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둘이 있을 방의 문 앞에 당황한 표정으로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대화를 끊을 수 있는 적당한 타이밍에 들어가려고 했지만, 차마 끼어들기 힘든 대화의 주제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출신이란 건 사람을 평가하는 데 있어 가장 덧없는 부분이라 생각하지만 베스탈리스는, 아니 인페르노는 내 고향을 망가뜨리고 부모님을 잃게 만든 주범들이니까 내 마음의 한구석엔 죽을 때까지 원망이 사라지지 않고 자리 잡고 있을 테죠. 하지만 이건 사람이라면 누구나 어쩔 수 없는 부분이라고 생각해요. 다만 이 원망이 비집고 나올 틈이 없도록 빈번히 들여다보느냐 그대로 묻어 두느냐의 태도 차이가 있겠죠.”
“너는 그렇게 쉽게 할 수 있는 걸 난 내 평생 동안 빈번히 들여다보고 살았으니 지금 우리의 상황이 이렇게 다른 거겠지.”
드루이드도 아닌 평범한 사람인 에우노미아가 스텔라를 끌어내는 위험한 임무에 참가하게 된 배경엔, 그녀가 전전대 플로라를 지낸 폴리움텔러의 가문의 사람이었다는데 있었다.
에우노미아, 디케, 에이레네 세 자매는 과거 사고를 당해 부모를 잃었고 그 과정에서 첫째인 에우노미아도 죽었다고 생각한 채로 따로 지내게 되었다. 어린 나이에 사고를 겪은 데다 고향 집까지 불타 없어져 버려 추억을 가슴속에 묻고 살았어야만 했다. 그 후 세 자매가 상봉하게 되며 그들의 잃어버린 과거를 되찾고자 움직이게 되었다.
세 자매의 과거 이야기엔 비밀에 싸인 어머니가 등장하는데, 좋지 않은 살림에도 옷장 가득한 고급스러운 옷들과 평소 어머니의 고귀한 성품, 교육을 중시하는 태도에 어쩌면 그녀가 결혼하기 전 대단한 가문의 사람이 아니었을까 하는 추측이 나오게 되었다.
세 자매에겐 모든 일의 원흉인 데다 꼴도 보기 싫을 물건이지만 어머니의 유일한 유품인 사파이어 귀걸이가 단서가 되었고, 열심히 추적한 끝에 어머니의 가문을 찾게 되었다. 놀랍게도 그 유명한 폴리움텔러가 있는 유서 깊은 집안이었다.
그곳에서 셋은 우연히도 스텔라에 대한 예언을 한 폴리움텔러가 있음을 알게 되었고, 에우노미아는 이를 이용해 자신이 스파이가 되겠노라 선언했다. 물론 당시에는 예언의 주인이 단순히 인페르노에서 한자리 맡고 있는 인물이라고만 생각했고, 원로급인 스텔라일 줄은 몰랐기에 무모한 계획을 실행할 수 있었지만.
어쩌면 오히려 상대의 정확한 신분을 몰랐기에 더욱 대담히 그녀를 꾀어낼 수 있었던 걸지도 모른다.
물론 이 배경은 자매에게 직접 들어서 알고 있었지만, 그들이 과거를 찾는 여정에서 고향을 잃은 사건에 인페르노의 개입이 있었다는 사실까지 알아냈을 줄은 몰랐다. 정말… 여기저기 악행을 저지르고 다녔군. 그들은 태양의 보석인 사파이어를 캐내어 조직의 자금줄로 쓸 생각이었겠지.
“그럼 대화는 이쯤 할까? 밖의 손님이 들어올 타이밍을 못 잡고 있는 듯한데.”
스텔라는 내가 온 것을 진작 알고 있었나 보다.
“죄송해요. 본의 아니게 엿듣게 되었네요.”
어쩔 수 없이 문을 열고 들어가니 칸막이를 사이에 두고 나란히 앉은 에우노미아와 스텔라가 보였다. 에우노미아를 위한 최소한의 방어책으로 면담을 위한 벽을 나눠 놓은 듯한데, 스텔라의 전력이라면 있으나 마나 한 설비였다.
