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92화 (492/604)

똑똑똑.

“잊고 간 물건이라도 있나요?”

또다시 들린 노크 소리만 아니었다면 말이다. 똑같이 간결한 세 번의 노크 소리에 라운이 다시 돌아온 건가 싶어 의심 없이 문을 열었는데, 그곳엔 웬 처음 보는 여자가 서 있었다.

술통에 머리끝까지 빠지기라도 한 건지 술 냄새가 심하게 진동하고 있었다. 눈도 반쯤 풀려 있는 데다 몸을 가누기도 힘든지 벽에 손을 대고 간신히 균형을 잡고 있는 수준이었다.

“방을 잘못 찾아오신 것 같습니다.”

“뭐야, 남자인 줄 알았는데 여자였네.”

“혹시나 해서 말씀드리는데 전 드루이드입니다. 여차하면 무력을 사용할 수 있으니 돌발 행동은 하지 않는 게 좋아요. 이대로 본인 방으로 돌아가시는 게 어떨까요?”

“당신, 행정 관리원이라며? 다 들었어. 나도 행정 관리원인데 우리 통했네?”

주사가 고약하네. 난 이마를 짚으며 문 앞에 버티고 선 저 사람을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했다.

“행정 일에 관해서 이야기를 나누실 생각이라면 날이 밝은 후 정식으로 자리를 갖추어 하는 게 좋을 듯하네요.”

“그쪽은 정식 자리도 아니면서 우리 말을 멋대로 엿들어 놓고? 당신 일행에게 전해. 이곳은 외지 사람일수록 아무도 모르게 행동할 수 없어. 오히려 날 좀 봐 달라 대놓고 광고하고 돌아다니는 거라고. 에이, 책잡자는 건 아니야. 덕분에 우리 둘이 그런 무거운 자리는 내려놓고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그런 거지.”

그 말을 듣고 저자가 여기까지 찾아오게 된 경위가 한눈에 그려졌다. 라운이 엿듣고 있던 걸 당사자에게 딱 들켰나 보다. 그리고 저자는 여기까지 미행하다 여관 주인에게 귀띔을 들었겠지. 보니까 이 여관이 과수원과 상당히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것 같던데.

그래도 라운은 드루이드인데 이렇게 쉽게 미행을 허락하면 안 되는 거 아냐? 사고는 치지 않아서 잘했다고 생각한 불과 몇 분 전의 내가 어리석었다. 그는 사고를 몰고 다녔다.

“염탐을 하려던 건 아니었어요. 일행은 산책을 나갔다 본의 아니게 엿듣게 된 거고. 어쨌든 좋지 않은 일이 벌어진 건 이쪽 책임이니 사과드리겠습니다. 일행에게도 주의를 주겠습니다.”

“아니, 아니. 정말 책잡으러 온 거는 아니래도? 그저 이야기를 좀 하자는 거지. 당신도 행정 관리원, 나도 행정 관리원. 우리 둘만이 할 수 있는, 통하는 그런 이야기 있잖아?”

나는 문고리를 잡은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내가 어째서 생판 모르는 남의 술주정을 들어야 하는 걸까? 하지만 지은 죄가 있으니 단호하게 내치지도 못해서 미칠 노릇이었다.

“그럼 밖으로 나가죠.”

그녀를 내 방에 들였다간 온 방 안이 술 냄새로 가득 차 잠도 자지 못할 거란 생각이 들었다.

“오, 그것도 좋지. 내가 제대로 대접해 줄게! 원래 외부에서 온 귀한 손님은 대접을 해 줘야 하는 거잖아?”

“아뇨, 술을 마실 생각은 없어요. 여기 1층의 여관 식당을 이용하죠. 밤이라 이용할 손님도 없는 듯하니 주인에게 말해서 자리를 마련해 보는 게 좋을 것 같네요.”

“긴밀한 이야기를 하자니까?”

“구석에 앉아요.”

문을 잠그고 그녀를 지나쳐 1층으로 내려가자 여관 주인이 다 알고 있다는 듯이 실실 웃고 있었다.

“준비를 할까요?”

“아주아주 귀한 손님이 왔으니 성대하게 해야지!”

“네, 알겠습니다!”

신이 난 여관 주인이 바삐 주방으로 사라지는 게 보였다.

