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부터 당신의 망가진 영혼을 회복시킬 거예요. 베스탈리스들의 영혼 깊숙한 곳에 존재하는 건 당신들이 알고 있는 불씨가 아니라 어떠한 균열이에요. 그 균열 너머에 화기의 원천이 있는데 전 그 원천에서 세상을 침입한 ‘불’의 기운을 느꼈어요.”
“그 사실이 알려진다면 베스탈리스는 더욱더 양지로 나올 수 없는 게 아닌가?”
“사실이 그것뿐이라면 그렇겠죠…. 하지만 베스탈리스의 영혼이 손상된 상태이기 때문에 원천에서 쉴 새 없이 뿜어 대는 화기와 열기를 다루는 것에 멈춰 있는 거예요. 그러니 진정한 힘이라고 볼 수 없지요. 영혼을 회복시키면 균열을 통해서 화기가 배출되는 것이 아닌 역으로 화기를 흡수하는 힘을 가지게 돼요.”
그리고 물에 꺼지지도 않고 오직 세계수의 축복과 드라이어드의 힘으로만 끌 수 있는 불을 정화하여 순수한 원소 상태로 돌려 버릴 수 있다. 즉 불의 이질적인 기운을 흡수하여 자신의 영혼의 균열 너머로 보내 버리는 파수꾼 역할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난 이제 베스탈리스이면서도 더 이상 불을 다룰 수 없게 되는 것인가?”
난 에트나가 영혼의 치료를 받은 후에 아주 맑은 빛의 영롱한 불을 만들어 냈던 걸 떠올렸다.
“아뇨. 거칠거나 포악하지 않은, 더 이상 영혼을 상처 입히지 않는 순수한 불의 힘을 사용할 수 있게 돼요.”
“후후, 베스탈리스들에게 신이 있다면 그건 세계수가 아니라 너로군.”
난 스텔라의 손을 잡고 물의 기운을 끌어 올려 그녀의 영혼에 조심스럽게 접근했다. 전대 노멀 필드 가디언을 만난 이후로 이 기운에 대한 정체가 다시금 바뀌었다.
샘의 원천과 동일한 힘을 내는 이 기운은 내가 가진 다이아에서 유래되는 힘이었다. 이 세계에서 다이아는 본래 세계수의 수액이 굳어져 만들어지지만, 이전까지의 난 내가 가진 무한한 다이아가 내게 잠재된 생명력에서 비롯되는 줄 알았다.
하지만 땅굴에서의 일로 그건 생명력이라기보단 내 영혼이 끊임없이 새로운 육체에 다시 태어나며 그 육체가 쌓은 수많은 축적된 시간, 즉 생명과 시간이 결합된 수명의 개념이란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의문이 들었다. 이 기운은 베스탈리스의 화기와 반대되는 찬 기운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기에 처음엔 미미르의 샘과 세계수의 수액이 뜻하는 것처럼 ‘물’의 기운이라 생각했다.
하나 다이아로 결정화된 이 기운의 원천은 ‘시간’이었다. 단순히 물과는 거리가 멀었다.
따지고 보자면 물을 상징하는 쪽은 따로 있었다. 불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베스탈리스처럼 물을 자유자재로 다룰 수는 없으나 그쪽에 친화적인 기운을 가지고 태어나는 ‘넵튜누스’ 가문 사람들 말이다. 이론적으로 넵튜누스들도 베스탈리스의 화기를 낮출 수 있는 힘을 가졌어야 했으나 그런 이야기는 없었지.
그럼 이 기운은… 내가 애초에 생각했던 불과 반대되는 물의 기운이 아니라… 어떤 종류로 정의해야 하는 걸까?
어쩌면 세계수도 베스탈리스들의 화기를 달랠 수 있는 ‘샘’의 힘을 물의 힘이라 규정하지 않는 건 아닐까?