“그다지 숨길 이야기도 없었는걸요. 전 이만 가 볼게요. 두 분 이야기 나누세요. 방해하지 못하도록 주변을 잘 지킬게요.”
대화가 어중간하게 끊겼음에도 에우노미아는 미련 없이 일어나 자리를 비켜 주었다.
“당신은 60번째 테라리움에 있어야 할 텐데요.”
난 에우노미아가 앉아 있던 의자에 자리를 잡은 후 스텔라에게 말을 건넸다.
“그것도 중증 환자로 극진히 치료를 받고 있어야 했는데 말이에요.”
“그 점이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테라리움을 빠져나오는 데 많은 도움이 되었지. 쉽사리 움직이지 못할 거라 생각하고 주변을 오로지 의료진들로만 채워 놓았으니 날 막을 수 있었겠느냐.”
“확실히 판단 미스네요. 이렇게 빨리 회복할 줄은 몰랐어요.”
정말로 다 죽어 가던 그녀가 멀쩡히 걸어 돌아다닐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적어도 그렇게 몇 달은 병상에 누워 치료를 받아야 할 거라고 생각했다. 의료진들의 생각도 동일했고.
그런데 잠깐 눈을 뗀 사이 운신이 가능할 정도로 회복한 것도 모자라 탈주까지 감행하다니.
하지만 현재 스텔라의 겉모습은 빈말로라도 완쾌했다고 보기 어려웠다.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의 장대한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시들기 직전의 난처럼 보였다.
핏기 하나 없는 창백한 피부에 머리카락은 윤기를 모두 잃고 지푸라기처럼 푸석해 보였다. 깊게 팬 주름엔 세월과 시름이 가득했고 깡마른 팔은 금방이라도 부러질 것 같았다.
그녀는 단순히 사경을 헤매다 일어난 것이 아니었다. 생명력을 모두 잃어버린 것처럼 보였다.
“먼저 로웰라를 구해 줘서 고마워요.”
“불길 속을 걸어 들어가는 일 정돈 쉬우니까.”
“소중한 목숨을 구한 거예요. 당신이 그런 일을 했다는 게 믿기진 않아요. 아직도 길드전이 벌어졌던 그날, 악마 같던 당신의 화염을 잊지 못해요.”
“글쎄, 죽다 살아나니 사람이 변했는지도 모르지.”
스텔라는 정말 변한 걸까?
“에우노미아가 그러더군. 할머니에게 듣기를 사람들은 정해진 운명을 가지고 태어난다고. 사람들의 정해진 운명은 한 장의 꽃잎과 같고 이 꽃잎들이 한데 모여 완성된 꽃이라 일컫는 미래를 만든다고 믿지. 어떠한 꽃이 될지는 이미 정해져 있으니 그 꽃을 이루는 꽃잎 역시 정해져 있는 격이라는 건데, 해바라기를 이루는 꽃잎이 붉은 장미 꽃잎일 순 없는 노릇이지 않은가? 꽃잎을 통해 미래를 읽는 폴리움텔러 가문이니 그런 식으로 운명이 미리 정해져 있다고 믿는 것도 이해는 가.”
운명과 예언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마다 마거리트가 떠오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녀가 아직도 내게 돌아오지 않는 건, 나의 미래가 바뀌지 않았다고 믿고 있기 때문일 테니.
하지만 난 운명이 정해져 있다는 말은 별로 믿지 않았다. 그리고 이 이야기를 하는 스텔라도 딱히 믿는 눈치는 아니었다. 그저 내게 흥미로운 이야기를 전해 주고 싶은 것뿐, 그 이상은 아닌 듯했다.
“하지만 절대불변한 운명도 바뀌는 순간이 있는데, 그건 꽃에서 꽃잎이 떨어져 나간 순간이지.”
그 말을 할 때 무척이나 마음에 드는 시구를 발견했을 때처럼 잠시나마 스텔라의 눈빛이 태양처럼 반짝거렸다.
“꽃잎이 꽃을 이룰 때는 중요하나 떨어져 나가 땅을 구를 땐 그것이 어떤 꽃잎인지 신경 쓸 필요가 있겠는가? 땅바닥에 떨어진 순간부터 그것은 생명이 아니라 한낱 낙엽 쪼가리에 지나지 않는데.”
