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무엇보다 그의 손에 들린 거대한 장미 꽃다발이 눈에 띄었다. 남들은 두 손으로 겨우 들 만한 크기를 한 손으로 들고 있는 데다 그의 굵은 팔이 함께하니 둔기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꽃다발은 상당히 화려했다. 언젠가 학교에서 인문대 학생이 밸런타인데이 때 장미 100송이 꽃다발을 낑낑대며 들고 가는 걸 본 적 있는데 크기가 딱 저만했다.
새빨간 꽃이 잔뜩 모여 있어 그렇지 않아도 지나치게 화려한데 얇은 포장지가 겹겹이 둘러 있는 데다 리본과 비즈, 레이스로 장식되어 있어 도저히 눈을 뗄 수가 없을 정도였다.
“와….”
갑자기 꾸미고 나타난 시들링과 장미 꽃다발. 그리고 필라에게 열심히 설명을 들은 기념일 주간. 저 꽃다발의 주인이 설마… 나?
“연습한 대로 해. 연습한 대로!”
살짝 떨어진 거리에서 방정맞은 칼미아의 목소리가 들려오며 분위기를 깬다.
“오늘. 괜찮다면.”
시들링의 굵은 목소리가 로봇처럼 뚝딱거렸다.
“좀 더 부드럽게!”
다시금 칼미아의 목소리가 끼어든다. 마치 상황을 지휘하는 지휘관 같았다.
“오늘… 괜찮다면… 나와 함께….”
“말을 느리게 끈다고 부드러운 게 아니야! 너무 대결하자는 말투잖아?”
“풉….”
이 상황에서 어떻게 웃음을 참을 수 있을까? 나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간신히 삼키려다 결국 배를 잡았다.
“넌 좀 빠져 있어! 너 때문에 음악 소리가 다 묻히잖아. 알아서 하게 좀 내버려 둬.”
바이올린 소리가 끊기고 로즈우드의 타박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아하하….”
결국 난 대놓고 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이를 보고 있는 시들링의 표정이 묘하게 굳어 가는 것이 보였다.
“망했어. 웃어 버렸잖아. 어디에도 이런 상황에 상대가 저렇게 웃음을 터뜨린다는 걸 본 적 없어.”
“웃으면 좋은 거 아냐? 화내는 거랑 반대잖아.”
“그런가? 좋은 건가? 야, 뭐해? 손이 멈춰 있잖아? 다시 연주해.”
“너만 입 다물었어도 상황은 달랐을 거야….”
급하게 이어지는 바이올린 소리와 시들링의 드라이어드들이 떠드는 소리가 불협화음이 되어 울렸다.
“화를 낼 건가?”
이 와중에 드라이어드들의 대화를 캐치한 시들링이 덤덤하게 내게 물었다.
“네가 잘못한 게 없는데 내가 왜 화를 내겠어? 그래서 하고 싶은 이야기가 뭐야?”
“…….”
시들링은 말없이 잠시간 나를 바라봤다. 정말 내가 화를 내지 않는지 눈치를 보는 것 같기도 했다. 이젠 남이 느낄 감정을 살필 줄 알게 된 그의 놀라운 발전에 손뼉을 치고 싶을 정도였다.
“음… 오늘 괜찮다면 나와 함께 식사라도 하지 않겠나?”
참 짧고 간단한 제안을 하는데 이토록 잡음이 많을 줄이야. 드라이어드들이 끼어들지 않았다면 좀 더 나았을 텐데.
예전이라면 그의 드라이어드들의 유별난 행동을 이해하기 힘들었을 테지만, 지금은 그런 이유를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소소한 해프닝 정도로만 여겨졌다.
“그 꽃다발은 내 거야?”
내 물음에 그는 대뜸 꽃다발을 내밀었다. 단순히 물건을 주고받는 것처럼 건조한 행동이었다.
“꼭 붉은 장미꽃이 필요한 날이라 하여 준비했다.”
“왜 필요한지는 알고 있고?”
“레드 데이에 대한 유래는 알고 있다. 다만 드루이드에게 이런 행위가 굳이 필요한가 의문은 든다. 꽃은 드라이어드에게 부탁한다면 언제든 얻을 수 있으니. 마음을 표현한다면 좀 더 실용적인 물품이 낫다고 생각한다.”
시들링처럼 고지식한 드루이드에겐 그렇게 느껴질 수도 있겠다 싶었다. 그저 기분을 내는 행위에 대해 공감을 잘 하지 못하는 거다. 이제 겨우 남의 기분을 조금씩 살필 수 있게 되었으니.
“질투가 많은 드라이어드는 좋아하지 않을 테니 가지고 다닐 수도 없다. 그러니 드루이드에게 꽃다발은 그다지 가치 있는 물품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만약 버리고 싶다면 버려라.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아냐, 좋아.”
나는 시들링이 건네는 꽃다발을 두 손으로 안아 들었다. 쟤는 한 손으로 덜렁 들고 다닐 수 있을지 몰라도 난 품에 안아야 겨우 들 수 있었다. 꽃이 많은 만큼 무게도 꽤 됐다.
품에 안자 어지러울 정도로 진한 장미 향이 훅 풍겨 온다. 드라이어드의 손을 거친 것인지 갓 꺾어 낸 듯 생기가 가득했다.
