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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자식을 찾아와!”
열이 잔뜩 뻗친 길드 마스터 피게트가 소리쳤지만 대답하는 이는 없었다.
“젠장, 다들 어디 간 거야? 부길마는? 아무도 출근하지 않은 거야?”
쾅!
거칠게 문을 열었으나 사무원들이 앉아 있어야 할 자리가 휑했다. 한 자리는 길드 재정난에 어쩔 수 없이 해고를 했으니 비어 있음이 당연했으나 다른 한 자리는 친한 길드원의 연줄로 능력은 떨어져도 계속 채용을 이어 온 자였다. 그런데 난잡한 책상에 대충 휘갈겨 쓴 메모 한 장만 남겨 둔 채 자리 주인은 사라지고 없었다.
“뭐? 휴가를 간다고? 지금 때가 어느 땐데….”
사실 피게트는 알고 있었다. 휴가는 핑계일 뿐이고 다들 이런저런 말로 둘러대며 길드를 탈퇴할 눈치만 보고 있다는 것을.
열심히 활동한 끝에 11번째 테라리움에 자리를 잡았고 이젠 길드를 대형 길드의 반열에 올리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정보를 사기 위해서 다이아를 아낌없이 사용했고 그 다이아는 길드원들을 열심히 닦달해 모았다.
물론 뒷말로 길드 마스터가 피도 눈물도 없는 수전노라는 말이 오가는 건 알고 있지만, 이 모든 행동들은 다 길드의 발전을 위해서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어느 날, 길드원의 소개로 길드에 찾아온 더쉬맨이라는 남자가 한 제안을 하기 전까진 모든 일이 잘 굴러가고 있었다. 적어도 피게트는 그렇게 믿었다.
대형 길드인 아스키아와 협력하여 일을 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얻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당시 피게트의 길드에 부족한 것은 명성이었다. 테라리움 주변에 빈번하게 출연하는 불을 처리하는 정도는 어느 길드나 할 수 있기에 그럴싸한 실적이 부족했고 더 앞 번호의 테라리움에 진출하고 싶어도 연줄이 없었다.
테라리움이 길드의 명망을 보고 주둔을 허락하는 건 맞으나, 사실 과수원에 연줄이 있다면 명성이 떨어지는 길드라도 외곽 끝자리라도 얻을 수 있었다. 11번째 테라리움의 자리도 간신히 얻은 자리나 더 나아가 한 자릿수 테라리움에 진출하기만 한다면, 큰 업적은 없더라도 몇 번째 테라리움에 스톤헨지를 둔 길드라는 점만으로도 충분히 광고 효과가 있었다.
길드의 이름이 알려져야 더 많은 의뢰가 들어오고, 대형 길드들이나 받는다는 스폰서도 들어오고 길드의 원동력이 되어 줄 길드 가입 희망자들도 늘어나게 된다.
그래서 피게트는 수상해 보이기는 하나 아스키아라는 이름을 놓칠 수 없어서 더쉬맨이라는 남자가 시키는 대로 길드를 움직였다.
처음은 아스키아 길드가 노리는 아이언비스트를 수배하러 가는 자리였다. 협력 길드가 되었으니 아스키아 길드 쪽에 안면이라도 트고 싶었으나 더쉬맨은 그쪽 일을 방해했다간 눈 밖에 날 수 있다며, 당장은 아이언비스트의 동료를 붙잡는 데 주력하자고 했다.
그는 무척 아쉬웠으나 그 유명한 아이언비스트를 잡는 것도 아닌, 겨우 동료를 붙잡는 일이 더 쉬웠을 뿐더러 일을 잘 처리하면 자연스레 아스키아 길드와 자리를 마련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피게트의 길드는 목표물을 간발의 차로 놓치고 말았고 그 과정에서 피게트는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었다.
아이언비스트 본인도 아니고 단순한 동료일 뿐이기에 조금은 얕보는 마음으로 일에 임했는데, 무려 그들 중 몇이 피게트와 안면이 있던 자들이었던 것이다.
“이리스?”
그리고 그 자리에 있던 대부분의 길드원들도 그들을 알아봤다. 다름이 아니라 몇 달 전만 해도 같은 길드원이었던 이들이기 때문이다.
