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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 연애를 시작했지만 느긋하게 이를 즐길 여유는 없었다. 난 여전히 바빴다.
그저 나와 시들링의 관계가 재정립되었을 뿐 크게 달라지는 건 없었다. 아니, 이로 인해 나를 힘들게 하던 문제 하나를 반강제로 내려놓을 수 있게 되었으니 조금은 여유가 생겼다.
수확제 준비를 위한 회의가 날이 어두워질 때까지 계속되었다. 다들 집중력이 흐려진 터라 다음날로 안건을 미루고 자리를 파했을 때 불청객이 찾아왔다.
귀가하기 전, 시들링과 밤 산책이라도 할까 했는데 웬 장미가 가득 담긴 꽃바구니가 앞을 막았다.
16번째 테라리움에 있어야 할 파필리온이었다.
“나의 블랙 릴리.”
“넌 또 왜 왔어?”
“그렇게 매몰차게 말하면 상처받아. 레드 데이잖아? 당연히 내 사랑을 표현해야지.”
공작새처럼 잔뜩 치장하고 나타난 파필리온은 언제나처럼 방정맞게 굴었다.
“별장 사 줬잖아.”
“뭐 사 달라고 온 거 아니야. 진짜 장미 주려고 왔다니까? 그대, 내 마음을 의심하는 거야? 물론 더 사 준다면 거절하진 않아.”
그가 뻔뻔하게 말했다. 더 사 달라고?
“이제 너한테 다이아 안 써.”
파필리온은 그 어떤 때보다도 상처받은 표정을 했다.
“뭐야,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어? 내 얼굴에 질렸어? 오늘 평소보다 더 힘줬는데. 요즘 연금탑의 에스테틱 분야 물품을 구독하고 있어서 관리에 얼마나 열심인데. 더 잘생겨졌으면 잘생겨졌지, 내 외모가 퇴보하진 않았을 텐데.”
“넌 어떻게 그런 말을 부끄러움 없이 해?”
“열심히 날 가꾸고 있다는 걸 어필해야 네가 기특해서라도 데리고 있어 줄 테니까?”
저 요사스러운 나비 자식이.
“자, 내 사랑을 받아 줘.”
파필리온이 들고 온 장미 바구니를 내게 내밀었다.
“장미라면 이미 받았어. 그리고 이젠 더 받을 마음 없어.”
시들링이 줬던 꽃다발을 꺼내 보이자 파필리온의 눈에 경악이 가득 찼다.
“누구야?”
놀란 파필리온은 이내 경악한 눈으로 시들링을 바라봤다.
“설마… 아니지?”
“왜 아닐 거라 생각하는데?”
여봐란듯이 슬쩍 시들링에게 팔짱을 끼자 파필리온이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더불어 시들링의 팔 근육이 바짝 굳는 게 느껴졌다. 나도 모르게 그 두툼한 팔에 안정감이 느껴져 좀 더 바짝 끌어안고 말았다.
“대체 왜?”
“무슨 질문이 그래?”
“적어도 내가 시들링보다는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으니까. 설마 날 떼어 내려고 연기하는 거면 진실을 말해 줘. 나 진짜 상처받아.”
주물주물, 무의식적으로 손안에 가득 담기는 팔을 주무르다 황급히 멀리 떨어졌다. 와, 깜짝이야.
“연기 아니야. 너처럼 시들링도 레드 데이라서 내게 장미꽃을 줬고 난 그 마음을 받아 줬을 뿐이야.”
“전혀 마음이 없던 거 아니었어?”
파필리온은 마치 세상이 무너진 것처럼 놀라움과 불신을 가득 담은 표정을 했다. 갑자기 애쉬가 등장했을 때보다 더했다.
“한결같이 마음을 들이미니 넘어간 거지, 뭐.”
“들이대는 건 내가 더 열심히 하지 않았을까 하는데.”
“넌 너무 가벼워 보여서 별로. 애초에 너도 그다지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았잖아? 내가 필요하다기보단 내 부와 명예가 필요한 거 아녔어?”
“크게 반박은 못 하겠군. 그렇다면 세컨드 자리는 있어? 그대 같은 여자가 설마 한 명으로 만족할 거야? 어떤 드루이드는 공식적인 애인만 10명이 넘는다는데 그대는 딱 한 명만 더 욕심내는 건 어때?”
“꺼져.”
갑자기 나타나서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껄이는 파필리온이었다. 그래도 방정맞은 그로 인해 어쩐지 시들링과의 연애를 좀 더 마음 편히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 저런 놈과도 한때는 연애 관계를 상상했던 적이 있으니 뭐.
파필리온을 무시한 채 가던 길 가려는데 그가 끈질기게 달라붙었다.
“딱 한 자리만 더.”
“개소리하지 마. 애인은 하나로 끝이야.”
“비밀 연애 같은 거 있잖아.”
“시들링이 옆에서 듣고 있는데 무슨 비밀이야.”
“이렇게 끝낼 순 없어. 앞으로 수많은 별장과 보트와 사치품들이 죄다 저 녀석 거라는 거잖아!”
마치 비련의 주인공처럼 표독스럽게 소리친다.
“애초에 네 것이었던 적 없어! 당장 16번째 테라리움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예산 깎아 버릴 줄 알아.”
“쳇.”
저 탐욕, 따지고 보자면 예쁜 얼굴과 밑도 끝도 없는 탐욕만 놓고 보면 엘더의 인간 버전이라 볼 수 있는 파필리온인데 왜 쟤는 엘더만큼 정이 가지 않을까? 질투가 많고 떼를 쓰는 것도 엘더와 많은 부분 닮아 있는데.
툭. 툭툭.
겨우 파필리온을 떼어 놓고 길을 걷고 있는데 왼쪽 팔이 무언가에 계속 걸렸다. 시들링의 팔이었다. 보통 우리가 나란히 걸을 때면 우리 사이에 적당한 간격이 존재했는데, 지금은 무척이나 가까운 데다가 시들링의 팔이 슬쩍 내 쪽을 향해 벌려져 있어서 자꾸만 부딪힌 거였다.
의식적인지 무의식적인지. 내가 팔짱을 꼈던 그의 오른팔이 은근슬쩍 재연을 원하는 모양새를 보니 갑자기 웃기면서도 아무렇지도 않게 그의 팔을 끌어안았던 게 떠올라 부끄러움이 밀려왔다.
그런데 다시 팔짱을 낄 용기는 나지 않았다. 그래서 살짝 거리를 벌린 채 걸었다.
관계의 재정립이 일어난 지 겨우 하루가 지났을 뿐인데, 단둘이 걷는다는 것만으로도 분위기가 다르게 느껴졌다.
우리 사이가 여기까지 왔다는 사실이 새삼 놀라웠다. 시들링과의 첫 만남을 생각해 보면, 그때 당시는 더는 만나고 싶지 않을 끔찍한 사람처럼 여겼었지. 그 후 16번째 테라리움에서 다시 만나고 함께 여러 모험을 겪었을 때도 전혀 생각하지 못했었다.
그래서 솔직히… 아직도 잘 믿기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