시들링은 내게 꽃을 건네던 자세 그대로 굳어 있었다.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는 눈엔 놀라움이 섞여 있었다.
“이런 걸 받는 건 정말 오랜만이네. 기뻐, 정말로.”
난 선물로 꽃을 받는 건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특히나 과 CC를 할 적엔 일부러 절대 꽃 선물은 하지 말라고 할 정도였다. 칙칙한 공대에서 화려한 꽃다발은 너무나 이목을 끌었고 내가 꽃 선물을 받은 소문이 점심시간 때쯤이면 다른 학과 친구도 알 정도였다.
시들링의 생각처럼 그다지 실용적이지 않고 금방 시들며 불편하게 계속 들고 다녀야 하기 때문에 별로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기쁠 줄이야. 가슴속이 간질거린다.
가끔씩 받는 거라면 괜찮을 것 같다.
“우리 시들링이… 꽃을….”
“세계수의 품으로 돌아가기 전에 이 모습을 볼 수 있을 줄이야….”
주접을 떠는 그의 드라이어드들만 아니었다면 설레는 기분이 더 오래 갔을 것이다.
“예쁘다. 지나치게 크고 화려하긴 하지만. 무슨 프러포즈라도 받는….”
그 순간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었다.
사람들이 많이 지나다니는 탁 트인 광장, 이목을 단숨에 끄는 바이올린 소리와 거대한 꽃다발을 든 남자….
황급히 주변을 둘러보니 어느새 발걸음을 멈춘 채 흥미진진하게 여길 구경하는 사람들이 가득했다. 그 틈엔… 입을 벌린 채 함박웃음을 짓고 있는 제퍼와 이리스가 있었고, 놀란 눈을 한 룽카와 라운도 있었다.
“아… 쉣.”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 과수원의 모두가 이 광경을 전해 들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병실에 있을 로웰라가 함박웃음을 지은 채 달려오는 모습이 상상되었다.
오늘은 연인들의 날, 장미꽃은 사랑의 증표, 사랑하는 사람에게 꽃을 선물하여 마음을 전하는 날, 심지어 나를 좋아하는 시들링. 그가 건네는 꽃다발은 나를 향한 정식 고백이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난 꽃다발을 별생각 없이 순순히 받아 들었다.
화려한 꽃다발에 정신이 팔려 있던 나머지 지금 이 자리에서 일어나는 상황이 뭘 의미하는지 너무나도 늦게 실감했다.
“식사… 같이 하자고 했지? 지금 갈래?”
일단 자리를 피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들링이 고개를 끄덕이자마자 그를 끌고 발길이 닿는 대로 걸었다.
“우와, 꽃다발 장난 아니다.”
“엄청 좋아하나 본데.”
자리를 벗어나도 화려한 꽃다발 때문에 어딜 가나 이목을 끈다. 기념일 주간을 맞아 식당이나 카페든 죄다 장미로 로맨틱하게 장식을 해 놔서 어느 곳을 선택하든 꽃다발을 품에 안고 시들링과 함께 걸어 들어가는 건 빼도 박도 못하게 ‘그런’ 데이트 코스나 다름없었다.
그러다 다른 가게와 달리 발 빠르게 시기에 대응하지 못한 밋밋한 식당을 발견했다. 저기라면 괜찮겠다 싶어서 들어가려는데 우리 뒤를 졸졸 따라오고 있는 인기척들을 느꼈다.
“계속 따라오면 시들링 두고 과수원으로 돌아간다.”
“이잉… 그래도 저희는 시들링의 드라이어드인데. 드루이드가 가는 곳에 드라이어드가 함께 가는 게 맞지 않나요?”
“아티팩트로 돌아가.”
내 말에 드라이어드들이 득달같이 달려든다.
“이번엔 진짜 아무 말도 없이 지켜보기만 할게요. 시들링이 남들처럼 어엿하게 데이트를 하는 첫 순간이라 놓치고 싶지 않단 말이에요.”
무슨 학예회 참석한 학부모들도 아니고. 아무 말 없이 그들을 바라보자 시들링이 입을 열었다.
“아티팩트로 돌아가.”
결국 시들링의 최종 판결에 그들은 백기를 들었다.
“알았어…. 그런데 시들링, 네가 미리 예약한 식당은 따로 있지 않아? 그곳으로 데려가는 게 어때?”
“상관없다.”
그러고 보니 꽃다발을 준비할 정도라면 식당도 미리 예약했을 거란 생각을 못 했다. 지금이라도 바꿔야 하나 생각하는데 그가 먼저 식당 문을 열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 어쩐지 시들링이 준비한 것들이 하나둘 어그러지고 있는 게 보여 쪽팔린 내 기분과 다르게 그가 불쌍하다는 마음이 들었다.
“그럼 우리 갈게. 잘해야 돼! 꼭 어땠는지 이야기해 줘야 해!”
드라이어드들은 마지막까지 응원 메시지를 남기며 아주 느릿하게 시들링의 아티팩트로 돌아갔다.
그리고….
“한가하면 멀리 70번대 테라리움까지 내려가는 길드 임무라도 줄까요?”
“아닙니다. 마스터. 바쁩니다! 충분히 바쁩니다!”
드라이어드들보다 좀 더 멀리 떨어져 졸졸 쫓아오고 있던 제퍼와 이리스가 황급히 도망가는 모습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