“이리스, 제퍼, 헤르마, 노토스. 전부 다 있잖아? 설마 저들이 호위를 맡은 건가?”
물론 그들도 전 길드의 마스터와 동료들을 알아봤다. 하지만 회포를 풀 시간은 없었다. 어쨌든 임무로 인해 서로가 적으로 마주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피게트의 목표는 더쉬맨이 특정한 엘더 플라워를 데리고 다니는 여자 드루이드였고, 마침 인상착의가 같고 엘더 플라워로 추정되는 드라이어드도 함께 있는 것을 확인했다.
그래서 아스키아 길드가 아이언비스트를 맡는 동안 그의 동료를 사로잡기 위해 노력했는데… 결과는 실패였다. 그들은 간발의 차로 여자 드루이드를 놓쳤다.
아이언비스트가 전투를 포기하고 순순히 아스키아 길드에 제 발로 붙잡히며 임무가 어설프게 종료되어 버린 까닭도 있지만, 피게트가 이리스 무리를 너무 얕봤기에 그들이 안전히 테라리움으로 입성하는 걸 허락하고 말았다.
“허울뿐이라 해도 대단한 소문을 가지고 있어서 실력도 대단한 드루이드일 줄 알았는데 도망만 다니고 말이야.”
임무를 실패한 날, 피게트는 애써 목표물에 대한 험담을 하며 심정을 들키지 않으려 애썼다.
피게트는 자신이 내쫓은 거나 다름없었던 이들이 수의 열세를 극복하면서까지 자신들을 이겨 낸 것에 자존심에 많은 상처를 받았다. 더구나 비록 아스키아 길드는 원한 것을 이루었으나 그들과 함께한 첫 협력 임무를 실패한 것에 충격이 컸다.
부가적인 임무는 실패했으나 최종적으로 아스키아는 아이언비스트를 붙잡는다는 목표를 이뤘으므로 곁에서 도운 자신들에게도 어느 정도 포상이 돌아올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연락은 오지 않았다. 협력 관계임에도 불구하고 과할 정도로 무시하는 태도에 피게트는 또다시 자존심에 금이 갔지만, 감히 대형 길드에게 항의를 할 배짱은 없었다. 이 때문에 그의 히스테리로 주변 길드원들만 죽어 나갔다.
“대체 왜 아스키아 길드에선 연락이 하나도 없는 거지?”
“듣자 하니 내부에서 큰일이 생겨 정신이 없나 봅니다.”
피게트는 이 일을 주관한 더쉬맨에 대해 갈수록 의심이 커졌지만 표면상 아스키아와의 중간 다리라는 역할 때문에 자신의 길드원들에게 하는 것처럼 그를 몰아세울 수 없었다.
더구나 여기서 그만두고 그를 추궁한다면, 자신이 겨우 외부인 한 명에게 속아 길드를 움직였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거나 다름없어서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이럴 때 괜히 건드려 봤자 긁어 부스럼일 겁니다. 누구나 알아주는 대형 길드 아닙니까? 내부 일이 해결되면 어련히 알아서 치하하겠지요.”
더쉬맨은 거짓말을 이어 가기 위해 뱀의 혀처럼 속살거리며 피게트를 달랬다.
“테라리움의 과수원도 아니고 길드에 불과하면서 이리 거만하게 굴다니… 나 원 참. 하, 그래. 바쁘다니 우리 같은 중형 길드가 이해를 해 드려야지.”
피게트는 아스키아를 흉보면서도 더쉬맨이 이를 듣고 밀고할까 봐 걱정했다. 하지만 정작 더쉬맨은 다른 생각을 하느라 피게트의 한탄 따위 한 귀로 듣고 흘릴 뿐이었다.
그로서는 44번째 테라리움에서 많은 지원군들을 끌고 갔음에도 불구하고 목표했던 드루이드 제이를 놓친 것이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동료에게 뒤를 맡긴 채 꽁지 빠지게 도망만 다니는 꼴이란. 그렇게 필사적으로 도망 다닐 줄 알았다면 다른 작전을 썼을 텐데. 그래도 내가 그곳에 있었다는 걸 들키진 않은 듯하니, 아직 기회는 있다.’
