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퍼의 방정맞은 목소리가 멀리서부터 들려왔다. 마침 곧바로 내 도착을 알아차린 길드원들의 등장으로 자리를 떠날 구실이 생겼다.
“그럼 잘 부탁드려요!”
그들이 더 거절하지 못하도록 그대로 과수원으로 향했다. 테라리움은 눈을 뗄 때마다 급속도로 발전하고 있었다. 그래서 다시금 이 테라리움을 세계수에게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아까워 미칠 것 같았다. 아냐, 사서 고민하지 말자. 괜한 걱정 하지 않기로 했잖아?
“데이지 드라이어드에게서 대략적인 이야기는 들었어요. 로웰라를 먼저 만나 볼 수 있을까요?”
마중은 이리스와 제퍼 그리고 시들링이 함께 왔다. 이상하게도 시들링을 보자마자 엘더의 고백이 어렴풋이 떠오르는 바람에 화들짝 놀라 시선을 피했다. 이에 이리스와 눈이 마주치자 그녀는 대뜸 내게 고개를 숙이며 사과했다.
“죄송해요. 제 불찰이에요. 둘만 만나게 해선 안 됐는데. 적어도 제가 함께 있었다면 로웰라가 폭발에 휘말리지 않았을 거예요. 제겐 방어형 드라이어드가 있으니 위험에 대처할 수 있었을 텐데.”
“그게 왜 이리스 탓이에요? 원인은 그 스토커에게 있는데.”
“미끼 작전은 전부 제가 계획하고 실행했으니까요. 전 좀 더 로웰라의 안전에 신경 썼어야만 했어요.”
“그러지 말아요. 모두가 피해자예요. 확실한 가해자가 있는 사건에 자신을 자책하지 말아요.”
“그렇지만….”
“이리스의 논리대로라면 로웰라에게 대리 역할을 맡긴 제 잘못이 가장 크겠네요.”
“헙. 아닙니다.”
나 역시 비슷하게 로웰라에 대해 죄책감을 가졌으므로 이리스의 생각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많은 고민 속에 놓인 현재의 내가 내린 결론은 구태여 영양가 없는 고민을 해서 정신력을 낭비하지 않는 게 좋다는 것이었다.
“이해해요. 하지만 정말 이리스에게 잘못은 없으니 너무 고민하지 말아요.”
우린 곧바로 로웰라가 입원 중인 의료원을 찾았다. 그나마 테라리움이 발전하여 적당한 의료시설을 구비하고 있던 게 다행이었다.
“행정 관리원님, 오셨군요. 연락이 되지 않아서 걱정했습니다.”
병실 앞에서 보좌관인 디케와 에이레네를 만났다. 똑똑한 그녀들은 내가 테라리움에 도착하자마자 어디로 향할지 바로 알아차린 것이다.
“제가 갑자기 벌을 사용하지 못하는 상태가 되어서 많이 답답하셨겠네요. 당분간 테라리움에 머물며 보고를 받을게요.”
“네? 완전히 벌을 사용하지 못하게 되신 건가요? 잠깐 문제가 있었던 게 아니었어요?”
듣고 있던 이리스가 놀란 목소리로 이야기에 끼어들었다.
“정확한 이유는 모르지만 전 앞으로 벌을 이용할 수 없게 되었어요. 그러니 다른 연락 수단을 찾기 전까진 데이지가 대신 연락책을 담당할 예정이에요.”
“혹시 몰라서 양봉업자분들을 미리 섭외해 놨어요. 마침 테라리움에 자리를 알아보고 계시는 중이라 오래 머무실 것 같으니 시간이 되신다면 현재 행정 관리원님의 상태에 대해 논의해 보는 게 어떨까요?”
양봉업자라면 메시지용 벌을 기르는 사람들이겠지. 역시 내가 부탁하지 않아도 미리 일 처리를 하는 그녀들이 대견했다.
“그럴게요.”
이야기를 끝낸 후 병실 문을 열자 침대 위에서 윗몸 일으키기를 하고 있는 로웰라와 정통으로 마주쳤다.
“안정을 취해야지 뭐 하고 있는 거야!”
놀라서 굳어 버린 로웰라를 향해 이리스의 걱정 어린 잔소리가 쏟아졌다.
“아니… 계속 누워만 있자니 갑갑해서…. 그것보다… 언니 돌아왔구나! 난 괜찮아!”
