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96화 (496/604)

세계수를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물론 그건 신이니 인간의 머리론 이해할 수 없겠지. 지금까지 나는 세계수가 극단적인 선택을 하지 않아도 충분히 공생 가능한 선에서 플레이를 할 수 있을 거라 여겼다. 내게 세계수는 인페르노와 같은 악독한 적이 아니니까.

내가 대등한 위치에 서는 그날까지 세계수가 내 무한한 다이아를 뽑아 가 자신의 힘을 유지한다 해도 막을 생각이 전혀 없었다. 내겐 테라리움이 생기니 전혀 손해 보는 일이 아니기도 하고 어찌 됐든 세계수의 힘이 강대해야 이 세계가 평화로울 수 있기 때문이다.

“정말… 세계수가 벌을 사용하지 못하게 막은 걸까?”

일련의 사건들로 인해 세계수에 악감정이 쌓인 나의 드라이어드들은 이를 충분히 의심할 만했다. 하지만 그래도 신이 아닌가. 비록 내가 그 신이 원하는 길을 내팽개쳤다 하더라도 나는 이 세계에 충분히 이로운 존재니 이렇게 대놓고 반목하는 건 전혀 좋을 게 없잖아?

“하, 갈수록 태산이야.”

어쨌든 내가 남들은 멀쩡히 사용하는 벌을 더 이상 사용할 수 없게 된 건, 당장은 세계수의 개입 외엔 의심해 볼 요소가 없으니 마음의 준비는 해야 했다. 이 세계에서 보편적으로 사용하는 통신 시스템을 더 이상 이용하지 못하는 건 꽤 불편하긴 하겠지만 치명적인 타격은 아니었다.

“어차피 보낼 수 있는 글자 수도 적어서 불편한 건 매한가지였으니까.”

다만 벌을 사용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내게 경고를 하는 거라면, 이 경고를 무시했을 때 더욱더 큰 경고가 돌아올 수도 있었다. 그러니 난 세계수가 내게 할 수 있는 최후의 통첩인 테라리움 회수까지 염두에 둬야만 했다.

행정 관리원을 그만둬야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씁쓸한 마음이 들었다. 다른 두 개의 테라리움은 몰라도 28번째 테라리움만큼은 무(無)에서부터 여기까지 손수 가꿨기에 더욱 그러했다.

거대한 불에 의해 완파된 테라리움에 이주민들을 불러 모으고, 건물을 세우고 상점을 유치하였으며 일을 할 직원들과 살아갈 주민들을 위한 복지까지 정립했다. 도시 경영 게임으로 치면 지금쯤 후반 레벨을 달성한 셈이겠지.

28번째 테라리움에서 생긴 수많은 추억들은 다시 보려면 하루는 족히 넘길, 차곡차곡 쌓인 완료된 퀘스트와 같았고, 행정 관리원을 그만둔다는 건 정든 게임을 접는 것과 같았다.

“아냐, 너무 불확실한 미래까지 사서 걱정하지 말자.”

세계수가 개입하고 있다는 거나 세계수가 내게 맡긴 자신의 가지를 거둬 가는 일 모두 확정된 일은 아니었다. 당장부터 머리를 싸매며 전전긍긍하는 건 내 정신력만 갉아먹을 뿐이었다.

그저 주의만 하면서 아무것도 모른 채 아프게 뒤통수 맞는 일만 방지하면 된다. 이 고민이 아니더라도 내게는 풀지 못한 숙제가 아직 많았다.

다른 고민을 해 보자. 이를테면 이 세계의 통신 시스템에 대해서 말이야. 어차피 벌은 너무 불편해서 할 수만 있다면 새로 개발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잖아? 어쩌면 기회로 삼을 수 있을지도 몰라.

연금술이 활개 치는 세상에 전화기가 없다는 게 믿기지 않지만, 그렇다고 내가 뚝딱 발명할 순 없으니 최대한 이 세계의 마법적인 힘에 의지하여 실현할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연금술과 대나무 드라이어드의 힘으로 방송 송출과 비슷한 것도 만들어 냈으니까 어쩌면….

“세상이 누리고 싶은 거만 누리며 살 수 있는 줄 알아!”

아, 그러고 보니 아직 저 사람들이 있었지.

말싸움이 고조되었는지 폴룩스의 목소리가 여관에 쩌렁쩌렁 울렸다. 데이지2와 심각한 이야기를 나누느라 신경 쓸 틈이 없었는데, 데이지2가 가 버리니 적막해진 방 안에 남매 싸움의 현장감이 불청객처럼 스며들어 왔다.

“그리고 이제 와서 네가 버린 걸 나보고 주우란 거야? 기회는 얼마든지 있었지만 전부 차 버렸던 건 너였으면서 적선하듯 자리를 넘겨준다고 내가 냉큼 받을 것 같아?”

그동안 쌓였던 감정이 확 터져 나왔는지 폴룩스의 목소리는 갈수록 격해졌다.

