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 오늘은 이만 쉬시고 날이 밝으면 뵙겠습니다.”
폴룩스는 끝까지 불안한 눈으로 여관 주인을 응시했고, 주인은 염려 말라며 연신 그를 향해 윙크를 했다.
“성심성의껏 잘 모시라고 당부 받았습니다. 방을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폴룩스가 사라지면 무슨 일을 낼 줄 알았으나 예상외로 평범하게 방을 안내받고 끝났다. 나는 따로 방을 쓰고 라운과 룽카는 함께 방을 쓰게 되었다. 60번대의 여관과 비교하면 호텔 수준이나 다름없었기에 둘은 굉장히 만족스러워하는 얼굴이었다.
각자 방에 들어가고, 난 한시라도 빨리 28번째 테라리움에 가고 싶은 마음에 차마 앉을 수도 없었다. 하루 종일 마차 안에 있었던 터라 온몸이 쑤셨지만 창밖만 하염없이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다.
“왜 벌은 아직도 작동을 안 하는 거지? 진짜 망가진 건가? 연락이라도 할 수 있다면…. 잠깐…. 내가 왜 단순하게 벌을 통해서 연락하려고만 생각했던 거지?”
아마도 로웰라가 잘못됐을 수도 있다는 걱정이 너무 큰 나머지 행동이 앞서게 된 것 같다.
“그러고 보니 다들 내 드라이어드를 통해 연락할 수 있었던 거 아니야?”
이미 48번째 테라리움까지 온 마당에 늦은 거나 다름없지만 아티팩트에서 데이지2를 불렀다. 내 아티팩트는 내 손에 넣은 테라리움들과도 연결이 되어 있으니 드라이어드들을 이용하면 거리 초월이 가능했다.
내 부름에 데이지2가 나타났다. 그런데 모습이 마지막으로 봤을 때와 달랐다.
“드루이드님, 부르셨나요?”
“목에 그건… 설마 가시야?”
그의 목엔 가시가 돋은 링이 채워져 있었는데 마치 구속구처럼 보여 기괴했다.
“네, 가시입니다. 신경 쓰지 않으면 피부를 파고들어서 아파요. 그래도 너무 아프면 가죽을 덧대어 놓을 수 있으니 저희 왕보다는 나은 처지입니다.”
“그거 데이지가 가디언이 되며 함께 영향을 받은 거야? 다른 데이지도 그래?”
“네, 왕이 시련을 받으니 권속들도 함께 받는 격이지요. 저희는 겨우 이 정도에 그치지만 왕께서는 매번 무기를 쥐실 때마다 가시에 찔리는 고통을 받아야 하시고….”
수다스러운 건 여전했다. 그런데 데이지가 노멀 필드의 가디언이 되어 전대에 의해 페널티를 받은 것이 그대로 포레스트에 소속된 드라이어드들에게까지 영향이 갈 줄은 꿈에도 몰랐다. 물론 따져 보자면 왕에게 이상이 생겼으니 그 권속들에게 이상이 생기는 것도 이해는 갔다.
거추장스러운 데다 아파 보여서 안타까울 따름인데, 레드 데이지의 종족 특성이 넘치는 생명력과 빠른 회복력이라 상처가 나는 족족 회복되는지 큰 부상은 없어 보였다. 하지만 눈에 보이는 상처만 없을 뿐이지 얼마나 고통스러울까.
“부디 데이지가 빨리 이겨 내고 가시를 떨쳐 낼 수 있으면 좋겠다…. 다들 고생이잖아.”
“왕께서는 분명 금방 이겨 내실 거라 생각합니다. 얼마나 자랑스러운지 몰라요. 레드 데이지에서 노멀 필드의 가디언이 탄생하다니. 온 테라리움에 소문을 내고 싶지만 때론 침묵이 모두를 안전하게 만든다는 걸 알기에 참고 있습니다. 그래도 저희 데이지들끼리는 만나기만 하면 그 이야기로….”
한마디를 하면 열 마디를 한다.
“그것보다 묻고 싶은 게 있어. 28번째 테라리움에 무슨 문제 없어? 내가 너무 당황스러운 소식을 접해서 그런데, 그런 일이 있으면 분명 28번째 테라리움에 있을 아무 드라이어드나 내게 소식을 알리러 오지 않을까 생각했었어.”
“행정에 큰 문제는 없습니다만….”
데이지2는 내 물음에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했다.
“내 길드원들에게 따로 들은 일은 없고?”