로웰라가 황급히 주제를 바꾸기 위해 내게 인사를 건넸다.
“무사해서 다행이야. 스텔라가… 구조했다고 들었는데.”
팔팔한 그녀를 보니 안심이 되었다. 비록 팔과 다리 곳곳에 거즈를 달고 있지만 운신이 불편할 정도로 다친 것 아닌 듯했다. 폭발에 의해 머리카락이 타 버렸는지, 나처럼 길었던 머리카락이 반토막이 되어 있었다.
“엄청난 우연이었지. 이대로 죽는구나 싶었거든. 엉겅퀴와 레몬밤이 최선을 다해 날 지켰지만 불길이 워낙 거세서 말이야. 그런데 그 활활 타오르는 불을 뚫고 아무렇지도 않게 사람이 걸어올 땐… 지옥에서 날 데리러 악마가 온 줄 알았어.”
“스텔라가 탈주한 건 큰일이긴 하지만 그래서 널 구할 수 있었으니 아이러니하긴 해. 어쨌든 고생했어. 그러고 보니 범인의 인상착의를 봤다고 했지?”
내 말이 끝나자마자 옆에 있던 디케가 로웰라의 증언을 토대로 만든 몽타주를 내게 건네주었다.
“이건….”
“남자였고 회색 머리에 완전 험악한 인상이었어. 몇 날 며칠은 못 먹은 것처럼 마르기도 했고. 눈에 생기가 하나도 없더라고.”
낯익은 남자였다.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얼굴이었다.
“혹시… 둘 다 이 남자를 기억하지 못하는 거야? 우리 만난 적 있잖아.”
“기억이 나지 않는다.”
“응? 만난 적이 있다고? 하지만 딱히 떠오르는 얼굴이 없는데….”
시들링은 워낙 성격도 관심도 단적인 사람이라 그렇다 치더라도 로웰라까지 이 남자를 알아보지 못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은둔자의 정원의 벽화를 기가 막히게 잘 베껴 내는 능력이 있으면서도 사람 얼굴을 기억하는 데에는 좀 약한가?
물론 처음 만났을 때가 밤이었기도 하고 이 자의 인상이 극단적으로 변하긴 했다. 그때와의 공통점이라곤 특징이 되는 회색 머리밖에 남지 않았을 정도였다. 하지만 난 그때의 기억이 워낙 강렬해서 결코 잊을 순 없는 사람이었다.
몽타주 속의 인물은 더쉬맨이었다. 바로 데이지를 솎아내기란 명목으로 버렸던 남자. 나와 로웰라, 시들링이 함께 해안 테라리움으로 향하던 중 만났었지. 그날 나와 더쉬맨은 자존심을 걸고 1:1 드루이드 결투를 벌였다.
결과는 그의 패배였다. 무려 그의 손으로 버린 내 데이지로 전설을 피워내면서 그를 이겼다.
“더쉬맨이잖아. 나와 대결했던.”
그때의 일을 축약해서 설명하니 그제야 로웰라가 기억난다며 큰 소리로 박수를 쳤다.
“세상에… 어떻게 못 알아봤지? 완전 다른 사람처럼 느껴졌어. 그런데 왜 그 사람이 언니를… 아, 이해했어. 그때 결투에서 지고 앙금을 품었구나.”
“잠시만요.”
이야기를 듣고 있던 이리스가 눈살을 찌푸리며 끼어들었다.
“설마 단순히 드루이드 결투에서 졌다고 죽도록 쫓아다니고 끝내 자폭까지 했다고요? 그러면 세상은 결투에 진 드루이드들로 인해 매일 살인 사건이 일어났을 거예요. 무슨 그런….”
“자존심을 많이 상하게 만들긴 했어요. 더구나 지면 무조건 한 가지 명령을 따라야 된다는 조건이 붙었으니 지레 부담을 가진 걸 수도 있고…. 역시 그때 뭐라도 시켰어야 했을까?”
난 착잡한 심정으로 몽타주를 접어 쓰레기통에 버리며 한숨을 쉬었다.
세상 사람들은 제각각 다른 생각과 고민을 하며 살아간다. 그건 남들이 이해하기 힘든 생각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떨쳐 내지 못하고 끌어안고 가는 건 본인의 선택이다. 더쉬맨은 나를 증오하기로 선택했고 그로 인해 발생되는 스토리를 따랐으며… 그 끝은 자폭이란 결말을 가져갔다.