나는 스텔라의 말을 들으며 땅에 떨어진 꽃잎들을 상상했다. 위로는 화사하고 탐스러운 꽃이 존재하나 그 밑으로는 흙바닥을 뒹구는 꽃잎들을.
“꽃에서 탈락한 건 죽음을 뜻하지. 피어 있는 미래에서 이탈한 거니까 운명도 끝난 거야.”
“절대 불변한 운명이 바뀌는 순간은 죽음이 있어야 가능하다는 건가요?”
“단적으로는 그렇지. 운명을 영위할 생명이 끝났으니 운명도 끝난다, 아주 이해하기 쉽지 않은가? 하지만 난 꽃잎이 땅에 떨어졌다고 끝났다고 생각하지 않아. 물론 내게 이야기를 전해 준 에우노미아도 그렇게 생각한다네.”
스텔라는 잠시 숨을 고르고 말을 이었다.
“떨어진 꽃잎은 땅에서 새로운 꽃을 피워 낸 거니까. 비록 불규칙적인 모양에 이따금 다른 꽃에서 흘러온 꽃잎도 섞여 색깔도 모양도 제각각일 수도 있겠지만, 세상에는 이미 수많은 형태의 꽃이 존재하는데 꽃잎이 한데 모여 이룬 걸 꽃이라 부르지 못할 이유는 또 없지. 떨어진 것들끼리 새로운 미래를 만드는 거라네.”
붉은 데이지 꽃잎과 새하얀 엘더의 작은 꽃잎, 보랏빛의 둥근 바곳 꽃잎 등이 떨어져 옹기종기 모여 있는 이미지가 떠올랐다. 꽃잎들이 한가득 모여 있으나 그것들을 하나의 꽃이라 보기엔 어렵지. 하지만 잘 살펴보면 꽃의 모양새를 하고 있을 수도 있다. 꼭 동그랗게 규칙적으로 모여 있어야만 꽃 모양이라 할 수는 없으니까.
“그러니 꽃잎이 탈락하기 위해 필요한 죽음에 대한 단어 뜻도 다시 정립해야지. 죽음이라 부를 수 있는 강렬한 경험, 그건 정말로 생명이 위급한 순간일 수도 있겠지만 살면서 다져 온 가치관을 송두리째 뒤엎는 거나 완전히 새로운 길을 나아갈 각오와 결심 또한 과거의 나를 죽이는 일이니 죽음이라 볼 수 있겠지.”
스텔라가 말하는 죽음은 부정적인 단어가 아니었다.
“중요한 건 그 행위 뒤에 따라오는 재탄생이니라. 새롭게 태어나는 것, 꽃에서 떨어져 나와 땅 위에 새로운 꽃을 형성하는 것. 그러니 운명은 절대 불변한 것이 아니야. 이전의 나를 버릴 수 있다면 새로운 나에게 새로운 운명이 주어진다고 볼 수 있는 거라네.”
내가 제이를 버리고 제희가 된 것처럼.
“그리고 난 너를 만나고 내게 새로운 운명이 생겼다고 믿고 있지. 어떤가, 자네. 땅에 떨어진 꽃잎에 불과한 나를 자네는 꽃이라 불러 줄 수 있는가?”
“꽃이라 불러 달라뇨…. 그런….”
“그래. 베스탈리스인 내가 꽃이라기엔 어울리지 않는 거지?”
“아뇨! 그런 뜻이 아니라….”
그녀가 내게 웃으며 농담도 건넬 수 있게 되다니. 어쩐지 지금의 스텔라는 여러 면에서 초탈한 것처럼 보였다. 정말로 죽다 살아나서인지, 아들에게 배신을 당해서인지, 그것도 아니면 그녀가 말했던 것처럼 과거의 자신을 버리겠다고 마음먹었기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마지막까지 독이 가득한 화기를 내뿜던 그녀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지금의 그녀를 보니, 애쉬가 등장하지 않았다면 우리의 관계 진전은 더 빨리 이뤄졌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고 싶은 말이 많아 보이는 얼굴이구나. 네가 허락하여 내게 생명의 시간이 더 생겨났으니 너 좋을 대로 사용하거라.”
