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93화 (493/604)

“동생이 아닌 다른 이에게 자리를 양도하는 건요?”

“그건 싫어. 우리 집안 거잖아. 남들 손에 줄 순 없지.”

“그렇다면 테라리움이 파산하길 기다리는 수밖에 없겠네요. 어쨌든 강제로 원하지 않는 동생의 손에 쥐여 줄 방법은 없어요. 그러니 차라리 지금이라도 정신 차리고 행정을 돌보는 게 어때요?”

“그것도 싫어. 난 하고 싶은 게 많아. 노는 것도 좋고. 난 아직 태어나서 지금까지 48번째 테라리움을 벗어난 적이 없거든? 그래서 행정 관리원 자리를 때려치운다면 여기저기 여행을 해 보고 싶어. 그런데 넌 행정 관리원이면서 어떻게 여기 있는 거야?”

그녀의 질문에 순간 말문이 막혔다. 혹시 행정 관리원은 테라리움을 떠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건가?

“굳이 자리를 때려치우지 않아도 여행할 순 있어요. 물론 제가 자리를 부재해도 테라리움 행정이 정상적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시스템을 잘 마련해야겠지만…. 그리고 제가 특이 케이스이기도 하고요.”

내겐 멀리 떨어져 있어도 내 테라리움들을 아티팩트를 통해 한눈에 살펴볼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물론 너무 오래 이용하지 않는 바람에 아주 가끔 이 점을 까먹기도 하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지금 당신이 하는 고민은 너무… 어리석고 철없다고 생각해요. 제가 여태 만나 봤던 사람들 중 가장 한심한 고민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요. 단순히 놀고먹는 일이 좋아서 행정 관리원 직책을 떠넘기고 싶다니. 테라리움에 있는 모든 주민들의 운명이 당신의 손에 달려 있다는 건 알고 계시죠?”

그러고 보니 여기 주민들은 이 행정 관리원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그들은 좋든 싫든 불로부터 보호를 받기 위해 테라리움에서 살아야만 하는데 말이다.

아무리 행정 관리원이 폭정을 일삼거나 게을러서 행정을 제대로 돌보지 않는 곳이더라도, 조금이라도 더 축복이 강한 앞 번호 테라리움에 살기 위해, 불이 득실대는 바깥에서 떨지 않기 위해 열심히 다이아를 모아 세금을 내고 참고 살아가는데 말이다.

그들이 내는 세금이 어떻게 관리되는지 어떤 복지로 사용되는지 알 길은 없다. 세금 책정부터 사용까지 모든 것이 행정 관리원의 권한이니까. 어떤 테라리움도 세금 사용에 관해서 주민들에게 오픈하는 걸 본 적이 없었다. 그것이 당연한 일이니 그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모두들 테라리움은 행정 관리원의 사유물임을 당연하게 여기고 있다. 세계수의 가지가 건강히 보존되고 불이 침입하지만 않으면 행정 관리원의 일은 다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테라리움이 망하면 다 함께 망하는 거다.

행정 관리원은 테라리움이라는 기업을 굴리는 거나 다름없었다. 축복이라는 귀중한 자원을 뿜어내는 세계수 가지를 지키는 건 아주 기본적인 일이고, 이를 지키기 위해선 다이아를 제공할 주민들을 유치하고 떠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

더구나 드루이드를 비롯한 여행객들이 가져다주는 다이아도 만만치 않으니 관광 산업을 유치하기 위해 노력해야 될 뿐만 아니라 주변의 불을 틈틈이 해치워 통행로를 정리해야 한다.

하지만 아무리 이벤트를 열고 과수원에서 무료 열매를 뿌려도 결국 여행객들이 방문하는 건 시즌 장사나 다름없었다. 뒤 번대로 갈수록 강한 드루이드들이나 겨우 방문할 수 있으니 더더욱.

그러니 안정적으로 주민들이 제공하는 다이아가 중요한데, 이 또한 내부에서 뽑아낼 수 있는 다이아가 한정적이라 내부 인력을 잘 이용해서 다른 테라리움들과의 교류 및 수출 수입 통해 부족한 점을 메꿔야 했다.

2번째 테라리움이 앞 번대라는 큰 이점도 있지만 아카데미로 이름 날리는 것처럼 말이다. 이곳의 세상 물정을 잘 모르는 나도 번번이 2번째 테라리움의 아카데미에 대해 들어올 정도로.

테라리움에 아카데미를 설립하거나 연금탑을 세우거나 커다란 공방을 만들거나 해서 테라리움을 알차게 굴려야만 살아남을 수 있었다.

내가 28번째 테라리움을 막 손에 넣었을 땐 정말 행정에 대해선 아무것도 모르는 초보였다. 물론 지금은 전문적이냐고 물으면 그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적어도 난 이런 이치를 알았기에 부족하더라도 게임적으로 접근해서 가장 최고의 결과를 내려고 했다.