말리는 사람은 없나 싶어서 방문을 살짝 열고 상황을 살폈다. 멀리 층계참에 미어캣처럼 목을 빼 구경하고 있는 룽카와 라운의 모습이 보였다. 아래층의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으나 방음이 거의 되지 않는 건물은 마치 스피커처럼 쩌렁쩌렁 소리를 실어 날랐다.

“단순히 네가 먼저 태어났다는 이유로 얼마나 많은 혜택을 누렸는지 너는 아직까지 이해 못 하겠지. 살면서 수없이 내 기회를 빼앗아 가면서까지 게으르고 아둔하게 살아가면서, 네가 당연히 해야 할 최소한의 책임도 지지 않겠다니.”

“그러니까 네가 행정 관리원을 하면 되잖아?”

“지금까지 내 이야기를 뭐로 들었어? 네게 행정 관리원은 대단한 지위가 아니라 네가 짊어져야 할 책임이라고! 남에게 넘길 수도, 남이 대신해 줄 수도 없는! 네가 그동안 누려 온 혜택에 대해 마땅히 감내해야 할 업이라고!”

사람들은 저마다 다른 이유로 생각하고 고민한다. 내가 세계수와 맞짱을 떠야 할지도 모른다는 고민을 할 동안 누군가는 더 자유롭게 놀고먹고 싶어서 행정 관리원직을 떠넘기고 싶어 하지. 또 누군가는 철없는 누나 때문에 과거 받아 온 차별을 되새기며 울분을 토하고.

“안 주무세요?”

난 층계참에 있는 두 사람에게 물었다. 그러자 둘이 화들짝 놀라 날 바라봤다.

“아, 자야죠.”

부끄러운 일을 들킨 것처럼 새빨개진 얼굴로 두 사람이 방으로 후다닥 뛰어갔다. 아래층은 아직도 소란스러웠다.

어쩌면 이 밤이 다 지새도록 싸움이 계속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폴룩스가 발을 쿵쿵 구르며 여관을 떠나는 소리가 들렸다.

둘의 싸움은 결국 어떠한 결론도 나지 않고 끝났다. 방금은 누나에 대한 그의 진심을 확인할 수 있는 순간이었겠지만 카이시아는 상당히 취한 상태였다.

단둘이 속 터놓고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눠도 모자랄 주제인데 많은 이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심지어 한 명은 인사불성 상태로 이야기가 진행되었으니 답답함과 악감정만 잔뜩 쌓였을 것이다.

난 다시 방문을 닫고 침대에 앉았다. 안 자냐고 룽카와 라운에게 살짝 질책을 보냈지만, 정작 나조차도 당장 잠이 오지 않았다. 생각이 많아 머리가 복잡하니 잠이 찾아올 틈이 없는 것이다.

그동안 여행하며 참 다양한 테라리움의 사정들을 봐 왔다. 고유한 이름이 있는 것도 아니고 단순히 번호에 따라 달라지는 테라리움이지만 테라리움이 품은 인간 양상은 완전 제각각이었다.

미미르가 있는 38번째 테라리움과 글로리아가 있는 44번째 테라리움이 차례대로 내 머릿속을 스쳐 간다. 저마다 다른 문제를 안고 있었지.

솔직히 말하자면, 어떤 고민이라도 압도적인 돈 앞에선 무력해진다. 행복은 돈으로 살 수 없다지만 행복해지기 위해선 돈이 필요했다. 그 단적인 예가 시간과 노력을 압도적인 과금을 통해 씹어 먹을 수 있는 게임이었다.

물질 만능주의가 좋은 게 아니란 걸 알고 있음에도 내 사고는 아직 이를 완전히 벗어던지지 못했다.

내가 그들이 안은 문제를 직면했을 때, 그들의 테라리움을 내가 인수하는 방법을 택했다면 많은 이야기들이 달라졌을 것이다. 물론 전부 다른 행동을 취했지만 무의식중의 한편엔 항상 최후엔 내가 그냥 테라리움을 삼키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자리 잡고 있었다.

마치 영지를 많이 차지하면 이기는 게임처럼 이 세계에서 내가 많은 테라리움을 쥐고 있는 게 많은 이득을 가져다주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 생각대로라면 간단히 내가 이 48번째 테라리움까지 손에 넣으며 무능한 행정 관리원을 몰아내고 폴룩스를 구원하는 아주 단순한 해결책을 낼 수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16번, 28번, 48번, 60번으로 이어지는 그랜드슬램을 달성할 수도 있겠지만, 이젠 무의식중의 생각까지 뒤바꿀 정도로 인식이 바뀌게 되었다.

나는 이 세계의 모든 것들을 세계수처럼 온전히 소유할 수 없다. 단편적으로 보자면 이미 주인이 있는 세계이니, 난 언제든 주인이 원하면 다 내놓아야 하는 입장인 것이다. 그러니 내게 무한한 다이아가 있더라도 이를 뿌려 이 세계의 것을 소유해 봤자 전부 헛수고라는 거지.

