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99화 (499/604)

“28번째 테라리움은 어닝이 망쳐 놓은 곳이 아니더냐. 인페르노는 전 행정 관리원은 물론 28번째 테라리움의 모든 것을 손에 넣기 위해 작정하고 덤벼들었었지. 결과적으로 모든 걸 네게 빼앗겼지만, 그런 불모지를 지금과 같은 낙원으로 만들어 낸 너라면 내 신으로 삼아도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단다.”

그녀와 의식의 대화를 나눌 때, 당신을 불러 놓고 오랫동안 찾지 않는 신 대신 나라는 신은 어떠냐 물은 적이 있었다. 그리고 지금 그 대답을 듣게 되었다.

“전 마냥 자비롭지만은 않아서 당신이 새로운 삶을 살겠다 각오했어도, 인페르노였단 점을 잊진 않을 거예요. 인페르노로 활동하며 저질렀던 모든 악행에 대한 죗값은 치러야 해요.”

“피할 생각은 없단다.”

그녀가 직간접적으로 저지른 모든 일에 대해 속죄하려면 대체 얼마나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할까?

“전에 우리가 마지막으로 나눴던 대화를 기억해요? 물론 지금처럼 얼굴을 마주 보고 하는 게 아니라 우리의 정신이 이어져서 나눴던 대화 말이에요.”

“그래, 베스탈리스를 위한 테라리움을 만들겠다고 했지. 그리고 세계수를 끌어내릴 거라고도.”

그녀와 눈을 마주하니 그날, 불길에 휩싸인 공간에서 위태로이 나누던 모든 대화가 떠올랐다.

“애쉬의 검에 맞고 눈을 감은 이후 아주 긴 꿈을 꾸었단다. 지금까지 살아온 내 모든 인생이 차근차근 재생되었고 나중엔 겪어 보지 못한 아주 먼 미래의 모습도 보게 되었지. 내가 죽고 난 이후의 모습까지. 베스탈리스들이 더 이상 핍박받거나 숨어 살지 않고 다른 이들처럼 평범하게 삶을 영위하는 모습들이었어. 어쩌면 마지막으로 의식이 끊기기 전, 네가 내게 불어넣었던 바람이 촉진제가 되어 내 희망을 타오르게 만든 걸지도 모르지.”

스텔라는 28번째 테라리움을 보고 꿈을 봤다고 했다.

“그러다 잠에서 깨어났을 때 바로 그런 생각이 들더구나. 내 고집이, 내 그릇된 믿음이 후세대의 베스탈리스들이 행복해질 수 있는 기회를 늦추고 있다는 것을. 그 옛날, 신이 내게 별이 될 존재라고 했었지. 때가 된다면 밝게 빛을 내는 내 존재를 발견해 줄 누군가를 만나게 될 거라고.”

세계수가 직접 스텔라에게 내렸다던 계시의 내용이었다.

“오랜 시간이 지나 미래를 볼 줄 아는 꽃은 내게 말했지. 내가 그리는 미래는 오지 않을 거라고. 때가 어긋나며 차례가 미뤄졌다고.”

미래를 볼 줄 아는 꽃이라 하면….

“또한 세계수는 그날 이후 어떠한 답도 주지 않았고.”

그녀는 그 후 오랫동안 말을 멈추고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그 후에 이어질 이야기는 안 하느니만 못하다는 것처럼 말이다.

“난 이제 그때가 되었다고 생각한다네.”

“그럼… 협조하실 거란 이야기시죠? 베스탈리스들을 설득해 양지로 데려오는 역할을 맡아 주실 수 있나요?”

“그날의 약속을 잊지 말게나.”

“네, 꼭 베스탈리스들을 위한 테라리움을 만들어 보일게요.”

비로소 숙적과 같았던 인페르노와의 개선의 길이 열렸다.

첫 만남은 카나비스 드라이어드 사건을 통해서였지. 그땐 그 뒤에 그렇게 비밀스러운 조직이 있을 줄은 전혀 몰랐었다. 그 후 드루이드와 상반되는 불을 다루는 종족 베스탈리스에 대해 알게 되고 그들이 단순히 불과 친화적인 점 때문에 겪게 된 핍박의 역사를 접했다. 또 지금에 이르러서야 그들 또한 세계를 위협하는 침입자 불을 해치울 수 있는 자들임을 알게 되었다.

스텔라가 협력한다면 더 많은 베스탈리스들이 그 진가를 발휘하도록 끌어 올 수 있을 것이다. 벅찬 감정이 든다. 그러고 보니 스텔라는 아직 베스탈리스들이 침입자 불을 해치울 수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겠지.

