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07화 (507/604)

메스키트의 행동에 한동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분명히 그녀답지 않은 행동이었으나 그녀가 하는 행동은 결국 전부 날 위한 것이었다. 그녀는 날 보호하고 있었다. 육체를 넘어서 내 마음까지.

“실새삼이… 드라이어드들이 내 감정을 똑같이 따라 하는 것이라고 그랬어. 메스키트도 그렇게 생각하는 거지?”

“실새삼치고 옳은 말을 했네요. 그래요. 우리의 감정의 근원은 제희예요. 제희가 좋으면 우리도 좋고 제희가 싫으면 우리도 싫어요.”

연애 관계는 영혼의 연결의 하위 호환, 마음과 영혼을 공유하는 드루이드와 드라이어드의 관계와 비교하자면 사랑은 단계가 낮다는 실새삼의 말이 떠오른다.

“거절하려는 이유가 그 녀석 때문이라면 다시 생각해 봐요. 시간을 두고 아주 오래오래 생각해요. 그리고 실새삼의 말에 제희가 완벽하게 반박할 수 있게 된다면… 당신의 마음속에 단 하나의 의문도 존재하지 않게 된다면 그땐 나서지 않을게요.”

메스키트의 손이 아티팩트를 더욱더 꽉 쥔다.

“드루이드와 드라이어드는 가장 완전한 관계예요. 제희가 불완전한 마음으로 도전한다면 인간 사이의 관계 역시 불완전하니 일이 실패한다면 끝을 고할 수 있어요. 하지만 우리들의 관계에 끝은 존재할 수 없어요. 실패가 용납될 수 없어요. 불완전한 마음으로 완전한 관계에 도전해선 안 된다는 거예요.”

드루이드와 드라이어드 사이의 관계에서 끝은 둘 중 하나의 죽음이나 다름없었다.

“이건 그 녀석이 잘못한 일이에요. 그렇게 멍청할 줄 알았으면 묶어서라도 세계수의 품 안에서 더 성장하고 더 배우고 오도록 만들었을 텐데. 더 엄하게 가르치지 못한 제 죄도 크네요.”

엘더가 조심성 없이 제 마음을 뿌리고 다녔던 것이 아니다. 전대 노멀 필드 가디언이 욕망을 부추기는 행동만 하지 않았어도, 어쩌면 우리의 여행이 끝날 때까지 엘더는 그 마음을 계속 숨길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제희의 모든 결정을 응원해 주지 못해서 미안해요.”

아티팩트가 덜덜 떨릴 때쯤 메스키트가 아픈 눈을 하고 돌아갔다.

“미안. 내 드라이어드가….”

“네가 내게 미안할 일은 없다.”

시들링을 바라봤다.

내가 시들링과 사귀게 된 뒤 엘더의 감정에 조금이라도 변화가 생긴다면 실새삼의 말이 맞음을 증명하게 되는 거겠지. 결국 내 감정을 따라 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 거니까.

더 나아가 내가 엘더를 잊고 완전히 시들링을 사랑하게 된다면 내 마음이 불완전함을 증명하게 되는 걸 테고. 결국 엘더가 아니어도 됐다는 거니까.

“메스키트는 네가 앞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무례한 행동을 했어. 사과받아야 할 일이 맞아.”

“내 드라이어드들이 계속해서 그래 왔으니 무례하다고 느끼지 못했다. 그러니 괜찮다.”

“네 드라이어드들이 극성이긴 하지.”

잠깐의 웃음과 오랜 침묵.

“사실… 네 고백을 거절하려고 했어.”

“…예상은 했었다.”

“내가 거절할 걸 알고 있었다고?”

이미 거절을 예상했다는 그의 말은 덤덤했다. 거절에 익숙하다는 말투였다.

“내가 널 보는 눈과 네가 날 보는 눈은 다르니 그럴 거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거절하려고 했다는 건 마음이 바뀌었다는 건가? 메스키트 때문인가?”

“어쩌면 내 안에 뭔가 변화가 생겨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야. 너에게 먼저 말해야 할 게 있어. 나 마음이 가는… 존재가 있어. 너의 고백을 거절하려 했던 것도 이 때문이야.”

“혹시 드라이어드인가?”

고개를 끄덕이자 곧바로 그가 되묻는다.

“메스키트인가?”

“그건 좀 색다른 해석인데.”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나왔다.

“메스키트는 아니고…. 그런데 이상하지 않아? 그… 사람이 드라이어드를 좋아한다는 거잖아. 네가 날 좋아하는 것과 같은 마음으로 말이야. 다들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던데.”

내 물음에 시들링은 생각에 잠긴 듯 잠시 침묵했다.

“난 이상하다고 말할 수 없다. 너도 알다시피 난 드라이어드에게 길러졌다. 그렇기에 내게 부모는 사람이 아닌 드라이어드지. 난 그 드라이어드에게 종을 넘어서 자식이 부모에게 느끼는 감정을 느끼고 있다. 이 또한 평범하다고 볼 수 없지 않은가?”