1:1 대련을 했을 때처럼 데이지를 꺼내 다시 덤빈다면 이번엔 묵사발을 내 줄 수 있을 거라 자신했었다. 모든 것을 잃은 그를 움직이게 만드는 것은 오로지 복수심뿐이었으며, 쓰러뜨릴 날만을 고대하며 칼을 갈았다.
길드 하나를 통째로 끌어들여 그녀를 덮친다면 다시는 입을 열지 못하게 만들 수 있을 거라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었다.
‘그깟 노멀 등급 드라이어드, 뼈 빠지게 육성했다 하더라도 그래 봤자 노멀 등급인데. 막판에 운 좋게 전설을 피워 내 방심한 내 드라이어드를 상대로 이긴 거지. 전설이라고 해 봤자 신화 전 단계잖아. 아직 모체에 신화도 없는 드라이어드 주제에….’
더쉬맨의 제이를 향한 증오는 그녀와 함께하는 레드 데이지 드라이어드에게까지 옮겨가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활활 타올랐다.
피게트가 더쉬맨에 대해 계속해서 찝찝한 의심을 키우던 어느 날, 그의 길드의 운명을 통째로 바꿀 사건이 생겼다. 바로 아스키아와 어느 이름 모를 작은 길드와의 길드전이었다.
길드 간의 힘 싸움이 팽팽하여 서열이 명백하지 않은 과거에는 길드전이 간간이 일어났었으나 최근 십여 년은 일어난 적이 아예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불이 갈수록 거세지는 현 시점에선 드루이드들끼리의 소모전은 굉장히 무의미한 일이란 인식이 팽배해진 탓도 있지만, 이미 7대 길드라 불리는 대형 길드가 7개의 테라리움에 각자 굳건히 자리를 잡고 균형을 유지 중이라는 이유가 컸다.
모두가 열망하는 한 자릿수 테라리움에 당당히 자리를 잡고 명성을 떨치는 고귀한 모습은 모든 길드들의 선망의 대상이자 롤 모델이었다. 그들이 싸움을 하지 않으니 따라서 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아스키아의 상대 길드 가이아는 피게트가 아무리 여러 테라리움의 역대 발간된 소식지를 뒤져봐도 이름 하나 찾을 수 없었던 소규모 길드였다.
그런데 아스키아가 이를 상대로 길드전에 함께 협력할 지원군들을 모집한다는 소문에 사람들이 더욱 관심을 갖게 되었고, 길드전이 60번째 테라리움을 통째로 사용해 벌이는 수성전이라는 걸 알게 됐을 때 모든 테라리움이 빠짐없이 소식지에 이 소식을 실을 정도로 크게 이슈가 되었다.
“아스키아 길드에서 이전에 협력한 일을 계기로 가장 먼저 피게트 님의 길드에 참가 의사를 물었습니다. 길드전이 잘 끝난다면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포상을 할 게 분명합니다.”
피게트는 더쉬맨이 굳이 해당 건을 물고 오지 않더라도 길드전에 참여할 의사가 만만했다. 어차피 개미를 발로 밟듯 힘으로 찍어누르는 거나 다름없으니, 어느 편에 서야 할지는 불 보듯 뻔했다.
저번 아이언비스트 포획 작전과 달리 길드전 동맹 건은 외부에 대놓고 공표되는 일이라 당당히 포상을 요구할 수 있을뿐더러 연줄을 만들 수 있는 것은 물론, 근 십여 년간 일어나지 않았던 길드전 참가라는 독특한 업적을 남길 수 있었기 때문에 피게트는 더 따지지 않고 자신의 길드를 길드전에 투입시켰다.
참가 의사를 보인 후 아스키아 길드가 굳이 지원군을 모집했던 또 다른 이유에 대한 소문을 듣게 되었지만 피게트는 굳이 신경 쓰지 않았다.
수성전이라는 페널티를 극복하기 위해서라는 표면적인 이유 뒤엔, 길드전이라는 대규모 이벤트를 앞두고 아스키아에 물밀듯 밀려온 스폰서 중 급이 떨어지는 제품들을 처리하기 위해 사람들을 모았다는 소문이 돌았다.