주민들을 많이 유치하는 건 영지 개발 게임에서 기본 중의 기본이었다. 이곳과 달리 나는 자본이 풍부하니 많은 사업들을 실천해 볼 수 있었지만, 그 많은 사업들을 관리하려면 또 사람이 많이 필요했고 그들이 내 테라리움에 더욱 몰려들도록 만들 수많은 장치가 필요했다.

게임처럼 가꾸었다고 해도 결국 테라리움은 사람들의 삶의 터전이잖아? 내 판단 하나하나에 그곳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시간이 달려 있었다.

나도 하는 고민을 일말도 하지 않는 그녀에게 조금이라도 공감하고 싶은 마음도, 동정하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놀고먹는 거 싫어할 사람이 어딨겠어? 하지만 그로 인해 저버릴 책임과 의무는 따져 봐야지.

“난 당신이….”

이미 사고가 나와 완전히 다른 그녀에게, 더구나 술에 취해서 제대로 들리기나 할지 의심되는 상황에 좀 더 말을 꺼내려는데….

“지금 다들 여기서 뭐 하는 겁니까?”

익숙한 목소리가 들리며 여관 입구가 소란스러워졌다.

“여기가 어디라고 이런….”

쾅!

큰 소리를 내며 여관 문이 열렸고 시끌벅적한 소음이 파도처럼 밀려 들어왔다. 그리고 그 앞을 가득 메운 사람들의 행색을 본 나는 기가 막혀서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그들은 모두 남녀 가릴 것 없이 노출이 심한 옷에 술병이며 악기를 가득 들고 서 있었다. 그 근처에서 파리처럼 손을 비비며 야비하게 웃고 있는 여관 주인을 보니… 저 한 무리의 사람들을 부른 게 저자겠지.

그제야 폴룩스와 함께 여관에 도착한 우리를 보고 왜 여관 주인이 그런 말을 했는지 알 것만 같았다. 내 앞에서 사람들을 보며 신나게 박수를 치고 있는 그녀가 종종 이런 방식으로 여기서 놀자판을 벌였었나 보지.

“아, 이렇게까지 할 생각은 없었는데. 기왕 이렇게 된 거 제대로 놀아 볼까?”

둘이서 행정 관리원 대 행정 관리원으로 긴밀한 이야기를 하자더니.

“카이시아!”

참다못한 폴룩스의 화가 터져 나왔다. 그는 누이를 향해 있는 힘껏 소리를 치고 있었다. 급변하는 상황에 난 내 아티팩트가 환하게 빛을 내고 있는 걸 제때 눈치채지 못했다.

“카이시아, 세상에… 너 그 꼴로 손님을 맞은 거야?”

폴룩스가 굉장히 충격 받은 얼굴로 그녀의 누이를 바라봤다.

“넌 대체… 오늘 하루! 하루만이라도 정상적인 척이라도 해 줄 수 있었던 거 아니야?”

그 말로 폴룩스가 누이에 대한 기대치가 얼마나 낮은지 알 수 있었다. 그는 여관 입구에서 차마 더는 안으로 들어올 수 없는지 마른세수만 하며 한숨을 쉬었다.

“죄송합니다. 오늘 일은 제대로 사과를….”

“아, 우리 동생 왔네. 잘됐어. 마침 내가 이분과 관계를 잘 다지고 있던 중이거든.”

덜컹, 와장창!

술에 취한 카이시아는 상황 파악이 한 박자 느렸다. 그녀가 비틀대며 자리에서 일어나다가 테이블에 아프게 무릎을 부딪혔고, 그 반동에 테이블 위의 병이 바닥에 떨어져 깨졌다. 여관 안에 들어오지 못해 밖에서 바글대는 사람들과 술주정을 부리는 여인 그리고 바닥에 흥건한 싸구려 술 냄새. 난장판이 따로 없었다.

소란에 방에 있던 룽카와 라운도 내려오게 되었다. 카이시아를 본 라운은 화들짝 놀란 표정을 지었고 이내 나와 그녀를 번갈아 바라보며 혼란이 가득 찬 눈빛을 보냈다. 보아라, 네가 불러온 재앙이다.

“아, 곧 치울 거야. 괜찮아, 괜찮아. 그건 그렇고 저긴 내 동생 폴룩스인데….”

카이시아는 깨진 병 조각들을 테이블 밑으로 대충 발로 쓸어 넘기며 주절댔다.

“카이시아, 제발. 네 눈앞의 사람이 누구인지나 알고 그러는 거야?”

“당연히 알고 있지. 그래서 내가 같은 행정 관리원끼리 이렇게 친목을 나누는 자리를 만들었던 게 아니겠어?”

