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에스코트를 받아 식당 안으로 들어가니 가게 안의 사람들이 전부 이곳을 바라봤다. 그들의 입장에선 거대한 꽃다발이 걸어 들어오고 있는 것처럼 보일 테니 당연했다. 상당히 쪽팔려 꽃다발에 얼굴을 숨기고 눈에 보이는 아무 자리에 가서 앉았다.
가게는 노부부 둘이서 운영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레드 데이 이벤트 주간에 맞춰 발 빠르게 가게를 장식하지 못한 듯했다. 손님들의 나이대도 높아 보였다.
어쩌면 이곳은 노부부 주인장의 또래 지인들이 식사를 해결하며 하루 일과를 소소하게 주고받는 작은 회관 같은 역할을 하는지도 모른다. 시들링에겐 안됐지만 데이트 장소로는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 분위기긴 했다.
“…….”
메뉴를 고르는 동안에 우린 아무 말도 없었다. 어색한 침묵이 이어지는 와중 메뉴에 적힌 오트밀 포리지를 발견했을 땐 그에 대한 안타까움이 극에 달해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파는 음식들도 죄다 분위기 내기 어려운 소화가 잘되는 아침 식사 같은 것들뿐이었다.
지금이라도 네가 예약한 식당에 가자고 할까? 그럼 어떤 타이밍에 말을 꺼내야 하지? 아니, 내가 굳이 시들링에게 맞춰 줄 필요가 있나?
수없이 많은 고민을 하고 있는 사이 얼렁뚱땅 메뉴가 정해지고 음식이 나왔다. 그동안 살뜰히 입을 여는 건 우릴 제외한 다른 사람들뿐이었다.
시들링은 생긴 것과 다르게 제법 수다스러운 편이었다. 그러니까 나와 이야기하고 싶어 안달 나서 보통은 일방적으로 말을 계속 내뱉는 편에 가까웠다. 그런 그가 한마디도 하지 않은 채 조용했다. 예상 가는 이유가 있었다.
아까 드라이어드들이 연습이네 뭐네 했었지? 지금 연습한 상황과 다르게 흘러가서 고장 난 거다.
“연인인가 보네.”
“지금쯤이면 젊은이들이 그런 걸 챙기지 않나?”
“내 정신 좀 봐. 그럼 우리 손녀가 곧 방문할 수도 있겠군! 난 먼저 돌아가겠네.”
“손녀가 드루이드라고 했지? 부럽구먼.”
도란도란, 어르신들의 이야기가 라디오처럼 흐르는 와중에 결국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어떤 의미로 내게 장미꽃을 준 건진 알고 있지…? 레드 데이에 주는 꽃이 좀 특별하잖아?”
“그다지 특별할 건 없다. 본래 붉은 장미꽃의 꽃말도 열렬한 사랑이니 기념일에 가장 잘 어울린다.”
열렬한 사랑. 그러니까 쟤 이야기는 내게 열렬한 사랑의 의미를 담긴 꽃을 주는 게 그다지 특별할 것 없는 일이라는 건가?
“그게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에게 주는 거잖아…. 연인이든 아니든. 후자의 경우 이런 날에 그 꽃을 주는 건… 정식 고백이야. 넌 지금 남들 앞에서 내게… 열렬히 사랑한다고….”
내가 말하면서도 부끄러워 끝내 말을 다 잇지 못했다.
“알고 있다. 내 마음을 전할 수 있는 때가 왔다면 전해야 한다고 생각했기에 네가 생각한 대로 의미를 알고 준 것이다.”
“…….”
사랑 고백. 시들링의 사랑 고백은 마치 아무렇지도 않게 기회가 된다면 주저 없이 마음을 내비치는 것이었다. 최적의 순간을 기다리며 마음 졸이는 것 따윈 없었다.
누군가의 고백은 은근한 분위기를 이끌어 이성을 유혹하는 것이었고, 누군가의 고백은 숨겨 왔던 풋풋한 마음을 단둘이 있을 때 용기를 내 조심히 내보인 것이었으며, 또 누군가의 고백은 들키는 게 두려운 죄악으로 품다 고해를 하듯 울면서 겨우 토해 낸 것이었다.
이들에 비하면 시들링은 부끄러움도 주저함도 없었다. 너무나 담백해서 오히려 평범한 일상 이야기를 하는 듯했다.
따지고 보면 이건… 시들링의 두 번째 고백이기도 했다. 라줄리와의 결혼식 사건 때도 그는 내게 마음을 고백했고 그때도 지금처럼 이야기 도중 자연스레 튀어나왔던 것이다.
