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90화 (490/604)

보다 못한 룽카가 가까이에 있는 직원을 불렀다.

“지금은 영업 종료입니다. 날이 밝으면 다시 방문하세요.”

퉁명스러운 목소리가 우릴 냉대했다.

“과수원은 영업 종료가 없는데요?”

“우리 테라리움은 있습니다. 모든 테라리움의 법이 다 같진 않잖습니까? 마음에 안 드신다면 다른 테라리움으로 가시든가요.”

그러면서 자기들끼리 낄낄대며 웃는다.

“48번째 테라리움이 이 상태가 되도록 앞 번대는 대체… 아, 미미르의 테라리움이었군.”

이 정도까지 엇나가는 걸 방지하기 위해 번호 연계법이 존재하는 거였다. 세계수 가지의 품질 검사 때문이라도 주기적으로 38번째 테라리움에서 시찰을 했어야 했는데, 38번째 테라리움은 내부 일을 수습하느라 바빠 외부를 돌아볼 여유도 없었을 것이다.

더구나 나조차 그런 번호 연계법이 존재한다는 걸 애가 닳은 38번째 테라리움에서 직접 찾아와서 알게 됐으니.

“어쩌면 38번째 테라리움이라면… 뇌물을 받았으려나?”

충분히 일리가 있었다. 그곳은 행정 관리원의 권력은 땅바닥을 기다시피 했고 자문 위원회가 대신 권력을 휘두르고 있었으니 48번째 테라리움에 적당한 뇌물을 받고 사찰 따윈 눈감아 줬을 확률이 컸다.

“어쩔 수 없네요. 이봐요.”

“업무 종료됐다니까요?”

“아뇨, 28번째 테라리움에서 행정 관리원이 왔다고 전해 주세요. 번호 연계법은 업무 종료에 구애받지 않으니 지금 당장이라도 집무실에 불 켜야 할 겁니다.”

내 말에 시시덕거리던 직원들의 표정이 뚝 굳어 버렸다. 한참을 자기들끼리 눈치를 보더니 되레 당당한 태도로 나왔다.

“38번째도 아니고 28번째라고요? 그 말을 어떻게 믿습니까?”

“월렛이 있는데 대체 누가 간 크게 행정 관리원 신분을 사칭하겠나요?”

내 말에 룽카와 라운이 뜨끔하는 표정이 되었다. 에르바 길드에서 혹시 내가 사칭범이 아니냐는 말이 나왔기 때문이겠지. 하지만 그들은 월렛으로 남의 정보를 들여다볼 수 있는 권한이 없는 데다 하필 소식지도 그런 기사를 터뜨렸으니 이해는 됐다.

난 핸드폰으로 가려진 내 정보를 한정 오픈을 했다.

행정 관리원은 자신의 테라리움에 방문하는 모든 이들의 정보를 알 수 있었다. 다만 자신보다 번호가 앞인 행정 관리원의 정보는 확실하게 알 수 없었다. 18번째의 행정 관리원이 내가 28번째의 행정 관리원임을 알 수 있으나, 38번째의 행정 관리원이 내가 28번째의 행정 관리원임을 알지 못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제 내가 행정 관리원이란 걸 같은 행정 관리원은 아주 잘 알겠죠.”

내 핸드폰을 흔들며 말하자 직원들의 얼굴에 당찬 표정이 금세 허물어지며 사색이 되었다.

난 조금 후면 직원들과 동일한 표정을 한 행정 관리원이 나타날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도 나타나는 사람은 없었다.

“행정 관리원이 부재중인가요?”

“아니 그게….”

월렛을 보고 있다면 방문자들 목록에서 내 정보가 결코 지나칠 수 없을 정도로 눈에 띄고 있을 게 분명하다. 그런데 28번째의 행정 관리원인 걸 오픈했음에도 불구하고 나타나지 않는다고? 그렇다는 건 자고 있거나 병상에 누워 있거나 출장을 갔다는 이유 등으로 이곳에 아예 올 수 없는 상황일지도 몰랐다.

그렇다면 직원들은 이러이러해서 행정 관리원이 올 수 없다고 설명해 주면 되는데, 다들 말을 얼버무리는 게 이상했다.

“대체 뭘 하고 있길래 말을 해 주지 않는 건가요?”

“화… 확인해 보겠습니다!”

직원 중 하나가 황급하게 뛰어나갔다. 그런데 집무실이 있을 과수원 내부가 아닌 과수원 밖으로 뛰어나갔다. 가끔 사택을 과수원 밖에 두는 행정 관리원도 있으니 이해는 됐으나… 뛰어가는 직원의 뒷모습이 너무나도 멀어진다는 게 문제였다. 대체 어디까지 가는 거야?

“그… 그런데 28번째 테라리움에선 어쩐 일로….”

“38번째 테라리움이 일로 바쁜 거 같아서 대신 와 봤어요.”

미미르가 이 사실을 알았다면 울었을 것이다. 자신이 일을 잘못하고 있다고 책망하겠지. 내 밑에서 배우며 어느 정도 자신감은 되찾았지만 그 애는 아직까진 내게 바곳에 버금가는 울보였다.

한참을 기다렸을까…. 뛰어나갔던 직원이 누군가와 함께 돌아왔다. 직접 데려온 걸 보면 아마 이 테라리움의 행정 관리원이겠지.

“…….”

둘 다 얼마나 급하게 뛰어온 것인지 코와 입을 한껏 동원해 모자란 숨을 채우느라 말을 할 여유가 없어 보였다.

