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만 기다려 온 사람들도 많을 텐데. 어쩌면 돈 버는 사람들이라면 더욱 기다렸겠지요. 물품에 장미만 그려 넣어도 몇 배는 비싸게 팔 수 있는 날 아닙니까?”
그렇게 말하면서도 그는 공방 사람들이 들었을까 봐 힐끔 곁눈질을 했다.
“제가 남들과 다른 삶을 살아온 건 다 아시는 거 아니었나요?”
“하긴 어르신은 좀 독특하시지요.”
필라에게 말한 다른 삶이란 다이아 부자의 삶이었지만, 되는대로 내뱉은 말에 필라가 곧바로 수긍하자 오히려 기분이 이상했다.
“그래서 레드 데이는 뭐 하는 날인데요?”
“정말… 모르시는 거예요?”
“그렇다니까요. 아니 어쩌면 이야기해 주시면 떠오를 수도?”
“그… 그럼 하나만 지켜 주세요! 어차피 이왕 들킨 거…. 잠시만요.”
그는 내게 기다려 달라 말한 후 가판에서 펜던트 목걸이를 구매했다. 가는 금줄 끝에 붉은 보석이 장미 모양으로 세공된 예쁜 목걸이였다. 디자인은 심플했지만 슬쩍 본 가격은 그 필라가 구매했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비싸 보였다.
그나저나 목걸이를 자기가 직접 착용할 걸로 보이지는 않는데.
“예쁘게 포장해 주세요! 포장지는 짙은 녹색으로 해 주세요.”
“꽃은 안 사시나요?”
“꽃은 조금 있다가 사려고요!”
가게 점원이 필라가 구매한 목걸이를 예쁜 나무 상자에 넣어 포장지를 두르고 리본을 달아 그에게 다시 건네주었다. 상자를 건네받자마자 필라는 품에 이를 숨기곤 내 눈치를 봤다.
“제가 오늘 여기 있었다는 건 비밀입니다!”
“그게 비밀거리라도 되나요?”
“사… 사람이라면 누구나 비밀을 가지고 살아가니까….”
“그 목걸이는 누구 선물이에요? 설마….”
“비… 비밀입니다! 그것도 묻지 말아 주세요!”
거리를 가득 채운 붉은 장미꽃과 필라가 고른, 루프에게 줄 것이 분명해 보이는 선물을 보니 뭔가가 떠오를 것 같기도 했다.
선물을 구매한 필라는 재빠르게 자리를 이동했고 난 목적지도 모른 채 그를 따라 걸었다.
“레드 데이는 다른 말로 연인… 들의 날이라고 합니다.”
“오?”
“그날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사랑의 꽃말을 가진 붉은 꽃을 주고받는 게 의례인데, 그걸 대표하는 꽃이 붉은 장미라 보통은 장미를 주고받죠…. 굳이 생화가 아니더라도 장미 모양으로 장식했거나 장미가 새겨져 있거나….”
필라가 말에 바로 떠오르는 기념일이 있었다. 밸런타인데이!
세상에 이 세계도 그런 것을 챙기는구나 싶었다. 그러고 보니 지금 시기도 딱 그 시기이긴 했다.
“기념일의 본래 의미를 넘어 그저 장미만으로 행사를 진행하는 곳도 많이 봤습니다. 가장 특이한 걸 뽑자면 가장 아름다운 장미 드라이어드를 뽑는 대회였습니다.”
“와, 여기도 밸런타인데이가 있구나. 하긴 없는 게 좀 이상하긴 하지? 꽤나 큰 기념일이니까….”
“네?”
“아니, 아니에요. 그나저나 혹시 레드 데이의 유래에 대해서도 알아요?”
“정말 모르시는 게 이상하긴 하지만…. 레드 데이는 드루이드들과 관련이 있습니다.”
필라는 레드 데이의 유래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드루이드들은 불을 퇴치하기 위해 혹은 다른 목적으로 여기저기 모험을 다닌다. 그러니 내가 28번째 테라리움을 수시로 떠나는 것처럼, 정해진 거처에 오래 묵는다기보단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는 방랑자에 가까웠다.
드루이드들에게도 사랑하는 가족과 연인이 있다. 하나 그들이 일반인일 경우 위험한 드루이드의 모험에 동행할 수 없기 때문에 집에서 그들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릴 뿐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밖을 떠돌아다니는 드루이드라도 이 기간만큼은 반드시 집으로, 사랑하는 연인의 품으로 돌아와야 했는데 그날이 바로 레드 데이였다. 일종의 약속 같은 개념이었다. 그만 돌아다니고 돌아오라는.
정말 사랑하는 연인을 둔 드루이드가 있었는데, 어느 날 그 드루이드가 연인을 보기 위해 만신창이의 몸으로 기고 또 기어서 결국 연인이 사는 집에 도착했다고 한다.
하지만 알고 보니 그 드루이드는 이미 죽은 후였고, 연인을 다시 보고 싶다는 강렬한 마음이 육체를 움직여 연인이 있는 곳까지 끌고 간 것이었다… 라는 전설이 있다고 한다.
꽤나 크리피한 이야기인데 사랑을 대표하는 기념일을 만드는 이야기가 되었다니.
죽은 드루이드의 손에는 연인에게 줄 붉은 꽃다발이 꼭 쥐어져 있었는데 이 때문에 붉은 꽃을 주고받는 풍습이 생기게 된 것이다.
