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02화 (502/604)

간신히 테라리움에 머물겠다고 마음먹은 행정 관리원이, 갑자기 마음이 동해 투기장으로 떠나 버릴까 노심초사한 것이다. 그래서 나도 더 이상 투기장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내가 자꾸 투기장을 언급하면 그들이 불안해할 거야.

“28번째 테라리움은 이번 수확제의 의미가 아주 커. 외부에 우리 세계수 가지가 무탈하다는 것을 알리고 성공적으로 다시 일어났다는 걸 알리는 시작이 될 테니까. 그러니 수확제가 열리는 날까지 되도록이면 여행을 자제할까 해.”

28번째 테라리움은 한 번 쓰러졌었다. 내가 테라리움 어드벤처에 도착하고 처음으로 겪었던 대형 퀘스트이기도 했다. 그리고 지금은 그때의 처참한 상황을 누구도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재건하는 데 성공했다.

테라리움은 아직도 끝없이 이주민들을 받고 있으며 열심히 외부에 홍보를 하고 있었다. 그래도 수확제에서 한 번 좋은 인상을 심는 것만큼 절호의 홍보 찬스를 놓칠 수 없었다.

“가지가 열매를 잘 맺어 주겠죠?”

이전의 28번째 테라리움의 상태에 대해 알고 있던 디케가 조심히 물었다.

솔직히 결과는 수확제가 되어서야 알 수 있었다. 거의 죽기 직전까지 갔던 가지가 운 좋게 살아났고, 지금은 어떤 테라리움의 가지들보다 풍족하게 자라고 있다지만 열매를 맺는 건 다른 일이었다. 그러나 그다지 큰 걱정이 되진 않았다.

결실의 시기가 아닌 때에 마거리트가 담겨 있던 열매를 맺었었는데, 난 이를 가지가 열매를 맺을 준비가 되었다는 신호라고 생각했다. 이번 수확제에 무리 없이 다른 테라리움들처럼 주렁주렁 동그란 열매들을 맺어 줄 것이다.

“오히려… 너무 많이 맺을까 봐 걱정이 되는데요?”

그 말에 다들 충분히 상상이 가능한 결말이라는 것처럼 표정들이 기묘해졌다. 다이아를 양껏 먹는 바람에 테라리움 곳곳에 다이아 분수까지 터뜨리는 가지였다. 그러니 걱정과 다르게 상상치도 못한 풍년을 맞이할 수도 있었다.

“아, 곧 수확제를 맞아 18번째 테라리움에서 가지 감사 겸 내려올 예정이라고 합니다. 아마 비슷한 시기에 16번째 테라리움과 60번째 테라리움도 번호 연계법으로 감사가 내려올 것 같은데….”

“으음….”

그러고 보니 28번째 테라리움은 그동안 재건 중이란 이유 때문에 가지 품질 검사가 미뤄졌었다. 하지만 수확제가 다가오니 더 이상 미룰 수도 없을 것이다.

“열매는 어떻게 관리할까요? 무료로 배포할 수량과 설익은 열매 보존 수량 등….”

다른 테라리움들은 설익은 열매가 과하게 남는 걸 대비해 무료로 나눠 줄 열매의 수량을 정해 놓는다. 26번째 테라리움에서 무료 열매를 받기 위해 며칠 전부터 과수원에서 줄을 섰던 사람들이 떠올랐다.

그러나 전부 줘 버리지 않고 설익은 열매를 적절히 남겨 놓는 것도 중요했다. 자연 발생 드라이어드와 영혼의 연결을 맺을 때 필수 아이템이니 구비를 해 놔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미리 정하는 것도 문제인 게… 가지가 정말 열매를 몇 개나 맺을 줄 알고.

슬슬 머리가 아파 온다.

“드루이드를 위한 축제는 어떻게 진행할까요? 다른 테라리움들에선 이런 축제들이 예정되어 있다고 하는데….”

이미 소식지를 통해 어떤 축제가 열릴 거라고 홍보하는 테라리움들이 많았다. 시그니처 축제를 가지고 있는 경우 굳이 홍보를 하지 않아도 많은 사람들의 머릿속에 기억되어 있기에, 소식지에 없는 테라리움까지 합하면 한 80퍼센트의 테라리움들은 거의 준비가 끝났다고 봐도 무방했다.

경품을 뿌리며 사람들을 현혹하는 건 쉽지만 기왕이면 우리 테라리움도 인상에 깊게 각인될 대표적인 축제를 가지면 좋을 텐데 시간이….

“이번 수확제를 맞아 드루이드 양성소와 드라이어드 교습소에서 연계 행사를 진행해 보는 건 어떠냐는 의견이 왔습니다.”

열매를 받기 위해 드루이드가 몰린다는 건, 그 안에 갓 여행을 떠날 준비가 된 초보 드루이드들도 포함되어 있음을 뜻했다. 아직까지 우리 테라리움의 드루이드 양성소는 유명세가 없다시피 해서 견습 드루이드가 부족했다. 막 테라리움에 방문한 초보들을 사로잡을 수만 있다면 양성소가 활발하게 굴러갈 텐데.

