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번째 테라리움에 대해선 여기까지 하고…. 조금 쉬었다가 28번째 테라리움에 대해서 다시 논의해 볼까요?”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다들 휴식을 취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와중에 옆에서 차를 홀짝홀짝 마시며 구경을 하고 있던 루프가 슬쩍 내 옆에 붙었다.
“어르신, 제가 여기 온 가장 큰 이유는 엄청난 이야기를 들어서인데요. 어르신의 벌이 말을 안 듣는다고 하셨죠? 제 기생충에 문제가 생긴 건가 해서….”
내가 사용하던 말벌은 필라와 루프의 합작이었다. 더구나 루프의 연구원 은퇴 전 마지막 작품이기도 했고. 그녀가 걱정하는 것도 이해가 됐다.
난 그녀에게 벌에 문제가 생긴 것이 아니라 내가 더 이상 벌을 이용할 수 없게 된 것이라고 이야기해 주었다.
“헙… 그럼 이제 연락은 어떻게 하시려고요?”
“그게 좀 문제라서 당장은 해결책을 찾을 때까지 테라리움에 발이 묶여 있는 신세예요.”
그러고 보니 마침 내 극악무도한 먼치킨 말벌을 만들어 냈던 두 사람이 모두 이 테라리움에 있었다.
“지금이야말로 뛰어난 두뇌를 가진 연금술사분들의 힘이 필요할지도…. 제게 대단한 말벌을 만들어 줬던 분들이라면 뭔가 더 해낼 수 있지 않을까….”
난 살살 루프의 도전 정신을 부채질했다. 그녀는 연구원 생활을 은퇴했지만 꾸준히 그 분야에 미련이 남아 있음을 보여 줬었다.
28번째 테라리움으로 가족들을 이주시키고 나면 자신은 가문을 이어 보석 세공사가 되겠다고 했지만, 지금도 연금술의 오남용을 방지하는 윤리의 지붕이란 단체에서 활동하며 그녀의 인생에서 연금술을 완전히 떼 놓지 못하고 있었다.
“대나무 숲에 대해선 들으셨죠?”
“아, 그건 정말 이 시대 최고의 발명품이라고 생각해요! 드라이어드의 능력과 연계하여 그런 일을 해내다니. 아주 먼 거리에서 일어난 일을 가만히 앉아서 지켜볼 수 있다니요. 전 그때 당시 바빠서 직접 보지 못하고 뒤늦게 학회지에서 내용을 본 게 전부라서 너무 안타까워요. 분명 곧 1번째 테라리움에서 열릴 연금 학회에서 최고의 연구로 뽑히게 될 거예요. 그런데 이번에 다시 대나무 숲을 사용하신다는 거죠?”
루프는 쉴 새 없이 찬사를 쏟아 냈다. 꼭 말 많은 데이지2가 내 옆에 있는 기분이었다.
당시 대나무 숲을 만드는 데에는 2번째 테라리움의 연금탑 학장 메모리아의 공이 컸다. 그녀는 나와 같이 먼 거리에 있는 사람들이 벌을 이용해 단편적인 문자만 주고받는 답답한 현실을 마음에 들지 않아 했고, 그렇기에 협력하는 데 제격으로 판단했다.
난 그녀가 오랜 시간 동안 골머리를 앓는 문제를 곧바로 해결해 주었다. 바로 연구를 진행할 수 있는 막대한 투자금 말이다. 오랫동안 진척을 보이지 않던 연구가 단시간에 급속도로 발전하여 끝내 길드전에 맞춰 완성할 수 있게 되었다.
메모리아는 아주 의외의 곳에서 돌파구를 찾았다. 바로 유령이 나온다는 괴담이 흉흉한 오래된 대나무 군락지였다.
이전에 드라이어드의 힘과 연금술을 결합한 사례는 이미 만나 봤었다. 드라이어드의 힘이 담긴 특수 탄환을 내게 만들어 준 롬가토가 그러했다.
메모리아와의 협력을 이끌어 내는 과정에서 난 내가 알고 있는 연금술사들에 대해 이야기했고, 어쩌면 그날 메모리아는 뭔가의 힌트를 얻었을지도 모르겠다. 드라이어드의 힘과 연금술의 결합이라는 아주 사소한 힌트 말이다.
메모리아를 떠올리며 루프를 바라봤다. 혹시 그녀도 할 수 있지 않을까?