“제게 부탁한 말은 따로 없습니다. 드루이드님께선 벌이 있지 않으신가요? 보통은 그걸 이용해 서로 연락하시니까….”
“벌이 먹통이 됐어.”
“그건 이상한 일이네요. 드라이어드는 도움을 드릴 수 없는 영역이라 뭐라 말씀을 드리기가….”
“어쨌든 드라이어드에게 따로 말하지 않았다는 건 내가 생각하는 것만큼 심각한 상황이 아니라는 건가? 대체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내가 죽었다는 소문이 퍼지고 있는데 심각한 상황이 아니라는 건 또 뭐람.
“그것보다 이제 저는 저희 왕께서 보다 높은 직책을 가지셨기에 지배력이 강해져, 왕의 명령이 아니면 자주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범위가 많이 줄어들었습니다. 그동안은 스스로 드루이드님께 도움이 될 만한 정보를 찾아보는 일 정도는 할 수 있었다면 지금은….”
왕인 데이지가 가지는 영향력이 훨씬 커져서 우선순위가 바뀌었다고 말한다. 그동안 드라이어드인 데이지2에게 제1 순위가 드루이드였다면, 이젠 그보다 높은 0순위에 왕이 자리하는 바람에 자주성이 많이 떨어진 모양이다.
아마 이전이라면 데이지2는 소식지를 살피다 말도 안 되는 사망 루머를 접했을 것이고 내게 이를 알리러 왔을 수도 있다.
드루이드에 대한 과한 애착이 감소한 건 좋은 현상이었다. 그동안 가디언들의 직무 유기나 드라이어드들이 필드의 규율을 잘 지키지 못하는 대부분의 이유는, 그 무엇보다도 드루이드를 최우선으로 두며 사리 분별을 제대로 못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개인적으로는 필드가 제대로 돌아가기 위해 필요한 제일 첫 번째 일이 드루이드에 대한 애착을 떨어뜨리는 것이라 생각하기도 했다.
“그럼 길드원들에게 내 말 좀 전해 줄래? 벌이 먹통인 상황과 몇몇 테라리움 소식지에서 내가 죽었다는 소문이 퍼지는 건에 대해…. 아, 혹시 내 길드원들은 모두 무사해? 로웰라는?”
“저는 최근엔 주로 과수원에서만 생활해서 그분들과 만난 지는 오래되어서 잘 모르겠습니다. 돌아간다면 바로 말씀을 전하고 확인하겠습니다. 그 밖에 따로 부탁하실 건 없나요? 밑으로 데이지 한 송이가 더 들어와서 그런지 일손이 늘어 일이 수월해졌습니다. 역시 레드 데이지 종들이 일을 빠릿빠릿하게 잘하는….”
“얼른 다녀와. 얼른.”
수다가 길어질 기미가 보여 황급히 데이지2를 돌려보냈다. 그를 보내고 다시금 핸드폰을 통해 벌의 상태를 확인해 봤지만 눈에 띄는 이상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여전히 전송 기능이 먹통이었다. 대체 왜 이러는 걸까?
똑똑똑.
그때 조심스러운 노크 소리가 들렸다.
“주무시나요? 잠깐 시간 되시나요?”
날 찾아온 사람은 라운이었다. 그의 목소리라는 걸 알아차리자마자 무턱대고 걱정이 되었다. 설마 사고 쳤나?
문을 열자 라운 홀로 서 있었다. 곁에 룽카가 없다는 사실이 날 더욱 불안하게 만들었지만 땅굴 사건이 불과 얼마 전이었으니 그새 또 사고를 치진 않았을 거라 위안했다. 방 안에 들어온 그에게서 방문 목적을 들었다.
“산책 겸 테라리움 구경을 하러 나갔다 왔는데….”
당장 마부만 준비가 된다면 이른 새벽, 날이 밝자마자 출발할 예정이었기에 피로를 풀고 잠을 보충해도 부족할 시간에 쪼르르 나갔다 오다니.
“그… 말다툼 소리가 들려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리니 저도 모르게 엿듣고 말았습니다.”
의도치 않게 누군가의 이야기를 염탐하게 되었는데, 다툼의 주인공은 폴룩스와 어떤 여성이었다고 한다. 라운이 듣기에 대화가 심상치 않아 내게 전해 줘야겠다고 마음먹었다고 한다.
“대체 술을 얼마나 마신 거야? 28번째에서 사람이 왔다고 하잖아! 오늘 감찰하겠다고 밀어붙였으면 어쩌려고 했어? 그 꼴로 나올 거야? 아무리 노는데 바쁘더라도 월렛은 틈틈이 챙겨 보라고 하지 않았어?”