다이아는 이 세계에서 화폐로 사용되지만 이를 정제하여 포션으로 만들기도 하고, 결정화되지 않은 수액은 병에 담기지 않은 고농도 포션이나 다름없었다. 수액의 힘은 드라이어드들의 바크를 재생하고 회복시키는 데 대표적으로 이용된다.
세계수에게서 흘러나오는 수액, 인간으로 치면 체액과 같은 것. 하지만 애초에… 신이 피를 흘린다는 게 말이 되는 걸까? 내가 이 개념에 잘못 접근하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이아는 세계수의 증산 작용으로 인해 빠져나온 수액이 드라이어드의 영혼에 맺히게 되는 것이다. 불의 침입 이후로 이 증산 작용이 더 활발하게 일어나 불이 범람하는 뒤 번대로 갈수록 다이아를 더 잘 벌 수 있는 구조였다.
세계수가 다이아를 많이 뺏기면 빼앗길수록 힘이 약해지며, 가지를 두고 있는 테라리움들은 다이아를 수거해 세계수에 다시 환원하는 일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수액을 뺏기는 정도로 힘이 약해지는 건 조금 아이러니했다. 그건 다쳐서 피를 흘리는 게 아니라 본래 일어나던 작용이 좀 더 촉진되는 정도니까.
어쩌면 세계가 보편적으로 알고 있는 세계수의 수액이라는 게, 사실은 나처럼… 세계수가 축적한 시간… 수명… 그 자체인 게 아닐까?
상처를 낫게 하는, 재생 회복을 시키는 힘. 상처를 낫게 하는 데에는 시간만 한 약이 없었다.
엘더와 나의 다이아를 태운 그래프트만 봐도 비로 형상화되었으나 그건 결국 광범위한 재생 회복의 힘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니 이 기운은 애초에 ‘물’의 기운이 아니라 ‘시간’의 기운이라 정의해야 하는 걸지도 모르겠다.
내 손에서 뻗어 나간 기운이 스텔라의 광활한 영혼에 도달한다. 구석구석 살피는 모든 곳이 엉망진창이었다. 애쉬처럼 망가지기 직전의 폐가와 같은 손상도였다.
불기운이 가장 강한 곳엔 다른 베스탈리스처럼 균열이 존재했고, 마치 괴물이 아가리를 벌리고 있는 것처럼 거대한 크기였다. 그곳에서 독한 화기가 쉴 새 없이 뿜어져 나와 스텔라의 영혼을 엉망으로 만들고 있었다.
시간은 고여 있다기보단 물처럼 흐른다. 고여서 망가져 버린 인삼 군락지에서 필요했던 건 흐름이었고, 그 자리에서 멈춰 죽어 가던 전대 노멀 필드의 가디언을 움직이게 만들었던 것도 흐름이었다. 상처가 낫기 위해선, 재생되기 위해선 필요한 것은 충분한 시간이었다.
죽은 것이 다시 살아나고, 상처에 새 살이 돋고, 다시 올바른 길을 찾아 떠나기 위해 필요한 재생의 시간.
나는 내 기운을 사용해 엉망진창이 된 균열 주위를 복구하며 스텔라의 표정을 살폈다. 그녀는 더없이 평온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 얼굴에서 순한 강아지처럼 눈을 감던 애쉬의 얼굴이 떠올랐다.
“기분은 어때요?”
“최고구나. 이런… 기분을 알게 된 이상… 영혼이 불타 죽는 걸 더 이상 베스탈리스의 명예라고 볼 수 없겠지.”
그 말에 막 치료를 받았을 때의 에트나의 평가가 떠올랐다.
“평범한 사람들은 항상 이런 기분인 건가요? 속에서 치솟는 화가 없으니 가슴이 시원하고, 신경을 예민하게 만드는 감각들도 모두 가라앉았어요. 마치 내 안에 존재하는 모든 화기가 사라져 버린 듯한 속 시원한 기분이 드네요.”
스텔라가 최고라고 평가한 기분은… 평범한 사람들에겐 당연한 보통의 감각이었다.