“베스탈리스들이 양지로 나오는 일이 더 쉬워질 것 같아요.”

난 그녀에게 미미르의 가족들에게 일어난 일을 이야기해 주었다.

“베스탈리스들에겐 불의 기운을 정화할 수 있는 힘이 있어요.”

“그건… 믿기지 않지만 네 말이니 믿어는 보겠다.”

“인페르노에 정보를 전담하는 조직, ‘내밀한 불꽃’이 있다는 걸 알고 있어요. 또한 그곳에서 이탈자가 많다는 것도요.”

“넌 정말 많은 것을 알고 있구나. 그 나비 녀석의 짓이겠지?”

파필리온이 죄다 분 것은 맞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걘 그곳에서 이탈자가 많이 발생한 이유가 ‘너무 많이 알아 버렸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인페르노에 더 이상 있을 수 없게 된 이유, 그건 신념을 뿌리째 흔들 정보를 접하게 되었기 때문이죠.”

“세계수가 미미르의 샘을 만들어 냈다는 것을 말하느냐?”

우리의 정신이 이어진 대화에서 스텔라는 내게 미미르의 샘에 대한 진실을 듣게 되었다. 인페르노가 자신들을 버렸다 생각하여 증오하던 세계수가 알고 보니 더 많은 이들을 살게 한 미미르의 샘을 만들어 냈다는 것을.

“네, 그것과 더불어… 내밀한 불꽃에 속해 있던 자들은 어쩌면 베스탈리스에게 정화의 힘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 아닐까요? 베스탈리스의 영혼은 많이 망가져 있어서 정화의 힘을 발휘할 수 없었어요. 하지만 제가 물의 기운으로 치유하자 힘을 제대로 쓸 수 있게 되었죠. 그렇다는 건 어쩌면 지금처럼 영혼이 망가져 있지 않은, 드루이드가 등장하기 이전의 먼 고대에는… 정화의 힘을 아무렇지도 않게 사용했다던 정보 같은 걸 손에 넣은 게 아닐까요?”

불과 친화적이란 이유만으로 배척당했는데 알고 보니 침입자 불을 해치울 수 있는 또 하나의 종족이었다는 사실. 오히려 환대받아야 할 입장이었는데 얼마나 억울했을까. 하나 그 억울함을 풀고 싶어도 이미 망가진 영혼으로는 정화의 힘을 발휘할 수 없어 증명할 길도 없었겠지.

베스탈리스의 신념의 근간을 흔드는 진실을 알게 된 스텔라는 혼란스러워 보였으나 금방 차분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그녀는 이미 어떠한 이야기를 듣더라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제 와서 분노와 억울함을 표출해 봤자 그간의 불합리를 보상해 줄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그녀가 과거의 스텔라에 머물러 있었다면, 인페르노를 휘둘러 더욱더 과격한 행동을 일삼았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그녀는 나아가려고 마음먹은 후였다.

“내밀한 불꽃은… 세상이 돌아가는 정보를 수집하는 것 외에 고대부터 존재했던 베스탈리스의 역사를 추적하는 일도 맡았었지.”

스텔라의 말을 듣고 생각했다. 어쩌면 나 역시 그 정보를 찾게 된다면 베스탈리스들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정보를 손에 넣은 것도 그리고 조직 내에 이를 알리지 않고 도망간 것도 이해가 돼. 사실을 알아도 증명할 길이 없으니 조직 내에선 반란 분자로 찍혔겠지.”

증명할 길이 없었을 거란 생각은 나와 동일했다.

“하지만 정보를 전달했어도 크게 변하는 건… 없었을 거다.”

조금은 지친 목소리였다.

“우릴 뭉치게 하고 움직이게 만드는 건 분노의 힘이었으니 이를 원동력으로 표출하는 것만이 가장 원론적인 행동이라 바뀌려 하지 않았을 거야.”

스텔라는 깍지를 낀 채 의자 등받이에 깊숙이 몸을 기댔다.

“자, 내게 절망만을 선사하려 그런 이야기를 한 건 아닐 테고. 양지로 나오는 일이 더 쉬워질 것이라 했으니…. 말을 꺼낸 건 네게 해결 방법이 있기 때문이겠지?”

“네, 제 힘으로 베스탈리스들에게 정화의 힘을 되찾아 줄 수 있어요.”

그녀의 입가에 가벼운 미소가 떠올랐다.

“설레는구나. 과연 어떤 힘일지.”