물론 메모리아와 루프는 연륜에서부터 차이가 있었지만, 적어도 기이한 기생충을 발명했던 그녀라면 실마리를 내놓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를테면 대나무 드라이어드의 힘과 연금술을 결합하여 영상 송출 시스템이 탄생했으니, 비슷하게 다른 드라이어드의 힘을 이용한다면 연락문제를 해결할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난 루프에게 대나무 숲에 대한 연구 내용을 슬쩍 흘렸다. 보안상의 이유로 학회지엔 미처 싣지 못했던 재료라든가 구성법 등, 기억 나는 대로 이야기하자 루프의 눈이 반짝인다. 메모리아 입장에서야 영업 비밀을 전부 까발리는 게 내키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투자자이기 때문에 내겐 연구의 내용을 공유해야 했고, 결정적으로 내 다이아가 어디 사용됐는지 명세서는 전부 오픈해야 했기 때문에 사용된 물품만큼은 숨길 수 없었다.
“그…그런 방법을 사용하다니. 역시 메모리아 님. 정말 존경스러운 분이세요.”
난 정확한 원리도 모르는 내용을 줄줄 흘릴 뿐이지만, 이 모든 것들이 루프의 머릿속에서 전부 재해석되어 나열되는지 연이은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그러니 어떤 드라이어드의 힘을 이용하면 벌을 뛰어넘는 연락 체계를 만들어 낼 수 있지 않을까요? 참고로 드라이어드의 힘을 정제하여 작은 탄환에 가두는 연구도 있으니 원한다면 소개해 드릴 수도….”
“하… 하지만 저는 이제 연구는 그만하려고….”
그녀는 미련이 뚝뚝 떨어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연락 수단이 발달하면 루프가 활동하는 윤리의 지붕에도 많은 도움이 되지 않을까요? 벌을 이용한 단편적인 메시지 전달로는 많은 한계가 있잖아요?”
살살 꼬시니 루프의 눈빛이 태풍처럼 빙빙 돈다. 이미 꼬셔질 준비를 다 끝낸 사람처럼 내 말 하나하나에 전부 휘둘리며 귀를 쫑긋 세운다. 일단 루프가 미끼를 물면 자연스레 필라도 따라오니 이득이었다.
물론 더 대단한 연금술사들에게 이를 의뢰하는 것도 한 방법이겠지만 시간과 품이 든다는 게 첫 번째 문제요, 이해관계를 따져야 한다는 것이 두 번째 문제였다.
메모리아가 결국 나와 협력했던 건 그 연구가 잘 진행된다면 결론적으로 그녀가 몸담고 있는 2번째 아카데미에 큰 이득이 있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연금술사들은 드루이드들과 달리 테라리움이 만들어 낼 수 있는 큰 자산이었다. 테라리움들은 연금술사를 키우기 위해 연금탑을 만들고 막대한 지원금을 퍼붓는다.
다른 테라리움이 빼앗아 가는 것을 경계하고 폐쇄적으로 운영하며 다른 곳에서 오는 연금 의뢰를 극도로 경계한다. 어마어마한 기부금을 내지 않으면 연금탑에 발도 못 붙이게 만들 정도였다.
즉, 까딱 잘못하다간 연금 의뢰 한 번 맡기려다가 그 테라리움과 완전히 척을 질 수도 있다는 말이었다.
그런 점에서 루프와 필라가 정식 연금술사가 되기 전에 스카우트해 온 것이 정말 다행이었다.
“잘 생각해 봐요. 다이아 걱정 없이 연구하게 해 줄 테니.”
“새… 생각은 해 보겠습니다.”
생각해 보라고는 했지만 그녀가 오늘이 가기 전 내게 긍정적인 답변을 내놓을 거란 걸 잘 알고 있었다. 이미 머릿속에서 청사진을 전부 그려 놓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잔뜩 고민에 빠진 루프를 뒤로하고 과수원 밖으로 나왔다. 휴식 시간 동안 뭐라도 먹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어느 가게를 갈지 고민했다. 간만에 돌아온 테라리움이니 곳곳을 둘러보는 것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룽카와 라운을 찾아볼까?”
둘이 잘 관광하고 있을지 궁금증이 생겼다. 첫날 이리스 파티의 타깃이 되어 어지간히 시달린 이들은 낮이 밝자마자 열심히 피해 다니고 있다는 소리를 들었다. 대체 얼마나 괴롭혔으면….