“일찍 떠나야 하니 오래 이야기할 순 없어요. 술을 마시지도 않을 거고요.”

가장 구석의 테이블 자리에 앉아 팔짱을 꼈다. 대체 그렇게 하고 싶은 긴밀한 이야기가 뭔지 들어나 보자.

“에이, 음식이 나오고 하지? 시간을 더 준다면 사람들을 불러 음악도 연주하고 분위기도 더 재밌게 만들어 줄 수 있는데 말이야.”

“긴밀한 이야기를 하자면서요. 그리고 전 당신이 말했듯이 행정 관리원의 신분으로서 이 자리에 앉아 있는 거예요. 이쪽이 빌미를 제공한 건 맞지만 좀 더 예의를 지켜 주셨으면 해요.”

“푸우우….”

그러자 그녀는 김이 빠졌다는 것처럼 길게 한숨을 쉬었다. 도통 알 수 없는 사람이었다. 난 테이블 위의 램프를 조명 삼아 그녀를 자세히 관찰했다.

옷깃은 단추가 떨어져 나가 아무렇게나 풀어헤쳐져 있고, 그녀가 직전까지 먹던 안주로 추정되는 음식물이 산발이 된 머리끝에 붙어 있었다. 빛도 못 보고 펜만 잡고 살았을 것처럼 보이는 폴룩스에 비해 그녀는 적당히 살이 오르고 근육이 붙은 생기 넘치는 체형이었다. 자유분방하고 활동적인 성격이겠지.

“그 행정 관리원은… 탈락이 안 되나?”

사람을 불러다 놓고도 한참을 병든 닭처럼 꾸벅꾸벅 고개를 흔들더니 반쯤 감긴 눈으로 한다는 소리가 저거였다.

“탈락이요?”

“그 뭐냐…. 자격이 안 맞아서 다른 사람에게 넘어가는 거 있잖아. 그런데 테라리움에 문제는 안 생겼으면 하고 그냥 자리만 싸악 바뀌었으면 하는데.”

“생각보다 행정 관리원 자리는 절대적이에요. 테라리움이 행정 관리원의 소유물이니까요. 외압에 의해 행정 관리원이 강제로 교체되는 경우는 제가 듣기론 없어요.”

테라리움에서 행정 관리원은 곧 법이었다. 그래서 행정 관리원이 횡포를 부려도 달리 어찌할 방법은 없었다. 다만 이로 인해 주민들이 떠나고 세금이 줄어들면 결국 손해는 행정 관리원이 본다.

테라리움이 파산 직전까지 가도 중앙 행정 관리부가 있는 1번째 테라리움이 도와주진 않는다. 세계수 가지에 문제가 생긴 것도 아니고 불법적인 일을 저지르지 않으면 간섭도 개입도 하지 않으니까. 파산하면 다른 주인 찾아가야지.

“자리를 바꾸고 싶다면 테라리움을 경매로 내놓든가 행정 관리원이 직접 소유권을 이전시켜 주면 돼요.”

그것도 아니라면 파필리온이 말했던 것처럼 직책을 다른 사람에게 넘기면 된다. 그런데 가족이 아니고서야 과자를 주고받는 것처럼 테라리움을 통째로 넘기는 경우가 드물 것이다.

이쯤 되니 나를 불러 이런 이야기를 하는 저의가 궁금해졌다. 어떤 이들은 사업을 정리하면서까지, 길드전을 벌이면서까지 손에 넣고 싶어 하는 게 바로 테라리움이었다.

만약 이 자리에 내가 아닌 아스키아 길드의 마스터가 앉아 있다면 ‘탈락’이라는 단어가 나온 시점에서 빼앗기 위해 미친 듯이 머리를 굴리고 있겠지.

“행정 관리원 직이 싫으신 건가요?”

“아무래도… 내겐 너무 버거운 자리니까.”

그녀는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다른 속내가 있는 게 아닌 정말로 행정 관리원 자리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뜻이 훤히 드러났다.

“어떤 이들은 그 자리를 얻기 위해 가진 모든 걸을 내놓기도 하는데요?”

“그럼 그렇게 간절한 사람에게나 갔으면 좋았을 텐데.”

일말의 미련도 담기지 않은 목소리였다.