시들링 말고 드라이어드를 부모라 생각하는 사람이 또 있을까? 그의 서사를 모르고 단면만 놓고 본다면 이상한 일로 치부될 수도 있을 것이다.

“마음에 진실과 거짓은 없다고 생각한다. 내가 드라이어드에게 길러져 드라이어드를 부모라 생각하는 마음이 생겼듯 너에게도 드라이어드를 사랑하는 마음이 생길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다고 본다. 그러니 난 너를 이상하다고 말할 수 없다.”

처음으로 다른 말을 해 주는 이가 나타났다. 그건 이상한 일이 아니라고.

“그렇지. 그렇네.”

어쩐지 위로가 되기도 했다.

“맞아. 난 드라이어드를 좋아하고 있어. 회양목이라고 했지? 널 키운 드라이어드. 네가 그 회양목에게 자식의 마음을 가졌던 것처럼 회양목도 너에게 부모의 마음을 가졌을까?”

“날 묘목으로 생각하고 길렀다.”

“그래, 하지만 사람의 자식을 묘목이라고 부르진 않잖아? 드라이어드가 묘목을 보살피는 것과 사람이 자식을 키우는 것엔 차이가 존재할 거야. 마음에서도. 그 차이, 그 차이 때문에 고려해야 될 것이… 너무 많아.”

머리가 복잡하다. 차라리 마음을 자각하기 전으로 돌아가고 싶을 정도였다.

“사랑에는 끝이 존재할 가능성이 있어. 하지만 드루이드와 드라이어드의 관계에서 끝이란 존재하지 않아. 죽음뿐이잖아? 그러니 섣불리 도전해선 안 된다는 메스키트의 말을 이해해. 망가질 가능성이 있다면 아예 시작도 하지 말아야 한다는 거지. 그래서… 그래서 너의 마음을 이용할까 해.”

죄책감에 얼굴이 붉어졌다.

“네가 싫진 않아. 분명 네 고백에 설레기도 했어. 하지만 내 마음에서 네가 차지한 부분이 아직은 너무 작아. 메스키트의 말처럼 시간을 가져 보려고 해. 그 시간을 너를 좋아하려고 애쓰는 데 사용할게. 결국 내가 드라이어드를 좋아하는 마음을 잊어버리고 널 좋아하는 마음이 굳어져 버린다면, 드라이어드의 감정에 대한 확신이 끝까지 생기지 않는다면, 망가질 가능성 따위 완전히 사라지는 거겠지.”

시들링을 온전히 바라볼 수 없었다.

“내가 이런 의도를 가지고… 나의 다른 감정을 시험할 의도를 가지고 네 고백을 받아들인다고 해도 괜찮겠어? 아니, 이제 선택권은 너에게 있어. 무례하다고 거절해도 좋아. 어이없겠지. 이건 너무 경우에….”

“너와 함께할 수 있다면 의도가 어떻든 상관없다. 결국 나를 좋아하려고 애쓰겠다고 하지 않았는가?”

시들링의 너무 빠른 대답에 오히려 당황한 건 나였다.

“난 너를 이용하는 거야.”

“얼마든지 이용해도 상관없다. 차라리 다른 이가 아닌 나를 이용해라. 네가 가능성을 시험해 봄으로써 내게도 가능성이 생긴 게 아닌가? 네가 어떤 말을 하든 너를 좋아하는 마음에는 변화가 없다. 그러니 난 내 고백을 받아 주겠다는 너를 거절할 생각이 전혀 없다.”

당황함을 넘어 신기한 기분까지 들었다. 이렇게까지 날 좋아한다고?

온갖 감정이 휘몰아치며 가슴을 세차게 뛰게 만든다. 미안해, 엘더. 시간을 조금만 갖자.

고백 이후 우린 충실하게 데이트 시간을 보냈다.

그렇다면 오늘부터 우리 사귀게 된 거겠지? 연애는 정말 오랜만이었다. 인식을 달리하자 매 순간이 낯설어져 오히려 어색해졌다. 연애… 어떻게 하는 거더라?

꽃다발을 품에 안고 시들링과 나란히 과수원으로 돌아가자 이리스와 제퍼가 미어캣처럼 목을 쭉 빼고 입구에서부터 우릴 기다리고 있었다. 어떻게 된 거냐며 꼬치꼬치 캐묻길래 말없이 시들링의 어깨에 살짝 기대자 입을 틀어막고 비명을 질러 댔다. 그렇게 재밌나 싶었다.

하필이면 이 작은 스킨십만으로도 시들링의 얼굴과 몸이 딱딱하게 굳어 버려 이리스와 제퍼의 호들갑에 더욱 불을 붙였다.

“와… 와….”

“무슨 일이 있었는지 더 자세히 이야기해 주시면 안 돼요? 네?”

그런 둘을 무시하고 회의실로 돌아갔을 때쯤, 병실에서 로웰라가 탈주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당분간 로웰라를 피해 다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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