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기묘한 계시에 대해서도 생각해 봤어요.”
세계수는 세상이 묘목인 나에게 친절하도록 많은 상황들을 안배해 놨었다. 드라이어드들의 만남부터 수많은 사건들과의 조우 그리고 위기의 순간엔 직접 개입하면서까지.
그러니 내가 베스탈리스와의 화합을 바라기 이전부터 세계수는 그걸 바랐고, 그들이 나의 우군이 되어 주길 바랐는지도 모른다. 더 나아가 모험을 함께 할 동료가 되는 것까지.
혹은 스텔라가 내게 아들을 위한 발판이 되길 원했던 것처럼 세계수도 애쉬가 그런 역할을 수행해 주기를 바랐는지도 모르지. 어쨌든 세계수는 내 곁에 설 역할을 스텔라에게서 애쉬에게로 물려줬다.
“사실….”
난 이야기의 포문을 열면서도 이걸 스텔라에게 말해도 될지 조금 고민되었다. 그래서 막상 입을 열고 나서도 쉽사리 말을 이어 나가지 못했다. 그런 나를 스텔라는 아무 말 없이 가만히 기다려주었다.
“전 좀 더 빨리 이 세계에 나타났어야 했어요.”
“신기한 화법이구나. 더 빨리 태어났어야 한다는 말이니?”
“뭐, 비슷해요. 어쨌거나 전 늦어도 당신이 활동하던 시대에 나타났어야 한다는 거죠. 원래는 더 빨리, 당신이 태어나기도 전에 왔어야 했을 거예요.”
세계수가 힘을 많이 잃기 전에 세계수의 묘목인 나는 더 빨리 <테라리움 어드벤처>의 세계로 넘어왔어야만 했다. 하지만 난 나를 뒤쫓아온 불에 의해 세계에 넘어오기 전, 빠르게 생을 마감했었다. 그리고 그 일이 아주 오래전부터 되풀이되어 왔었다.
“당신을 더 일찍 만나야 했어요. 당신에게 세계수가 계시를 내렸을 때, 그 후 오래지 않아 우리는 만날 예정이었어요. 지금 이 순간이… 더 빨리 찾아왔다면 당신이 오랜 시간 고뇌하고 악행을 일삼지 않아도 됐을지도….”
내 말에 스텔라는 아무런 답을 하지 않았다.
“애쉬가 당신과 동일한 계시를 받은 걸 보니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만약….”
잠잠히 듣고 있던 스텔라가 입을 열었다.
“너의 말대로라면 이번에도 늦었다면 애쉬의 자손에게 그 계시가 넘어갔을 거란 거지? 아니, 굳이 애쉬가 아닌 다른 베스탈리스에게 계시가 넘어갔을 수도 있고. 그렇다면 나 이전에 계시를 받은 베스탈리스가 더 있었을지도 모르겠구나.”
스텔라는 내가 하려는 말을 정확히 이해하고 있었다.
“어찌 보면… 참으로 이기적인 신이구나. 기약 없는 기다림을 아무렇지도 않게….”
계시에 대한 우리의 대화는 여기서 끝났다. 스텔라는 더 이상 이 주제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어 하는 눈치가 아니었다. 그녀의 말처럼 세계수는 이기적일지도 모른다. 아니면 무심한 걸 수도.
그녀처럼 기약 없는 기다림을 겪게 된 존재들이 또 있었으니 바로 인삼 드라이어드였다. 내가 더 일찍 도착할 수만 있었다면 그들이 그토록 고통받는 일은 없었을 테지만 애초에 내가 어찌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니 스스로 죄책감을 가질 필요는 없었다.
나는 내가 스텔라의 시대에 이 세계에 도착하여 그녀와 함께 모험을 떠나는 상상을 해 보았다. 지금의 길드원들 자리에 그녀가 자리한다면, 불을 사용하는 아주 강력한 동료를 얻게 되는 거겠지. 지금과는 다른 다이내믹한 모험을 하게 됐을지도 모르겠다.
“아.”
마침내 스텔라의 영혼이 정상적인 정화의 힘을 사용할 수 있을 만큼 회복되었다. 그러자 그녀의 왼쪽 손목에 다른 베스탈리스들처럼 아티팩트가 생겨났다. 검은빛을 띠지만, 드루이드들이 사용하는 테라리움 아티팩트와 동일한 모양의 팔찌였다.
“이건….”
그녀는 자신의 손목에 채워진 아티팩트를 한참이나 바라봤다.
“꼭… 드루이드들이 사용하는 것과 같구나.”
그녀는 내 왼쪽 손목에 채워진 아티팩트와 자신의 것을 번갈아 바라보며 말했다.
“그리고 너의 것과 똑같고.”