그를 동정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데이지를 버린 시점부터 그는 내게 영원한 악인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날 내가 그를 상대로 다른 퀘스트를 발생시켰다면 그 지경까지 되진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긴 한다. 세상은 너무 복잡하다.
“어쨌든 이제 로웰라가 더 이상 내 대리 역할을 하지 않아도 되어서 좋네. 그동안 마음대로 활동하지 못해서 힘들었지?”
“무슨 소리야? 난 임무 중이었다고, 후후. 무려 마스터 대리라는 엄청난 길드 임무 중이었지. 나름대로 재미있었어! 다음에 같은 임무를 맡긴다 하더라도 난 흔쾌히 수락할 거야!”
로웰라는 참 밝은 아이였다. 그 긍정 에너지는 주변 사람들에게도 전염된다.
“후, 좋아요. 로웰라가 무사하다는 것도 확인했으니 이제 스텔라를 만나 보고 싶은데. 드라이어드 교습소에 구금되어 있다고 했죠?”
“네, 걱정했던 것과 달리 얌전히 있어요. 관리는 에우노미아가 하고 있어요. 안면이 있는 사람이 맡는 게 제일 나을 거라며 자처했어요.”
“에우노미아가… 곁에 있어도 괜찮나요? 그녀는 스텔라를 속였던 사람인데.”
“언니를 탓하는 모습을 보였다면 저희들이 말렸겠지만, 둘이 의외로 잘 지내고 있어요.”
스텔라가 60번째 테라리움에 오게 된 결정적인 원인은 에우노미아에게 있었다. 자신을 속여 먹은 그녀를 원망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으나 아니었나 보다.
스텔라를 만나러 가는 길엔 굳이 많은 이들이 동행하지 않았다. 그보다 이리스 파티는 현재 테라리움에 방문 중인 룽카와 라운에게 더 관심이 많아 보였다. 자신들이 없는 사이 나와 함께 엄청난 모험을 한 둘이 무척이나 궁금했던 모양이다.
비록 소수지만 길드 간의 교류는 나쁠 것이 없기에 장난기가 가득해 보이는 이리스의 표정을 애써 무시했다. 라운이 로웰라와 동갑이라는 점에서 좀 더 많은 호기심을 불러일으킨 것이겠지.
“넌 정말 질리지 않는 아이로구나. 네 검은 속내에 된통 당했던 걸 떠올리면 가만둘 수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듣기 좋은 소리만 하니 곁에 계속 두고 싶은 심정이야. 어쩌면 그동안 난 너 같은 사람을 원했을지도 모르겠군.”
“당신을 처음 만났을 때가 떠올라요. 그땐 당신의 기백에 놀라 혀를 깨물지 않도록 엄청 노력해야 했었지요. 말실수를 할까 봐 어찌나 수없이 속을 가다듬었는지. 지금은 뭐… 이빨 빠진 호랑이?”
문 너머의 방에서 작게 웃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런 것 치곤 예언가 행세가 제법 능숙했지. 지금 생각해 보면 참 입발림 소리뿐이었는데 네가 내 속을 일일이 꿰뚫어 본다고 생각했어.”
“이건 그다지 특별한 능력은 아니에요. 전 기억력이 좋기 때문에 남들이 한 이야기를 전부 기억하죠. 그리고 대화에 이를 녹여 냈을 뿐이에요. 자신의 이야기를 허투루 듣지 않는 데다 놓치지 않고 관심을 가져 주는 자를 싫어할 사람이 어딨겠어요?”
도란도란, 스텔라와 에우노미아가 정답게 떠드는 소리가 새어 나온다. 스텔라가 에우노미아에게 해를 끼칠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헛된 고민이었다. 둘은 과거 악연을 잊고 제법 잘 지내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렇다고 당신이란 사람이 완전히 좋아져서 이렇게 대하는 건 아니에요. 그저 지금은 내 사랑하는 동생들과 현재를 충실히 살아가기로 다짐했으니, 당신을 마주하는 건 일종의 트라우마를 극복하려는 과정이라 볼 수 있겠네요.”
“날 끌어내는 데 큰 기여를 했으면서도 그걸 복수의 한 부분이라고 전혀 생각하지도 않나 보구나.”
“따지고 보자면 아직 부족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