“안녕… 안녕하세요. 28번째 테라리움에서… 오셨다고….”

상당히 수척해 보이는 남자였다. 눈 밑의 다크서클이 볼까지 내려올 정도로 진했고 오랫동안 햇빛을 못 본 듯 피부가 종잇장처럼 새하얬다. 알이 굵은 안경과 굽은 어깨는 장시간 책상에 앉아 일을 한 사람이란 걸 나타내고 있었다.

“연락도 없이 갑자기 찾아와서 죄송합니다.”

저렇게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아닙니다. 관리 감찰은 불시에 하는 게 보통이니까요. 오히려 태만한 모습을 보여드려 죄송합니다. 저는 ‘폴룩스’입니다.”

예상했던 것보다는 제대로 된 행정 관리원이란 생각이 들었다. 과수원이 이런 꼴이니 멀쩡한 사람은 아닐 거라 생각했었는데…. 혹시 정상적인 모습을 연기하는 걸까?

“28번째 테라리움의 행정 관리원인 제희예요.”

“아, 혹시 저분들은….”

그가 내 옆의 라운과 룽카를 가리키며 물었다.

“이쪽 분들은 저와 함께 온 일행이지만 테라리움과는 무관하신 분들입니다.”

“저… 감찰은 바로 하실 겁니까? 그게….”

폴룩스는 상당히 당황하고 있었다. 난데없이 감찰받게 된 상황에 당황할 만하지만 마치 무언가를 기다리는 것처럼 수시로 시선을 움직이며 손끝을 만지작거렸다. 그렇기에 그가 당황한 이유가 단순히 갑작스러운 나의 방문이 전부가 아닐 거란 생각이 들었다.

“아뇨, 날이 늦어서 바로 하진 않을 예정이에요. 그것보다 혹시 과수원 측에서 묵을 여관을 소개해 줄 수 있을까요?”

과수원은 외부에서 방문하는 VIP들을 위한 숙소를 따로 마련하는 편이었다. 물론 앞 번대 테라리움의 사정이었지만 그래도 그나마 좋은 여관 정도는 소개받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럼요. 당연하죠.”

감찰을 바로 하지 않겠다는 내 말에 폴룩스의 얼굴이 밝아졌다. 월렛을 꺼내 아마도 여관 정보를 살피고 있을 그를 보는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혹시… 행정 관리원이 맞으신가요?”

“…….”

당황해서 입을 다물어 버린 그를 보며 더욱 확신이 생겼다. 의심이 들었던 이유는 두 가지였다. 그가 자신을 소개할 때 행정 관리원이라 바로 말하지 않은 점과 월렛을 통해 나와 내 일행들의 신분을 바로 확인하지 않은 것.

그가 당황했던 이유도 본인이 행정 관리원이 아니었기 때문이라면 설명이 되었다.

“아니신 거죠? 지금 48번째 테라리움의 행정 관리원께서는 많이 바쁘신가요?”

“그게…. 네, 다른 볼일이 있어서 보좌 격인 제가 대신 왔습니다. 속일 생각은 없었습니다. 제가 대부분의 행정 일을 처리하고 있어서 감찰도 행정 관리원 없이 진행할 수 있을 거라 오판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이 자리에 끝내 행정 관리원이 나타나지 않았다는 사실이 이상했지만 애초에 이곳을 방문한 본래 목적이 그게 아니었으므로 큰 상관은 없었다.

“바쁘시다면 재촉할 마음은 전혀 없습니다. 사정이 좋지 않은 듯하니 감찰도 다음으로 미루는 게 좋겠네요. 그땐 제가 아니라 38번째 테라리움에서 사람을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더 부담을 줘선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아예 그가 걱정하고 있을 감찰에 대해서도 충분히 미룰 수 있다는 여지를 주었다.

그나저나 보좌 격이라면서 자신을 보좌관이라 소개하지 않고, 대부분의 행정 일을 처리하고 있다 말한다. 그러니 자연스레 이곳에 나타나지 않는 행정 관리원은 무늬만 행정 관리원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게 된다.

대체 이곳의 행정 관리원은 어떤 사람인 걸까?

상념에 잠겨 있던 중 과수원 근처에 있는 여관을 소개받아 자리를 옮겼다. 과수원 사람을 달고 가니 냉대는커녕 환영을 받았다. 그런데 좀 기이한 환영이었다.

“오, 과수원에서 오신 분들 아니십니까? 그분도 곧 오십니까? 준비할까요?”

여관 주인은 두 손을 비비며 폴룩스를 향해 교활하게 웃어 보였다.

“아니요. 오늘은 귀한 손님들께서 묵고 가실 예정입니다.”

아주 빠르게, 마치 변명하듯 말을 한 폴룩스가 급하게 여관 주인을 끌고 구석으로 향했다. 그러곤 이쪽이 듣지 못하도록 각별히 주의하며 둘이 속삭이는 모습이 보였다.

“뭘까요?”

라운이 슬쩍 그쪽을 향해 몸을 숙이며 물었다. 그 역시 뭔가 꺼림직한 냄새를 맡은 것이 분명하다.

“당연하게 누군가 더 올 거라고 예상하는 건 뭐고 준비는 또 뭘까요?”

기웃기웃, 궁금해 죽겠다며 몸을 기운 행동이 제법 티가 났는지 따로 은밀하게 대화를 나누러 떠났던 이들이 헛기침을 하며 다급하게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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