“아, 그런 자리에서 월렛만 들여다보고 있으면 사람들이 욕해. 흥도 깨지고. 예고도 없이 찾아온 건 그쪽인데 이 정돈 감안해야 하는 거 아니겠어? 그리고 네가 알아서 처신했다며? 감찰도 오늘 바로 할 건 아니라고 하고. 큰일이 난 것도 아닌데 호들갑 떨지 좀 마.”
“행정 관리원은 내가 아니라 너라는 걸 잊지 좀 마! 언제까지 그렇게 놀기만 할 거야? 오늘 같은 일이 또 생기고 그때도 네가 노느라 바빠서 부재한 상태라면 다른 테라리움이 우릴 뭐로 보겠어?”
“이제 와서 새삼 다른 테라리움의 눈치를 볼 필요가 있어? 행정 관리원의 사생활 때문에 평가 점수를 깎는다면 그쪽이 더 이상한 거 아니야? 됐어. 당장 내가 필요한 일이 아니라면 다시 술이나 마시러 갈래.”
“네 일은 항상 밀려 있어. 밀린 업무 좀 보란 말이야!”
“수고해.”
두 사람의 목소리를 흉내 내면서까지 이야기를 재현하는 라운의 모습이 조금 웃겼지만 너무 열심히 하는 터라 웃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참아야만 했다.
“이곳의 행정 관리원은 그런 타입인가 보네요. 예상했던 대로 일은 폴룩스 쪽이 다 하는 것 같고.”
“말투를 들어보니 친구보단 훨씬 스스럼없이 가까운 관계 같았습니다.”
“그럼 남매려나? 가족끼리 테라리움을 운영하는 건 종종 있는 일이니까…. 한쪽이 너무 놀기 좋아하는 탓에 다른 쪽이 고생하는 그림이 어렵지 않게 그려지네요.”
그런데 라운이 굳이 이걸 홀로 찾아와 내게 전할 이유는 딱히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폴룩스의 속은 터지겠지만 상대의 말처럼 그녀의 방탕한 사생활이 내 입장에선 그다지 문제 될 게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테라리움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든 세계수의 가지만 멀쩡하다면 오케이였다. 행정 관리원의 가장 큰 임무가 과수원의 세계수의 가지를 보살피는 거니까.
물론 이 경우는 폴룩스가 보살피고 있을 확률이 더 컸지만 당장 가지의 상태를 검사한 건 아니니 정말로 문제를 삼을 상황은 아니었다.
“그 번호 연계법이란 게 있으니까 혹시나 도움이 될까 해서 말입니다. 약점 같은 걸로….”
그 말에 그의 머릿속 생각이 훤히 보이는 듯해 더 이상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기본적으로 48번째는 저희 28번째와 거리도 멀고 중간에 38번째 테라리움이 존재하니 따지고 보자면 그렇게 긴밀한 관계를 유지할 필요는 없어요. 오늘의 방문은 정말 편의성을 위해서였을 뿐이니까요. 다만 같은 8번째 라인이 그런 좋지 않은 모습을 보인 게 조금은 쪽팔리긴 하네요.”
끝이 8번으로 끝나는 테라리움들은 왜 이렇게 우당탕인 느낌인 걸까? 아직 가보지 못한 8번째 테라리움도 만만치 않으려나?
“어쨌든 생각해서 일부러 알려 주러 오신 건 감사해요. 내일 일찍 출발해야 하니 이만 쉬러 가시는 게 어때요?”
솔직히 라운이 이곳에 머물며 사고만 안 쳐도 할 일은 다 해 줬다고 생각한다. 문을 열기까지 대체 무슨 일을 저질렀을까 오만 생각을 다 했던 걸 떠올려 보면, 겨우 우연히 엿들은 말을 전해 주러 온 건 해프닝이라 치기에도 사소한 일이었다.
“놀기 좋아하는 방탕한 행정 관리원이라….”
따지고 보면 내 테라리움들 또한 행정 관리원인 내가 부재할 때가 많아 보좌관과 직원들에 의해 굴러가고 있으니 남을 욕할 처지는 아니었다. 적어도 부재 기간은 테라리움 내에서 노느라 바쁜 그녀보다 여행하고 다니는 내가 더 길 테니까. 그냥 폴룩스만 불쌍할 뿐이었다.
라운이 돌아가고 이젠 침대에 누워 잠을 청하면 될 일이라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