“하…. 혹시 네가 내게 꽃말로 이야기했던 거 기억 나? 그땐 네가 말하기 어려워 꽃말로 이야기했었잖아. 라그라스와 백미꽃이었던가?”
지금 그날의 일이 떠올랐던 건, 적어도 그가 지금 이 순간과 달리 어려워하고 망설인 순간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너와 한 이야기는 모두 기억한다.”
시들링은 기억력이 나쁜 편이었다. 사실 관심 없는 것은 지나치게 빨리 잊어버린다는 거에 가까웠다.
사람 얼굴과 이름을 잘 기억하지 못하는 데다 로웰라가 그에게 한 말도 종종 까먹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더쉬맨을 기억하지 못했으나 그날 내가 누군가와 결투를 벌인 건 기억하는, 아주 특이한 기억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땐 꽃말을 알려 주지 않았잖아. 지금은 알려 줄 수 있어?”
시들링은 느리게 내 질문에 답변했다.
“라그라스는 너의 친절에 감사하다는 뜻이고.”
그 꽃은 우리의 만남을 시들링의 입장에서 대변한 꽃이나 다름없었다.
“백미꽃은 너의 곁에 머물고 싶다는 뜻이다.”
그 꽃은 우리 사이에 대한 시들링의 바람이었다.
사실 말하기 어려워하고 망설였던 것이 아니다. 내가 꽃말의 의미를 알고 있다면 단숨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는 그때도 지금처럼 마음을 내비치는 걸 주저하지 않았던 것이다. 방식이 어려워 좀 더 명확히 뜻을 전할 방법을 택했던 거다.
지금과 다를 바 없는 돌직구. 차라리 어떤 이들에겐 이런 방식의 고백이 훨씬 나을지도 모르겠다. 상대방의 진심에 의심이 들지 않도록 만드니까.
시들링의 마음은 장미의 꽃말처럼 열렬했다. 그리고 그동안 내가 회피했음에도 불구하고 변함이 없었다. 어찌 보면 시들링과 가장 잘 어울리는 고백법이란 생각이 들었다.
진한 이성의 향기를 뿌리는 그의 고백에 조금도 동요가 되지 않는다면 거짓말이었다. 오히려 강철 화살처럼 날아온 그의 마음이 내 가드를 뚫어 버린 느낌이었다.
그의 방식에 동요되어 덩달아 나 또한 그의 고백을 점점 어렵지 않게 여기는 기분이 들었다.
어쩌면 우리 둘의 관계가 가장 이상적인 그림을 그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 또래에다 같은 직업을 가진 동료에 정석적인 만남. 내가 가장 원하는, 함께 동행하는 연애를 실현시켜 줄 수 있는 존재.
나이 차가 많이 나는 것도 아니고 대립적인 집단에 몸을 담았던 것도 아니며 종이 다른 것도 아니다. 함께 어려움을 이겨 낸 경험이 많고 함께한다면 서로에게 시너지를 줄 수 있었다.
그는 나의 드루이드 멘토가 되고 나는 그에게 정신적인 안정을 제공한다. 주변이 보기에도 나쁘지 않기에 숨길 필요도 없으며 오히려 내보인다면 축복을 받겠지.
시들링은 마치… 가장 고르기 부담 없고 쉬운 공략 루트 끝에 서 있는 서브 엔딩 같았다.
나는 꽃말에 대해 들은 이후로 말없이 물잔 속을 스푼으로 휘저었다.
상대는 내게 자신의 마음을 모두 내비쳤다. 그러니 나 역시 그에 맞는 반응을 보이는 것이 예의였다.
“난….”
애석하게도 내가 가장 마음이 가는 루트는 어찌 보면 가장 어렵고 장애물이 많은 루트였다. 종도 다르고 주변에서 이해할 수 없다는 눈으로 볼 확률이 매우 크며 반향을 일으킬 수도 있는 관계.
모든 것이 완벽하게 환영받는 관계와 대립되니 더욱더 대조적으로 느껴진다.
언제나처럼 답변을 보류하는 방법도 있었다. 내가 가장 잘하는 일이기도 했다. 최선의 선택을 할 수 있는 순간까지 중요한 결정을 미루는 것 말이다.
더구나 시간 제한이 없다면 더욱 거리낌이 없었다. 그리고 매 순간 곧바로 답을 내야 살아남는 치열한 이 모험의 세계 속에서 가장 질질 끌고 있는 사안이기도 했다.
하지만 더는 그럴 수 없었다. 그건 계속 시들링에게 여지를 남기며 답을 기다리는 그를 고문하는 것과 다름없으니까.
그러니 지금은….
파앗!