“네, 저 작은 난쟁이가 앞으로 그곳에 기거하며 당신의 힘을 보조할 거예요.”
“밟을 위험은 없어서 다행이구나.”
그때, 마침내 영광의 자리를 차지할 난쟁이가 가려졌는지 개중에 가장 근엄한 기운을 풍기는 난쟁이가 자신만만한 걸음으로 스텔라의 앞에 섰다.
[저는 베테랑 난쟁이예요. 태어난 지 오래됐지만 그런 만큼 저기 있는 난쟁이들 중 가장 많이 곡괭이질을 해 왔어요!]
어떻게 보면 스텔라와 참 어울리는 노익장 난쟁이였다. 정정한 걸 보니 어느 하나 특출난 게 아니라 고루고루 평균 스탯이 높은 난쟁이인 것이 분명했다. 그러니까 드라이어드 등급으로 따지면 레어 급 이상의 난쟁이… 가 아닐까?
“호오….”
스텔라는 흥미로운 눈으로 그 난쟁이가 내게 열심히 인사한 후 그녀의 아티팩트로 들어가는 것을 지켜봤다.
“그래서 이 작은 존재가 이제 뭘 하는 거지?”
난 실망에 가득 찬 표정을 한 난쟁이들이 핸드폰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테이블 위에 핸드폰을 올려 둔 후 설명할 말을 골랐다.
스텔라의 아티팩트는 이제 저 노익장 난쟁이를 위한 미니 광산이었다. 그곳에서 난쟁이는 이제 다이아가 아닌 특별한 걸 캐내게 된다. 바로 영혼을 상처 입게 만드는 오염된 화기로, 캐내면 검고 둥근 구슬이 된다.
그 자체로는 쓸모없는 돌덩이에 불과하지만 스텔라가 불을 정화한다면 가치가 있는 붉은 구슬로 변모하게 된다.
그리고 내가 다이아로 <무한 다이아> 게임을 발전시켰던 것처럼, 붉은 구슬은 그녀가 가진 미니 광산과 난쟁이의 능력을 업그레이드하는 화폐로 사용할 수 있었다. 그러니 불을 정화하면 할수록 치유력도 더 늘어날 테니 이득이었다.
드루이드가 드라이어드를 육성한다면, 이젠 베스탈리스는 난쟁이들을 육성해야 하는 셈이었다.
차라리 나와 같은 세계의 사람이라면 이 모든 과정을 게임처럼 이해하라고 하면 알아들을 텐데, 그러질 못하니 조금 답답하긴 했다. 어쨌든 에트나와 포르낙스에게 했던 것처럼 스텔라에게도 이러한 메커니즘에 대한 설명을 끝냈다.
“일생 동안 드라이어드와 함께 불을 퇴치하는 사명을 가진 드루이드처럼 베스탈리스에게도 그런 사명이 생기게 되겠구나.”
그 후 스텔라는 정화의 힘에 익숙해질 때까지 28번째 테라리움에 머물며 쉴 새 없이 근방의 불을 퇴치하러 다녔다.
물론 한때 인페르노 소속이었던 범죄자를 혼자 돌아다니게 둘 수 없으니 종종 누군가가 동행하긴 했다. 그녀가 더 이상 위험인물이 아니라 하더라도 외부에 보여지는 건 다르니까.
처음 사용하는 정화의 힘이 익숙하지 않아 생소할 법도 한데… 그녀는 마치 베테랑처럼 있는 대로 불을 다 쓸고 다녔다. 본래 가진 힘이 강할수록 정화의 힘도 더욱 강해지는지, 그녀가 손을 뻗을 때마다 픽픽 꺼지는 불이 꼭 뉴비 사냥터에 당도한 고렙 유저를 보는 듯했다.
그렇지 않아도 인공 개량 드라이어드들이 상주하여 근방 치안이 완벽한데 그녀가 가세하니 불이 완전히 씨가 말라 옆 테라리움까지 넘어가야만 했다.
그녀는 막 무기를 받아 레벨 업에 열을 올리는 뉴비처럼 사냥터를 전멸 낼 기세로 움직였는데, 꼭 렙업에 목말라 가드너 등급을 받을 만큼 불을 사냥하고 다녔던 과거의 나를 보는 듯했다.
힘든 기색은 전혀 보이지 않았는데, 불을 퇴치하고 다니는 그녀를 보자면 새로운 직업으로 전직하여 잔뜩 신이 난 사람처럼 보이기도 했다….
연락 문제에 돌파구가 생기기 전까지 28번째 테라리움에 머물기로 했다.
그동안 내가 홀로 여기저기 다녀도 벌이 있었기에 긴급 연락을 받을 수 있어서 괜찮았지만, 지금의 나는 테라리움 밖으로 나가는 순간 연락 단절이었다. 내가 관리하는 테라리움이 하나도 없다면 모를까, 지금은 셋이나 되니….