지금쯤 등장해 줘야 할 존재들이 있었다. 난 핸드폰을 꺼내 무한 다이아 화면을 띄웠다. 그러자 에트나와 포르낙스를 상대했을 때와 달리, 난쟁이들이 핸드폰 경계 너머로 얼굴만 빼꼼 내밀고 스텔라를 바라보고 있었다.

난쟁이들의 그런 모습에 난 조금 놀랐다. 천둥벌거숭이처럼 행동하는 난쟁이들이 경계라는 걸 할 줄 알았다니. 오밀조밀 모여 둥근 눈으로 스텔라를 바라보기만 할 뿐, 이전처럼 앞다투어 밖으로 나오려는 모습은 없었다.

자세히 보니 이들이 스텔라에게 위협을 느끼고 숨은 건 아니라는 느낌을 받았다. 그들은… 재고 있었다. 이건 마치 난쟁이들이 내게 말을 걸기 위해 앞다투어 뛰쳐나오기 직전의 모습과 같았다.

난쟁이들은 서로 누가 스텔라의 파트너가 될지 눈치싸움을 벌이고 있었던 것이다. 이 또한 놀라웠다.

“작고 하찮은 것들이로군. 조금만 힘을 줘 누르면 금방 짜부라질 것 같네.”

조금 소름 끼치는 평가였다. 확실히… 대마왕 같은 스텔라가 보기에 엄지손가락만 한 우리 난쟁이들은 아주 하찮게 보이겠지.

“이 아이들은… 제 영혼의 권속 같은 거예요. 세계수에게 드라이어드가 그러하듯 이 아이들이 보조를 해 줄 거예요. 처음에는 한 아이와 파트너를 맺을 건데….”

스텔라를 구경하는 난쟁이들의 뒷모습을 보니 금방이라도 달려갈 것처럼 작은 엉덩이를 씰룩거리고 있었다.

베스탈리스 중에서도 아주 강한 이의 첫 파트너가 되는 자리였다. 난쟁이들을 꽤 귀엽게 여겨 준 에트나나 포르낙스와 달리 기질이 센 스텔라가 그들을 어떻게 다룰지도 모르는데, 겁을 먹기는커녕 어떻게든 한자리 얻고 싶어서 안달복달이었다.

다이아를 추가 생산하는 자리에 막 TO가 나서 흥분한 건지, 아니면 척 보기에도 어마어마하게 강한 기운을 풍기는 스텔라에게 모험심이 자극되는 건지는 모르겠다. 어찌 됐든 누구 하나 스텔라를 거절하는 이 없이 모두가 원하고 있으니 다행이었다.

“드라이어드와 같은 존재라…. 후후후, 아주 재밌군.”

“음, 그런데 드라이어드처럼 대신 필드에 나가 싸운다거나 파트너를 지키는 포지션은 아니에요. 그저 아주아주 바쁘게 제 할 일을 하는 모습만 보게 될 거예요.”

“자신이 맡은 일을 열정적으로 하는 것만큼 보기 좋은 건 없지.”

그 말이 신호탄이 된 듯 폰과 현실의 경계에 머리만 내밀고 구경하고 있던 난쟁이들이 일제히 밖으로 뛰쳐나왔다.

[1번 난쟁이! 곡괭이질을 굉장히 잘해요!]

[아앗, 제가 1번 난쟁이예요. 생산을 효율적으로 관리할 수 있도록 열심히 연구를 잘해요!]

스텔라는 테이블 위에서 방방 뛰며 자신을 어필하는 난쟁이들을 알 수 없는 눈으로 구경할 뿐이었다.

“이건 내가 키워야 하는 건가? 먹이도 주고? 이렇게 작아서야 한눈팔다 밟아 버릴지도 모르겠는 걸.”

“아, 동물이 아니라 정령이에요. 그리고 지내는 곳은 이제 만들 거예요.”

난쟁이들의 필사적인 어필을 뒤로하고 난 스텔라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편한 자세를 취하고 있던 그녀가 내가 다가오자 허리를 세웠다.

“전에 당신이 누워 있을 때 이미 영혼을 살펴본 적이 있긴 해요. 당신은 별로 달갑지 않게 여길 수도 있겠지만, 당신의 기운은 애쉬와 굉장히 비슷한 데다… 영혼이 망가진 정도도 비슷해요.”

“뭐, 모자 사이니 어쩔 수 없지. 그 아이가 나를 찔렀다고 해도 내가 그의 엄마인 건 변함이 없단다.”

애쉬를 원망하지 않는다는 뜻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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