친목을 다진다고? 폴룩스의 눈이 말도 안 된다고 소리치고 있었다. 그는 당장이라도 폭발하려는 걸 간신히 참는지 꽉 쥔 두 주먹을 바들바들 떨었다. 이 자리에 내가 있으니 더 못 볼 꼴 보이지 않으려고 참는 거겠지.

“드루이드님.”

때마침 날 이 상황에서 구해 줄 데이지2가 나타났다.

“밤이 늦긴 했지만 혹시나 하고 왔는데 식사 중이셨나요? 술 냄새도 나는 것 같고. 드루이드에게 술은 무의미하지 않나요? 더구나 굉장한 회복형 드라이어드도 데리고 계시니 술은 맛없는 음료나 다름없는데 괜히 입맛만 버리는 게 아닌가 걱정이 됩니다.”

데이지2도 은근 마이페이스였다. 이런 상황에서 제 할 말만 줄줄 하는 것만 봐도.

“됐어. 무슨 일로 온 거야? 아, 아니지. 이렇게 온 거라면 이리스의 말을 전하러 온 거겠지. 마침 잘됐어. 가자.”

폴룩스는 조금만 건드려도 터질 것 같은 시한폭탄처럼 보였고, 카이시아는 눈앞의 폭탄은 인지하지 못한 채 신나게 불꽃놀이를 하고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두 남매의 싸움이 터져 불편한 상황에 끼기 전에 빠지는 게 상책이었다.

“그럼 전 내일을 위해 이만 올라가 보겠습니다.”

일부러 카이시아가 아닌 폴룩스에게 말했다. 술 취한 카이시아가 날 잡더라도 그가 말려 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어디 가? 아직 이야기 덜 끝났는데.”

철썩.

예상했던 대로 그녀가 내 팔을 붙들었고, 만류는 의외의 인물이 했다.

“제 드루이드님께 무례한 행동은 삼가 주셨으면 합니다.”

데이지2가 단숨에 카이시아의 손을 쳐 내며 우리 사이를 살짝 가로막고 섰다.

“드루이드님께선 분명 자리를 떠나고 싶다는 의사를 펼치셨습니다. 이런 막무가내 의사 표현은 하지 말아 주세요. 더구나 상태도 좋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데 주인을 지키는 드라이어드로서 조금이라도 제 주인께 해를 가할 수 있다고 판단되면 저 또한 서슴없이 행동하겠습니다.”

작은 불이라도 해치우라 보내면 덜덜 떨고 우는 소리를 내며 연약한 모습을 보이는 데이지2라 하더라도 드라이어드는 드라이어드라는 건가.

내가 데리고 있는 드라이어드 중 아주 약한 편에 속하면서도 애초에 일반인을 상대할 땐 그 힘의 차이가 컸다. 28번째 테라리움에 아무도 없던 시절에 혼자 무거운 잔해들을 번쩍번쩍 들어 올려 치우던 그였으니까.

데이지2의 사늘한 분위기에 카이시아는 얼어붙은 채 더 이상 날 붙잡는 행동을 하지 않았다.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돼. 어쨌든 뒷정리를 잘 부탁드려요.”

난 데이지2와 함께 방으로 돌아갔다. 등 뒤로 무슨 일이 생긴 거냐며 라운을 채근하는 룽카의 목소리와 카이시아의 이름을 부르며 남매 싸움의 전초를 알리는 폴룩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카이시아가 잠깐 방문 앞에 있다가 갔을 뿐인데도 방 안엔 미약한 술 냄새가 감돌았다.

“이리스에게 어떤 이야기를 들었어?”

“잠시만요. 전부 다 빠짐없이 이야기해 드릴게요. 제 성격 아시잖아요?”

데이지2는 채근하는 날 달래며 내 침대의 이부자리를 정리했다. 그러곤 그 위에 날 앉힌 채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음, 먼저… 드루이드님께서 사망했다는 루머에 대해 들었습니다. 28번째 테라리움 근방에 규모가 작은 자연 동굴이 하나 있는데 그곳이 폭발로 무너졌고 마침 그곳을 지나던 드루이드 무리가 이를 목격한 게 원인인 듯합니다. 그 안에 드루이드님의 대리 역할을 하시는 로웰라 님이 계셨거든요.”

“로웰라가 다쳤어?”

설마 폭발의 여파로 로웰라가 크게 다친 건가? 아니, 사망 소식이 나올 정도라면 설마….

데이지2는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으로 깜짝 놀라 다그치는 나를 달랬다. 일부러 차분한 행동을 보였던 건 내 감정의 동요를 최대한 막으려 했던 듯하다.

“물론 어마어마하게 큰 폭발이 일어난 것은 분명합니다. 그곳이 27번째 테라리움의 관할 지역이라 제가 알아차리는 게 늦었습니다. 하지만 로웰라 님께선 걱정하신 것만큼 크게 다치진 않으셨습니다.”

사고의 전말에 대해 데이지2가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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