그런 생각을 갖게 되자 48번째 테라리움의 상황을 바로 곁에서 지켜봤어도 남이 진행 중인 퀘스트를 우연히 보게 된 것처럼 아무런 감흥이 들지 않게 되었다.

44번째 테라리움에서처럼 간접적으로나마 도움을 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놀기 좋아하는 행정 관리원이 망치고 있는 테라리움에 살고 있다는 이유로 고통받는 주민들이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도록 난 당장이라도 뭔가를 해 줄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하지만 이젠 이에 대해 큰 감흥이 느껴지지 않는다. 세계수의 개입으로 인해 내가 즐기고 있는 게임은 영지 경영 게임이 아니라 다른 장르의 게임임을 깨닫게 한다. 다른 서브 콘텐츠에 그만 신경 쓰라는 것처럼.

물론 이젠 이 세계가 단순한 게임 속 세상이 아님을 알지만 비유하자면 그렇다는 거다.

그러니 난 이번엔 48번째 테라리움에 어떤 일이 생기더라도 절대… 관여하지 않겠다고 마음먹었다. 여기서 조금만 더 발을 내디디면 퀘스트가 발생할지도 모른다.

행정 관리원인 카이시아와 안면을 트고 두 남매의 사적인 상황까지 전부 알게 되며 연결 고리가 더욱 굵어졌다.

사치를 즐기며 놀고먹는 누나의 빈자리까지 메꾸면서 테라리움을 운영하는 폴룩스는 상당히 능력 있다고 볼 수 있으니, 그 인재를 꼬드겨 48번째 테라리움에 나의 다른 테라리움과 연계하는 사업을 벌이는 루트가 생길 수도 있다.

또한 훗날 카이시아가 자신의 게으름의 대가를 치르게 하는 권선징악의 결말을 만들어 내는 스토리를 탈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러지 않을 것이다.

모험을 떠나 수많은 여행을 하며 수없이 많은 스토리를 겪었지만 이번처럼 완전히 외면하는 일은 처음이었다. 어쩌면 난 그동안 너무 많은 이야기를 짊어졌던 건 아닌가 하는 사색에 잠기게 된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베개에 머리를 대자 잠이 오지 않는다는 말이 거짓말처럼 삽시간에 수마가 몰려들었다.

다음 날 이른 아침, 난 과수원을 방문하지도 카이시아나 폴룩스의 안부를 묻지도 않고 곧바로 마차를 출발시켰다. 정말로… 이런 선택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등 뒤로 수락하지 않은 퀘스트를 의미하는 굵은 물음표가 반짝거리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마차는 부지런히 달려 점심시간이 되기 전 28번째 테라리움에 도착했다. 역시 앞 번대로 갈수록 길이 잘 닦여 있어서 마차 운행 속도가 훨씬 빨랐다.

28번째 테라리움은 주민들 대부분이 내 얼굴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다른 테라리움과 달리 입장과 동시에 여기저기서 반가운 인사와 환영을 받았다.

“수고하셨어요. 일이 급한 게 아니라면 테라리움에 쉬었다 가시는 게 어때요?”

앞 번대에 볼일이 있다는 핑계로 동석했지만, 결국 내 호송 의뢰를 맡기 위해서임을 알기에 룽카와 라운이 이곳에서 편히 쉬다 가길 바랐다.

더구나 그들은 뒤 번대와 비교도 안 되게 활기찬 테라리움의 풍경을 넋 놓고 바라보며 그냥 가기 아쉽다는 티를 풀풀 내고 있었기에 눈치챈 사람의 도리로서 한껏 붙잡아 줄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될지….”

“앞 번대 테라리움은 그… 많이 비싸겠죠? 식당이라든가….”

라운이 룽카에게 귓속말을 했지만 워낙 성량이 큰 편이라 이쪽에도 다 들렸다. 어쩌면 저런 특징으로 인해 예기치 않게 사고를 일으킨 적도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무려 행정 관리원의 손님 신분으로 방문하신 걸요. 원하시는 대로 마음껏 이용하셔도 돼요.”

“아무리 그래도….”

“우와….”

라운은 기대감을 감추지 못하고 어깨를 들썩거렸지만, 이를 룽카가 양심에 찔린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렸다.

“음, 그러시다면 이건 어떨까요? 제가 행정 관리원이 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28번째 테라리움은 많은 변화를 겪고 있어요. 그러니 외부인의 시선으로 테라리움 곳곳을 구경하신 후 제게 평가를 전해 주시는 거예요. 이렇게 하면 저는 더 발전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고 두 분은 합당하게 테라리움 곳곳을 구경하실 기회를 얻게 되는 거죠.”

“저희 의견이 도움이 될지 모르겠습니다만.”

룽카는 끝까지 마음에 걸리는 듯했다. 그는 앞 번대 테라리움 방문으로 인해 약간 기가 죽은 것이 느껴졌다.

“직접 안내해 드리고 싶은데 지금부터 바빠질 예정이라 따로 다니셔야 하지만….”

“마스터! 언제 오시나 기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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