그들에 대해 생각하던 것도 잠시, 거리에 유달리 한 꽃이 눈에 많이 띈다는 것을 깨달았다. 붉은 장미꽃이었다.
28번째 테라리움은 데이지2의 주도로 조경에 유달리 레드 데이지가 많았다. 테라리움을 레드 데이지로 가득 채우겠다는 그의 야망이 100% 반영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 데이지를 뒤로하고 눈을 돌릴 때마다 붉은 장미꽃이 보였다.
가판을 내놓고 장사하는 곳마다 장미 장식을 해 두었는데, 과한 곳은 차양까지 덩굴을 둘렀고 아닌 곳은 구색을 맞춘다는 느낌으로 화병에 장미 한 송이를 꽂아 장식해 놨다. 생화부터 조화까지 다양했고 장미꽃이 수놓아진 자수를 이용한 장식이나 그림을 그려 넣기도 했다.
또한 거리를 지나다니는 사람 중에서도 장미 꽃다발을 든 사람이 많이 보였다.
“왜 장미가 이렇게 많이 보이지? 무슨 날인가?”
만약 테라리움에서 어떠한 축제가 열렸다면 내가 모를 리가 없었다. 딱히 들은 것이 없기에 의문이 가득한 찰나에 멀리 가게 앞에서 서성거리는 필라의 모습을 발견했다.
“오, 필라!”
반가운 마음에 인사라도 할 겸 그를 불렀는데, 내 목소리를 들은 그가 화들짝 놀라 주위를 바쁘게 두리번거리는 게 보였다.
“여기예요, 여기.”
“헉, 어르신.”
“오랜만이에요. 테라리움에 돌아온 건 좀 됐는데 바빠서 인사할 틈도 없었네요.”
“아, 오신 건 알았습니다. 어르신이 오시면 테라리움 분위기가 좀 달라지거든요.”
“분위기가 달라져요? 어떻게?”
“좀 더 활기차진다고 해야 하나…. 밖을 돌아다니는 드라이어드들이 더 신나 보이기도 하고. 하여튼 그런, 분위기라는 게 있습니다.”
내가 28번째 테라리움으로 돌아오면 분위기가 달라진다고? 필라가 기민한 건지 정말 분위기가 달라지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꽤나 신기한 기분이 들었다.
“그나저나 여기서 뭐 해요? 저 뭘 좀 먹으러 가려는데 같이 가실래요?”
“아, 그게….”
우물쭈물하는 필라를 보며 그가 대체 어떤 가게를 방문하려 했는지 확인했다.
다른 가게들처럼 붉은 장미로 잔뜩 치장된 가게였는데 장신구들을 취급하는 공방이었다. 가게 규모나 사용되는 보석을 보아하니 드라이어드를 위한 장신구가 아니라 사람들을 위한 장신구임을 알 수 있었다.
이 가게의 물품들도 특이점이 있었는데 가판에 진열된 상품 중 장미 모양이 상당히 많다는 것이었다.
장신구를 파는 가판 옆에는 장미 꽃다발도 함께 팔고 있었다.
“여기도 장미…. 필라, 혹시 오늘 무슨 날이에요? 유독 장미꽃이 많이 보이는데.”
내 물음에 필라는 엄청난 죄를 들킨 사람처럼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 모습에 도리어 놀란 건 나였다.
“그… 오늘부터 일주일간 레드 데이 기간이라 그렇습니다. 아시고 계시는 줄 알았는데 의외네요.”
필라는 새빨개진 얼굴로 더듬더듬 답을 했다.
“레드 데이? 그런 것도 있어요?”
금시초문이었다. 그런 날도 있었어? 레드 데이는 내가 살던 세계에서도 들어 본 적이 없는 날이었다.
“정말 모르시는 눈치네요. 아니 어떻게 어르신처럼 젊은 사람이 레드 데이를 모르실 수가 있습니까? 레드 데이 기간이 되면 아침에 일어나기만 해도 설레는 나날을 보냈어야 하는 거 아닙니까?”
갑자기 꾸중을 듣는 느낌이라 묘했지만 혹시 엄청난 기념일을 모르고 있는 건가 싶어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당장 며칠 전만 해도 수확제에 대해 완전히 까먹고 있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