 이상 널 불편하게 만들지 않을게. 고민하게 만들지 않을게. 네가 원래 알던 엘더 플라워로, 언제나와 같았던 엘더 플라워로서 널 대할게. 소중한 우리들의 드루이드. 나의 드루이드….”

그날 밤, 우린 77번째에서 일어났던 그 일을 마음속 깊숙이 묻어 두기로 약속했다. 애초에 시작하지 않았던 것처럼. 우리의 감정은 그를 열매에서 개화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큰 변동이 없었다는 것처럼. 그건 엘더의 큰 바람이기도 했다.

이야기를 끝낸 엘더는 곧바로 아티팩트로 돌아갔다. 난 아티팩트를 말없이 바라보다 집으로 들어갔다. 샤워를 하고 침대에 누울 때까지 머리가 멍했다. 마치 술을 잔뜩 마신 것처럼 생각이 둔해진 기분이었다. 그날 밤은 한숨도 자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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