“혹시 초콜릿은 안 주고받나요?”
“초콜릿은 왜요?”
“이건 다르네.”
어쨌든 양상이 좀 달랐지만 밸런타인데이나 다름없는 날임이 분명했다. 기간을 일주일로 두는 건 정해진 날에 드루이드가 딱 맞춰 도착할 수 없을 테니 여유 기간을 좀 더 둔 거겠지.
“이번엔 루프에게 고백할 거예요?”
“무… 무, 무슨 소리를 하시는 겁니까?”
필라는 루프를 좋아했다. 그들을 처음 만났을 당시 필라가 루프를 좋아하고 있음을 굳이 말하지 않아도 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필라는 내가 그걸 모르고 있다고 생각했었나 본데.
그녀를 따라 연금탑도 내팽개치고 28번째 테라리움으로 쪼르르 따라갈 정도라면 말 다 하지 않았나? 가족만 이주시켜도 될 텐데 루프가 은퇴한다고 하니 굳이 자신도 연금탑을 나갔지.
하지만 루프는 필라를 딱히 같은 눈으로 바라보는 것 같진 않던데….
“사랑하는 사람에게 장미꽃을 주는 날이잖아요. 그런데 방금 장미 목걸이 샀잖아요? 필라가 좋아하는 건 루프이니 이번에야말로 장미 목걸이를 선물해 주며….”
“자… 잠깐! 어르신, 대체 어떻게 그걸 알고 있는 겁니까? 설마 루프도 알아요? 어르신이 다 말해 버린 건 아니시죠?”
“그렇게 티를 내는데 어떻게 몰라요? 그것보다 루프에게 이야기한 적은 없어요. 아, 그러고 보니 오늘 루프가 테라리움에 온 건 알고 있어요? 오늘 목걸이 줄 거예요?”
혹시 루프가 28번째 테라리움으로 돌아온 건 파필리온의 전서뿐만 아니라 레드 데이에 맞춰 가족들 품으로 돌아오려고 했기 때문인가?
“루프가 돌아왔어요? 진짜요? 아… 예정이랑 다른데!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어르신. 비밀이란 약속 꼭 지켜 주셔야 해요!”
정말 고백할 건가 봐. 필라가 바쁘게 달려가는 모습을 흥미롭게 바라봤다.
레드 데이라니. 마지막으로 밸런타인데이를 챙겼던 게 언제였더라? 그저 친구들끼리 형식상 초콜릿을 주고받은 지 좀 됐는데.
사랑하는 사람에게 붉은 꽃을 주고받는다고 했지. 그럼 드라이어드에게도… 꽃을 줘야 하는 건가? 다른 꽃을 주면 질색할 텐데.
너무 자연스럽게 엘더를 생각한 나에 놀라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누가 내 생각을 엿보기라도 할까 봐 부끄러워 미칠 지경이었다. 날씨가 따뜻해진다고 내 마음까지 덩달아 따뜻해지려는지 조금은 환장할 노릇이었다.
“후아….”
두근거리는 마음을 진정시킨 후 발걸음을 옮겼다.
“꽃 한 송이 가져가세요.”
“오, 고마워.”
멀리 광장에서 붉은 장미꽃을 나눠 주고 있는 드라이어드가 보였다. 테라리움에 거주하고 있는 인공 개량 드라이어드 중 장미가 메인으로 섞인 종이었다. 유달리 생기가 넘치는 그 드라이어드는 꽃바구니를 옆에 끼고 지나다니는 행인들에게 꽃을 한 송이씩 선물하고 있었다.
날씨와 상관없이 가판에 장미꽃들이 가득한 이유는 역시나 드라이어드들의 덕이 컸다. 그들은 언제든 바로 모체의 꽃을 피워 낼 수 있으니, 온실이 따로 필요없었다.
주목받는 걸 좋아하는 드라이어드에겐 자신의 모체가 대표로 떠오르는 기념일이 있다는 사실이 상당히 기쁠 것이다. 장미 드라이어드는 특히나 그런 부류였는지 꽃을 나눠 주며 너무나 즐거워하고 있었다.
그 드라이어드의 행위는 마치 테라리움에서 진행하는 이벤트처럼 여겨질 정도로 주변 사람들에게 많은 호응을 받고 있었다.
몇몇 꽃들이 그런 장미를 질투하는 것도 보였다. 그 모습에 또다시 엘더의 질투 가득한 모습이 연상되어 머리를 짚었다.
기분 전환 삼아 나도 가서 한 송이 받아 볼까 하고 생각하고 있는데, 갑자기 어디선가 바이올린 연주 소리가 들렸다. 갑자기 광장 한복판에서 울려 퍼지는 감미로운 음악 소리에 놀라 출처를 찾으니… 너무나도 익숙한 드라이어드가 보였다.
자주색 연미복을 입은 장신의 드라이어드, 시들링의 로즈우드 드라이어드였다.
난데없이 웬 바이올린 연주인가 싶었다. 어쨌든 그가 여기에 있다는 건 시들링도 근처에 있다는 뜻이기에 그를 찾기 위해 고개를 돌렸는데, 곧바로 마주쳤다.
“엇…. 안녕?”
오늘의 시들링은 어딘가 신경 써서 차려입었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격식을 맞춰야 하는 자리에서나 입는 정장을 입은 건 아니지만, 적어도 누군가에게 잘 보이기 위해 힘을 준 건 분명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