중요한 답변을 앞둔 그때, 갑자기 내 아티팩트가 빛을 발했다. 드라이어드의 난입이었다.
그리고 그건 놀랍게도… 메스키트였다.
“메스키트…?”
그녀의 등장에 식당에 잠시 소란이 일었다.
메스키트는 소환된 직후 자리에 앉은 시들링을 무미건조한 눈으로 내려다보더니 이내 내 옆자리의 의자를 내어 자리에 앉았다.
그녀의 등장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더구나 이 상황에서 가장 볼 일 없는 존재라 생각했고.
사실 아티팩트에서 빛이 났을 때, 난 엘더가 난입하는 것이 아닌가 싶었다.
그는 아티팩트 안에서 모든 일을 지켜봤고 이성들이 내게 고백하는 순간 자신의 처지를 대입하며 질투했노라 내게 말했었다. 그러니 시들링과의 관계를 정립하는 중요한 이 순간, 내가 그를 선택할까 봐 겁먹은 엘더가 뛰쳐나온 것이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결과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메스키트의 난입이었다.
그녀는 내 옆자리에 앉아 날 바라보며 말없이 웃기만 했다. 내 얼굴을 찬찬히 오래도록 살피며 바라보기만 하는 건 특별한 일이 아니었지만, 눈빛이 평소와 달랐다. 그건 무언가 굳게 결심한 눈이었다.
“제희, 언젠가 제가 말했었죠.”
시들링의 드라이어드들도 쫓아낸 마당에 갑자기 등장한 메스키트는 사과를 하거나 양해를 구하는 대신 곧바로 이야기를 꺼냈다. 지금 순간순간 마주하는 메스키트가 정말로 그녀답지 않다고 느꼈다.
“제희는 드루이드이기 이전에 인간이라고. 그래서 제희가 드라이어드들과만 어울리며 편협한 관계를 구축하는 것보단 인간 사회에 어울리며 조화로운 관계를 갖길 바란다고 말했었죠. 우리와 항상 가까이 지내는 건 너무나 분에 넘치도록 행복한 일이지만 결국 드라이어드는 채워 줄 수 없는 게 있고 잊어선 안 되는 사명이 있으니까요.”
그녀는 내게 의지가 될 수 있는 드루이드 동료를 만드는 걸 자주 독려해 왔다. 시들링과의 만남 때는 평가가 좋지 않았지만 이리스 파티나 다른 드루이드들을 만났을 때면 그날 밤 잠에 들 때 꼭 내 옆에 앉아 인간들과 함께 잘 어울리는 내 모습이 보기 좋았다고 말했었다.
내 드라이어드들 중 메스키트가 제일 나의 편의를 많이 봐줬었다.
항상 눈치 없는 엘더가 매번 참견하려 들 때도, 메스키트는 내가 인간 사회의 중요한 이야기가 오가고 있다거나 활동을 하고 있다며 그에게 주의를 줬었다. 무슨 일이 있을 때 주도적으로 드라이어드들을 데리고 아티팩트로 돌아가는 것도 그녀의 몫이었다.
“인간들은 다양한 종류의 관계를 맺는다는 걸 알아요. 그리고 어쩌면 제희가 누군가와 정신적으로 의지가 되는 깊은 관계를 맺을 때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메스키트가 하고자 하는 말의 뜻을 이해했다. 시들링의 고백을 거절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메스키트, 이건 정말….”
그녀는 대뜸 내 왼팔을 가볍게 잡고 큰 손으로 아티팩트를 완전히 뒤덮어 버렸다. 그렇기에 완전히 끌어안는 모양새가 되고 말았다.
“너답지 않아.”
메스키트가 나에 대한 엘더의 마음을 알아차린 것도, 그리고 이를 얼마나 부정적으로 생각하는지도 알고 있었다. 아마 실새삼과 따로 이야기하러 나간 그날 밤, 일이 벌어졌겠지.
“제희, 어렵게 생각하지 말아요. 인간들은 살면서 다양한 경험을 겪지 않나요? 영원을 맹세한 연인이 결국 깨지는 모습도, 한 사람이 수많은 사람과 매번 새롭게 진실된 관계를 맺는 걸 봐 왔어요.”
연애는 그런 것이다. 한 사람과 결혼까지 가는 경우도 있지만 만남과 이별을 반복한다. 나 역시 연애를 여러 번 해 왔었고. 메스키트는 그걸 강조했다.
“그런 과정을 제희도 겪는 거예요. 그렇게 해요. 지금 제희에겐 그런 시간이 필요해요.”
메스키트의 손은 여전히 단단히 아티팩트를 쥐어 가리고 있었다. 누군가를 철저히 차단하는 행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