“미뤄 뒀던 안건이긴 한데 시범 운영했던 대나무 숲과 관련해 행정 관리원님과 면담을 요청한 일이 있습니다. 수확제 진행에 도움을 받을 수 있지 않을까요?”

2번째 테라리움의 연금탑과 연계하여 진행했던 대나무 숲 프로젝트는 길드전 방송 이후로 다시 연구 개발의 늪으로 빠져 버렸다. 테라리움 곳곳에서 획기적인 반응을 일으켰지만, 이후 활용처가 애매했기 때문이다.

“바로 면담 일정을 잡아 주시겠어요?”

“네, 알겠습니다.”

그밖에도 기다렸다는 듯이 나를 붙잡고 디케와 에이레네가 토해 내는 안건들이 너무나 많았다.

44번째 테라리움에서 인삼 군락지에 설립한 고아원과 테마파크 설립이 막바지에 이르러 수확제쯤에 첫 개시를 할 수 있을 거라고 했다.

그곳의 투자는 28번째 테라리움의 이름으로 진행된 데다가 인력 연계가 이어져 있으니 주기적으로 보고를 받고 있는데, 44번째 테라리움 역시 수확제라는 큰 이벤트를 놓칠 수 없으니 가능한 시기를 맞추려고 노력하는 듯했다.

그곳이 성공적으로 오픈되어야 안정적인 수익 창출과 인력 개선이 일어나기 때문에 수확제 준비에 살펴야 할 곳이 늘었다.

똑똑.

그때 너에게 일거리를 더 안겨 주겠다는 것처럼 집무실 문 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행정 관리원님, 루프 님께서 방문하셨습니다. 만나 보시겠습니까?”

“아….”

이 시기에 16번째 테라리움에 기점을 둔 루프가 온다는 건 뻔했다.

“어르신! 파필리온 그 자식 좀 죽여 주세요! 징징거림이 도를 넘어서요!”

루프는 파필리온이 보내는 서류와 편지를 한가득 안고 씩씩거리며 나타났다. 저 중 반은 쓸데없는 파필리온의 연서라는데 장담한다.

28번째 테라리움 뿐만 아니라 16번째 테라리움도 신경 써야만 했다. 무려 28번보다 번호도 앞인데다 외부 인지율도 남다르니, 따지고 보자면 수확제의 중요성은 16번째 테라리움이 훨씬 더 크긴 했다.

홍보부터 걱정해야 할 28번째 테라리움과 다르게 거긴 엄청난 인파가 쏟아질 예정이었다. 앞 번호인 만큼 앞 번호의 위명을 잘 관리해야만 했다.

수확제는 여행객들을 불러 모으는 홍보 요소기도 했지만 다른 관점에선 테라리움 간 벌이는 경쟁이기도 했다. 자신들이 잘나간다는 걸 1년 중 가장 잘 보여 줄 수 있는 날이 수확제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거긴 이미 전 행정 관리원인 파필리온이 이전에 해 왔던 것처럼 자기가 알아서 잘 관리해 줄 거라 막연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게 인페르노로부터 목줄이 풀리자마자 억눌렸던 내면의 허황심이 미친 듯이 폭발하기 시작했는지 일을 장난 아니게 크게 벌이는 듯했다.

더구나 그곳은 이제 더 이상 인페르노를 숨기고 있지 않기 때문에 더 개방적으로 일을 진행할 수 있었다.

디케와 에이레네가 ‘이건 어떻게 할까요?’의 개념으로 나를 필요로 한다면, 파필리온은 ‘나 이거 할래, 하게 해 줘.’의 개념으로 내 허락이 필요했다.

즉, 16번째 테라리움의 예산을 잘 관리해야 자신이 가질 월급이 많이 책정되는 그로서는 일을 크게 벌이고 싶지만 예산에서 빼다 쓰기 싫으니 내게 지원을 더 해 달라는 식이었다.

내게도 네가 필요한데 왜 16번째 테라리움은 안 오고 28번째 테라리움에서만 눌러살고 있냐며 징징거리는 편지를 슬쩍 옆으로 치우다가 60번째 테라리움 보고서를 들고 해맑게 날 바라보는 에이레네의 얼굴에 눈을 질끈 감았다.

시험을 앞두고 과제가 연달아 터지는 기분이었다. 더구나 제출 기한도 비슷비슷해서 어느 하나 우선순위를 쉽게 결정하지 못하는 순간 말이다.

“일단 파필리온은 미루고….”

이거 해 달라 저거 해 달라 징징거리고 있긴 해도 이미 진행 준비는 다 끝내 놨을 것이다. 안달나면 최적의 플랜으로 알아서 진행하겠지. 저렇게 귀찮게 구는 건 결국 16번째 테라리움에 한 번 방문해 달라는 생떼가 기저에 깔려 있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그 자식은 아직 나와 엘더 사이에서 일어난 일을 모르지. 문득 그 앞에서 엘더와 핑크빛 기류라도 뿌리면 어떻게 될지 궁금해졌다. 비련의 주인공처럼 눈물이라도 흘릴까…?