한마디로 S급, A급들은 길드원들에게 입혀 체면을 차리고, 계륵이나 다름없는 B급 이하들은 거절하기 아까우니 마네킹들을 구입한 것이다. 물론 그냥 주는 것도 아닌 대여 형식으로 빌려주는 것이었다. 길드전이 끝나면 큰 손상 없이 모두 반납해야 되는 물건들이었다.
전투가 벌어지는데 손상이 생기지 않을 수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이들이 마네킹 역할을 흔쾌히 수락한 건 역시나 길드전이 압도적인 수세로 싱겁게 끝날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길드전에 대한 화제는 온 테라리움을 뜨겁게 달구었고, 마침내 길드전 당일이 되었다.
피게트를 포함한 그의 길드원들은 더쉬맨과 함께 아스키아 길드의 행렬에 올랐고, 비록 뒤 번대라고는 하나 여행자들이 자주 오가는 대로에는 결코 존재할 리 없는 거대하고 엄청난 불 몬스터들의 등장에 피게트는 무언가 일이 잘못됐음을 느꼈다.
그리고 길드전이 진행되면 될수록 피게트가 감지한 불길함은 더욱 선명해지고 거대해졌다.
수의 우세에도 불구하고 테라리움의 정문을 좀처럼 뚫지 못했을 때부터 피게트는 모골이 송연해지는 것을 느꼈고…. 갑자기 등장한 인페르노에 의해 길드전은 양상이 완전히 바뀌어 버렸다. 그날의 길드전은 아비규환, 지옥의 입구나 다름없었다.
더욱이… 더쉬맨은 공을 세우기 위해 분발하는 모습을 보이는 게 좋지 않겠냐며 길드원들을 무리하게 테라리움 가까이 진군시키자는 제안을 했었고, 이를 피게트가 승낙했기에 그의 길드는 인페르노의 공격에 아주 큰 피해를 받았다.
길드원의 절반이 더는 드루이드 생활을 이어 나갈 수 없을 정도로 큰 부상을 입었고, 간신히 도망친 반은 훗날 길드에 찾아와 끊임없이 후유증에 대한 보상을 요구해 댔다.
길드 자금을 털어도 전부를 보상해 주는 건 불가능했고, 그나마 간신히 푼돈이라도 손에 쥔 건 극히 일부였다. 그들의 눈에 더 이상 길드의 미래가 보이지 않는 것은 당연했다.
그래서 몇몇은 통보도 없이 잠수를 타다 그대로 길드를 탈퇴했고, 나머진 휴가를 핑계로 길드 룸에 출근하지 않거나 꾸역꾸역 자리만 지키며 탈퇴할 눈치를 보는 게 대부분이었다. 길드전에 참여한 대부분의 길드가 다들 크고 작은 피해를 입었으나 피게트의 길드는 그중에서도 꽤 심각한 편이었다.
피게트가 분노를 쏟아부을 더쉬맨은 그날 죽었는지 도망쳤는지 전혀 연락이 되지 않는 상태였다.
길드 룸에 앉아 공중 분해되기 직전의 길드를 손에 쥔 그는 망할 날만을 기다리는 입장이 되고 말았다.
더쉬맨이 과할 정도로 살기를 띠며 전투에 참가했던 모습이나 끝까지 아스키아와의 계약서를 보여 주지 않는 모습 등 그 수많은 수상한 모습들이 전부 징조였음을 뒤늦게 깨달았으나 이미 때는 한참 늦은 후였다.
일을 거스르고 거슬러 올라 길드를 좋지 않게 탈퇴했던 이리스들을 만났을 때, 그들이 길드를 떠나 훨씬 좋아진 모습으로 활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손을 뗐어야 했던 걸지도 모른다고 피게트는 후회했다.
“이대로 나만 망할 수는 없지. 이봐! 출근한 놈 아무도 없어?”
그가 길드 룸에 열심히 소리쳐봤자 여전히 들려오는 대답은 없었으나 그는 착실히 명령할 목록을 만들었다. 우선은 그 더쉬맨을 찾는 일이 먼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