“참고로 댁의 아드님은 자신이 가진 걸 모두 내어 주겠다고까지 했어요.”
그 말에 스텔라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애쉬가 가진 게 좀 많은데 욕심이라도 내 보지 그랬느냐?”
“글쎄요. 이 세상에서 나만큼 원하는 걸 전부 가질 수 있는 사람은 또 없어서요.”
하하, 처음으로 스텔라가 소리 내어 크게 웃었다.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를 기억해요?”
스텔라의 영혼을 수복하는 일은 에트나나 포르낙스와 달리 쉽지 않았다. 그녀의 영혼은 긴 시간 동안 공들여 망가져 있었기에 더 많은 재생의 시간을 필요로 했다. 그래서 난 그녀를 치료하며 대화를 이어 갔다.
“파라다이스 테라리움에서의 일을 말하는 거겠지?”
“네, 당신이 그곳을 통째로 폭발시키는 바람에 저는 물론 그곳에 남아 있던 모두가 죽을 뻔했었죠.”
새삼 내게 얌전히 손을 맡기고 있는 저 여인이 얼마나 잔악무도한 빌런이었는지 다시 깨닫게 된다.
“제게 애쉬의 앞길을 막을 가장 큰 장애물이 될 거라고 했죠. 그리고 애쉬가 더 크게 성장할 수 있는 발판으로 쓸 거라는 것도요.”
지금의 난 장애물이라기보단 애쉬의 구명줄이 되어 버렸지만.
“장애물까지는 맞으나 발판은 네가 그곳에서 살아남아야 성립이 됐지. 솔직히 정말 살아남을 거라곤 생각 못 했단다. 폭발에서 어떻게 빠져나온다 하더라도 그곳은 데드라인 너머에 지어진 곳이라 단신으로 넘어오는 건 제아무리 실력이 대단한 드루이드라도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지.”
“그리고 살아남아서 결국 이 자리에 있고요.”
“좀 더 치밀하게 박살 내 놓았어야 했으려나?”
마지막은 장난이 다분히 섞인 발언이었다. 그러다 문득 거기서 더 박살 내면 대체 무슨 꼴이 벌어졌을지 섬뜩한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애쉬의 영혼을 살폈을 때 알게 된 사실이 있는데….”
마치 결투라도 벌이는 것처럼 애쉬의 맹렬한 화기를 억눌렀을 때, 갑작스레 그의 기억의 파편을 엿듣게 되었던 일이 떠올랐다.
“선택받은 존재여….”
“그대의 빛을 발견해 줄 누군가가 곧 나타날 것이다….”
무척이나 익숙한 목소리, 그리고 익숙한 대사. 그건 스텔라의 기억의 파편에서도 엿들었던 목소리였다.
“당신이 들었다던 세계수의 계시, 그걸 애쉬도 들은 게 분명해요.”
“선택받은 존재라고 지껄였던 그 목소리를 애쉬도 들었다고?”
일순 내가 살피고 있는 그녀의 화기가 파도처럼 확 튀어 올랐다가 잠잠해졌다. 놀라고 당혹스러운 그녀의 마음을 대변하는 듯했다.
스텔라의 반응을 보니 애쉬가 그녀와 똑같은 신의 계시를 들은 사실에 대해 전혀 몰랐던 것이 분명했다. 애쉬는 일부러 스텔라에게 숨겼던 걸까, 아니면 스텔라와 달리 계시에 큰 의미를 두지 않고 무시했던 걸까?
“하하….”
그녀의 조소가 방 안에 낮게 울렸다.
“참… 신이란 건 재밌는 짓을 하는구나.”
스텔라는 때를 놓쳤다는 점술을 받았고 그녀의 아들인 애쉬가 그대로 계시를 물려받았다. 그리고 우연찮게도 애쉬는 나와 비슷한 나이에 은퇴한 스텔라와 다르게 동시대에 활동하는 자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