드디어 아무런 방해 없이, 시간의 쫓김 없이, 생명의 위협 없이 그녀와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시간이 찾아왔다.
“왜 60번째 테라리움에서 도주하신 건가요? 그대로 숨어 버릴 작정이었다면 굳이 앞 번대까지 올라오실 필요는 없었을 텐데요.”
물론 그녀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그녀에게 잠적할 마음은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래도 궁금했다. 왜 하필 28번째 테라리움으로 오게 된 걸까?
“딱히 도망칠 생각은 없었단다. 그저 말리는 자가 없기에 가볍게 산책 나오듯 밖으로 나간 거지.”
엄청난 의료 기구에 휩싸여 간신히 생명줄을 유지하고 있던 그녀가, 갑자기 제 발로 일어나 걸어 나갈 줄은 그 누구도 몰랐기 때문이었겠지.
“발길 닿는 대로 걷다 보니 문득 궁금해지더구나. 내게 나의 신이 되어 주겠다고 말한 이가 가꾸는 테라리움이 말이다. 신이란 세계를 가꾸는 존재인데 하물며 세계에 한참 못 미치는 작은 테라리움 정도는 낙원을 일구어 놨을 거라 생각했지.”
내가 28번째 테라리움을 소유하고 있다는 정보는 언제부터 알게 된 걸까? 60번째 테라리움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전부 28번째 테라리움에서 차출되어 갔으니 그들이 이야기하는 걸 들은 걸까?
“나 또한 보통의 테라리움과는 비교도 하지 못할 크기의 면적을, 거대한 낙원으로 만드는 걸 거든 적이 있으니 겉치레 정도는 분간할 수 있지. 그것이 만들어진 낙원인지, 모두가 인정하는 이상적인 낙원인지.”
그녀가 만든 거대한 낙원이라면 파라다이스 테라리움을 말하는 거였다. 스텔라는 그 프로젝트의 주요 관계자라고 볼 수 있었다. 볼거리로 전락한 드라이어드들과 그곳을 유지하기 위해 인간 연료처럼 갇혀 있던 드루이드들이 떠올랐다.
그곳이 어떻게 낙원이라 볼 수 있겠는가? 내 테라리움을 그런 곳과 비교하는 것 자체가 불쾌할 정도였다.
“제아무리 금을 바르고 보석을 두른다 한들, 그곳이 정말 낙원일까? 만약 28번째 테라리움에 방문했을 때 허울뿐인 광경만 보게 된다면 그대로 교단으로 돌아가려고 했단다.”
“그래서 무얼 보셨나요? 교단으로 돌아가지 않으셨으니 테라리움이 낙원처럼 보였던 건가요?”
“평범한 테라리움이더구나.”
실망이 담긴 목소리는 아니었다.
“평범하기가 가장 어렵지.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가장 이상적인 건 평범한 것이라고 생각한단다. 그곳엔 모두가 어려움 없이 잘 지내고 얼굴엔 웃음과 여유가 가득하며 그늘진 곳 없이 활기가 가득했지. 그래. 우리 베스탈리스들은 늘 그런 삶을 살기를 희망해 왔다. 평범과 동떨어진 우리들이 가장 원했던 건 평범한 거였어.”
스텔라는 입가에 미소를 띠며 가볍게 눈을 감았다 떴다.
“내가 본 것은 꿈이었단다. 사람들이 최고라 칭하는 테라리움들 중 1번째 테라리움처럼 압도적인 위용을 자랑하는 것도 아니었고 2번째 테라리움처럼 화려한 예술품들로 가득한 낭만적인 곳도 아니었지. 그저 평범했어. 그 어느 곳도 견줄 수 없을 만큼. 모난 곳 하나 없는 원과 같은 곳이란 느낌을 받았지. 지금 생각해 보면 그런 곳을 낙원이라 부르는군. 맞아. 난 낙원을 보았다. 그래서 계속 테라리움 주변을 맴돌다가 네 길드원을 구하게 되었구나.”
스텔라가 28번째 테라리움을 낙원이라 말하고 있었다. 베스탈리스들이 꿈꾸던 평범한 삶을 빼다 박은 곳이라며. 그녀의 입에서 내 테라리움에 대한 칭찬을 들으니 뿌듯한 마음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