대신 연락을 주고받아 줄 수 있는 동료가 함께 동행한다는 선택지가 있지만, 그건 장기적으로 볼 때 해결책이라고 보기 어려웠다. 동료들 각자에게도 모험이 존재하는데 특히나 내 모험은 길드전을 기점으로 그 방향성이 심하게 다이내믹해졌다는 점이 걸렸다.
전대 노멀 필드 가디언과의 만남에서 까닥 잘못하다간 룽카와 라운을 잃을 뻔했다. 그런 특수한 상황에서 온전히 살아남을 수 있는 사람이 지금으로선 나 말고 누가 있겠나 싶기도 하고….
더욱이 28번째 테라리움에 머물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다. 곧 수확제였다.
수확제는 1년에 한 번 세계수의 가지가 드라이어드의 열매를 맺는 날이었다. 내가 이 세계에 온 지 이제 1년이 다 되어 간다는 사실과 그렇게 많은 모험을 했는데도 고작 1년이 되지 않았다는 사실이 번갈아 가며 날 놀라게 만들었다.
수확제가 당장은 아니었다. 한 달 뒤 겨울의 끝 무렵, 겨울의 쌀쌀한 바람을 안고 막 봄으로 진입하는 3월 후반 4월 초가 수확제였다. 가지마다 열매를 맺는데 약간의 시간 차가 있기 때문에 수확제는 테라리움마다 1~2주를 통으로 이벤트 기간으로 삼는다.
다른 테라리움들은 두 달 전부터 준비에 들어가니 지금에서야 이를 깨달은 건 사실상 늦은 거나 다름없었다.
물론 내 충실한 보좌관들이 내가 없는 사이 착실히 수확제를 준비하고 있었지만, 이 커다란 이벤트를 완전히 까먹고 있었다는 사실에 차마 얼굴을 들 수 없을 정도로 민망함이 느껴졌다.
수확제는 단순히 드라이어드 열매가 맺히는 것에서 끝나지 않는다. 1년 중 가장 여행객들로 붐비는 시즌이기도 하며 이때야말로 테라리움 홍보든 수익을 뽑든 만반의 준비를 갖춰 목표한 바를 이뤄야 했다.
테라리움의 경제 활성화는 대부분 드루이드들에 의해 결정된다. 그들만이 유일한 1차적 다이아 생산자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테라리움들이 더 많은 드루이드들을 불러 모을 수 있도록 무료로 열매를 뿌리거나 드루이드들이 혹할 만한 귀한 액세서리나 장비 등을 걸고 이벤트를 하는 것이다.
“이맘때쯤이었죠? 3번째 테라리움의 사설 투기장들이 예선전을 시작하는 게.”
이리스가 슬쩍 시들링을 곁눈질하며 말했다.
“그렇다. 곧 수확제이니 투기장도 문을 열겠군.”
드루이드들이 드라이어드와 함께 결투를 벌여 최강자를 가린다는 투기장. 투기장 이야기가 나온다면 그곳에서 연패를 거머쥔 나머지 악명도 높아진 시들링을 빼먹을 수 없었다.
투기장 이야기가 나오자마자 혹해 버린 나를 속으로 열심히 두들겨 팼다. 좀 전까지만 해도 수확제 준비가 늦었니 마니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를 내팽개치고 투기장을 구경해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다니.
내가 테라리움에 오래 머물겠다고 하자 화색이 된 디케와 에이레네의 표정을 잊을 수가 없었다. 차마 말은 못 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수확제 때문에 바쁜 기간만큼은 행정 관리인이 머무는 게 큰 도움이 될 테니 말이다.
“투기장… 재밌겠다.”
“제이 님이 나가시면 바로 1위를 거머쥘 거예요!”
드라이어드들 사이에서 나는 제희였지만 아직까지 이쪽 사람들에게 나는 제이였다. 로웰라가 내 역할을 대신할 땐 암호 용도로 나를 제희로 부르게 했지만 그때까지만이었다. 차마 내가 다른 세계에서 온 사람이란 걸 드라이어드가 아닌 이들에게 이해시킬 수 없었다.
그러니 그들은 길드전에서 내게 벌어졌던 일들 중 단편적인 일들에 대해서만 알고 있었다.
“제가요? 아뇨, 이리스라면 모를까….”
“메스키트 한 그루만으로도 다 정리되지 않을까요? 이참에 시들링 기록을 깨 버리는 건 어때요? 시들링이 아이언 비스트였으니 제이 님은….”
“큼큼.”
“아차….”
눈치를 주는 의도를 다분히 가진 에이레네의 헛기침 소리가 들리자 이리스는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