“할 일은 많고 남의 눈치도 많이 봐야 하고 자유롭게 놀러 다니지도 못하고.”

하지만 내 눈엔 그녀는 할 일은 내팽개치고 눈치는 전혀 보지 않으며 그 누구보다도 자유롭게 방탕한 생활을 즐기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차라리 내 동생이 가져갔으면 좋았을 텐데. 이미 만나 봤지? 폴룩스라고. 그게 사람 사는 꼴이야? 매일 같이 과수원에 처박혀 서류만 바라보는 꼴이 말이야. 그렇게 애써 봤자 우리 테라리움이 나아지기라도 하냔 말이지. 어차피 망할 건데.”

어차피 망할 거라니. 이런 생각을 가진 행정 관리원은 또 처음이라 당혹스러웠다.

“그렇다는 건… 행정 관리원 자리는 물려받은 건가요?”

“뭐, 그렇지. 집안이 대대로 그거였거든. 첫째가 물려받도록 되어 있어. 본래 폴룩스는 나이가 차면 아카데미에 입학 후 졸업한다면 독립하기로 되어 있거든. 그런데 테라리움 사정이 갈수록 나빠져서 도저히 아카데미의 엄청난 학비를 감당할 수 없게 된 거야. 그래서 이도 저도 아니게 됐지.”

아카데미를 졸업하여 다른 삶을 살고 있었을 청년인데 지금은 뼈 빠지게 놀고먹는 형제의 뒤처리를 하고 있는 가련한 삶이라니.

“결혼도 못 할 거야. 폴룩스는 가진 재산이 하나도 없거든. 그나마 아카데미 출신이면 좀 나을 텐데. 뭐, 주민권은 있으니 48번째보다 훨씬 뒤 번대에서 살고 있는 여자라면 결혼해 주려나. 그래도 가진 거 하나 없더라도 행정 관리원이라는 직책이 있으면 좀 더 좋은 혼처가 생기지 않을까?”

그 말에 문득 미미르의 가족들과의 대화가 떠올랐다. 폴룩스의 사정과 엇비슷했는데, 그쪽은 자신들의 사랑둥이 막내의 혼처를 위해 베스탈리스 출신임을 크나큰 약점으로 잡고 혼수로 테라리움을 떡하니 넘기려고 했었지. 그때를 떠올리면 아직도 아찔하다.

“동생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싶은 건가요?”

“맞아. 당장이라도 주고 싶어. 솔직히 당신이 보기에도 나보다 동생에게 더 어울리지 않아?”

확실히 그러했기에 격한 동의를 담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죽어도 싫대. 이젠 뭐라고 할 부모님도 안 계셔서 이따위 자리 첫째가 됐든 둘째가 됐든 더 잘하는 사람이 가져가면 되는데, 절대 받지 않겠다는 거야. 그래서 뭐…. 될 대로 되란 식으로 나도 더 손 놓고 있지.”

“그렇기에 강제로 행정 관리원 직을 동생에게 떠넘길 방법이 궁금했던 거군요?”

“그렇지. 그냥 주는 건 안 받으려고 하니까.”

폴룩스는 왜 자리를 받지 않는 거지? 누나의 대리로 생고생만 할 거면 차라리 진짜 행정 관리원이 되는 게 더 이득이지 않나? 고생해도 억울하지 않을 거 아냐?

“이유는 물어봤나요?”

“말은 안 해 줘. 그때마다 그딴 고민 하느니 빨리 정신 차리고 밀린 일이나 열심히 하라는 소리를 들을 뿐이야.”

예의를 지켜 달라고 말했지만 그녀의 태도는 나아지지 않았고 나도 주정뱅이를 상대로 더 힘써 봤자 입만 아플 뿐이라 내버려 뒀다. 그보다 나와 그녀의 나이 차이가 그다지 많이 나지 않은 듯해 지금의 대화는 마치 친구 사이의 고민 상담처럼 느껴졌다. 물론 너무나 철없는 고민이었지만.

48번째 테라리움이 진작 망하지 않은 건 기적과 다름없는 게 아닐까? 훨씬 뒷번호의 테라리움들은 살려고 아등바등하는데. 테라리움의 대표인 행정 관리원이 이렇게 속없는 고민을 하고 있을 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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