도란도란한 엘더와 나 사이에서 내 바짓가랑이를 붙잡는 파필리온을 떠올리니 그에 대한 괘씸함이 조금 풀렸다. 여기서 더 귀찮게 군다면 그가 보는 앞에서 엘더에게 금은보화를 안겨 주고 말겠다고 다짐했다.

“60번째 테라리움은 수확제의 중요도를 한 단계 낮추도록 하죠.”

이제 막 재건에 바쁜 60번째 테라리움이 다른 테라리움들처럼 수확제를 크게 여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무리가 있었다. 이전 행정 관리원이 큰 빚을 질 만큼 운영이 개판이었던 곳이라 손볼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그러니 형식상 수확제를 진행하되 새로운 축제를 구상하고 여는 것보다는 이미 있는 걸 이용해 최대한의 이득을 보는 방식이 필요했다.

“이전에 미미르의 가문과 연계해서 기부 행사를 진행하기로 했었죠?”

인페르노를 자극해 60번째 테라리움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일부러 베스탈리스인 그들이 나서 주었었다. 길드전이 끝나며 흐지부지됐지만 이미 대대적으로 홍보를 했으니 진행하지 않고 넘어갈 순 없었다. 그래서 수확제 때 진행하는 건 어떨까 싶었다.

“60번째 테라리움에는 아직 대나무 숲이 건재할 테니 기부 행사를 송출하면 될 것 같은데.”

이 기회에 기부 행사에 참여하는 베스탈리스들과 스텔라를 마주하게 만드는 자리를 마련해도 괜찮을 것 같았다.

“길드전이 진행됐던 장소이니 입소문이 나서 방문하려는 드루이드들이 꽤 있을 거예요. 적어도 많은 열매 재고가 생기지 않도록 소비해 줄 수 있겠죠. 애초에 뒤 번대로 갈수록 열매를 많이 맺지 못하기도 하고요.”

에이레네가 내 말에 동조하며 의견을 냈다.

“열매는… 60번째 테라리움은 무료 배포 열매의 비중을 확 늘려도 괜찮을 듯해요. 기부 명목으로 말이에요. 불은 물론 베스탈리스와의 전투 장면이 일부 외부에 송출되었으니 드루이드 후진 양성에 기여한다는 목적으로 방문한 드루이드들에게 열매를 기부한다는 취지면 될 것 같네요.”

에이레네가 조금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그도 그럴 것이 열매 판매는 과수원의 커다란 수입원이기 때문에 무료분을 늘린다는 건 그만큼 수입이 깎이는 걸 뜻했다.

과수원이 무료 열매를 많이 풀지 않는 것은 수입 문제가 가장 컸다. 무료 배포의 비중이 높아질수록 다들 무료로 얻고 싶지, 큰 다이아를 지불하고 열매를 사고 싶은 마음은 없을 테니까.

이전에 전해 듣기론 아예 열매가 무료로 풀릴 때까지 버티는 현상도 생겨서 난처해질 수 있다고 했었지. 그래서 테라리움마다 고객들의 소비 심리까지 파악해 가며 무료 수량을 조절하는 거였다. 하지만 기부라는 명목이 붙으면 무작정 열매를 푸는 것보다 사정이 많이 나을 터였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대나무 숲을 60번째 테라리움의 실황 중계 창구로 이용하실 예정이신가요?”

대나무 숲은 길드전 실황 중계를 위해 몇몇 테라리움에 설치를 해 뒀다. 다만 길드전은 많은 사람들이 열광한 소재라 테라리움들도 상영을 반겼으나, 수확제 기간에 다른 테라리움을 홍보하는 일을 반기진 않을 것 같았다.

이곳에선 아직까진 영상 자체가 매우 신선한 콘텐츠라 내용을 따지지 않고 관람할 사람은 많았지만, 앞으로도 이렇게 노골적으로 광고용으로 사용한다면 금방 지치게 만들겠지. 어쩌면 눈치가 빠른 사람들은 이 점을 금방 느낄 수도 있을 테고.

“그만큼 보상을 해 주도록 하죠.”

광고비를 지불하겠다는 말이었다. 이번 일이 제대로 성사된다면 차후 다른 이들 또한 대나무 숲을 이용한 광고가 필요할 때 똑같이 광고비를 지불할 것이다.

내가 살던 세계에서 지하철이나 버스에 원하는 구좌를 골라 광고비를 지불하고 광고를 내걸었던 것처럼, 이곳에서도 대나무 숲이 그 역할을 대신하겠지.

“수확제의 우선순위를 낮추겠다고 하셨지만 새로운 시도가 많아서 정신없긴 마찬가지겠네요. 하지만 아주 좋아요. 베스탈리스분들께 연락을 넣을게요.”

심플하게 진행하자면서 군살을 덕지덕지 붙여 버린 느낌이라 양심이 찔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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