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87화 (487/604)

아, 설마…. 메스키트도 뭔가를 알아차린 걸까? 그래서 실새삼이 내게 조언했듯 그녀가 엘더에게 무슨 말을 한 게 아닐까? 그걸 들은 엘더가 삐져 있던 상태였고.

실새삼에게 들킨 것과 메스키트에게 들킨 것은 천지 차이였다. 혹시 엘더뿐만 아니라 내 감정까지 들킨 건 아니겠지? 실새삼에게 들킨 게 쪽팔린 정도라면 메스키트에게 들킨 건 어쩐지 큰 잘못을 저지른 듯한 기분이 든다. 그래서… 내가 없는 이 방 안에서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어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나 잘게.”

꾸역꾸역 아무것도 모른 척 침대의 이불을 비집고 들어가니 엘더가 자연스럽게 따라온다. 만약 이전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내 옆에 눕겠다고 한다면 내 심장은 터져 버릴 것이다. 차라리 인간이었다면 침대에서 함께 잔다는 게 이 얼마나 낯 뜨거운 행동인지 알 텐데, 저놈은 모르겠지.

“나도….”

“엘더.”

등 뒤로 서늘한 목소리가 닿는다. 사막의 매서운 밤 추위와 같은 목소리에 방 안이 쥐 죽은 듯 고요해진다.

“그러고 보니 내가 널 훈련시킨 지 참 오래됐구나. 너와의 시간을 생각해 보면 레드 데이지를 가르친 시간은 찰나에 불과한데, 그녀는 어엿한 노멀 필드의 가디언이 되었고 넌 아직도 철없는 묘목이나 다름없다니.”

그럴 리 없지만, 그녀의 목소리가 꼭 나도 함께 질타하는 듯해 침대 시트를 꽉 부여잡고 눈을 감았다. 분명 들켰다. 적어도 엘더의 마음이 들킨 건 백 퍼센트였다.

“네게 교육받을 시절은 지났어. 나도 어엿한 성목이야. 날 너무 묘목처럼 취급하지 마.”

“글쎄? 내 눈엔 눈 내리는 시기에 멋모르고 고개를 내민 여름 싹처럼 보이는데.”

엘더가 여름꽃이긴 하지.

“저마다 피어야 할 시기가 정해져 있는 당연한 순리를 잊어버린 것처럼 네가 멍청해 보여서 도저히 참을 수가 없구나. 따라오렴. 이대로 이곳에서 계속 시끄럽게 굴어 제희의 잠을 방해하고 싶은 게 아니라면.”

메스키트는 엘더가 내게 연애의 감정을 품은 것이 순리에 어긋났다고 말하고 싶은 걸까?

“이….”

엘더가 분노에 이를 악문 게 느껴진다. 메스키트에게 끌려가면 결과는 정해져 있으니 싫다고 반항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 순순히 따라간다. 시끄럽게 굴어 내 잠을 방해할 수 있다는 말이 신경 쓰인 거다.

둘이 아티팩트 안으로 사라지자 방 안을 무겁게 내리누르던 분위기가 확 풀려 버렸다.

“음….”

방 한가운데서 멀찍이 이를 보고 있던 데이지가 말했다.

“전 구경 갈래요!”

어쩐지 약간은 신이 난 말투였다. 지금처럼 성장하기 전까진 직접 메스키트에게 훈련을 받았던 그녀이니, 엘더가 어떤 꼴로 굴려질지 아주 잘 알고 있을 터였다. 데이지는 엘더와 크게 척을 진 게 아니라 그가 고통받는 것이 놓치기 아까운 볼거리가 아닐 텐데도, 웃음기 가득한 목소리로 말하고 있었다.

어쩌면 그녀의 가벼운 말투가 내가 없던 방 안에서 일어난 일이 그다지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고, 걱정할 필요 없다고 말하는 듯했다. 하긴, 메스키트와 엘더 사이가 아주 심각했다면 데이지가 저렇게 재미난 목소리로 구경하러 가겠다고 하지 않을 것이다.

그녀 나름의 배려에 마음이 눈 녹듯 녹아내린다. 난 정말 사랑스러운 드라이어드들과 함께였다. 이 관계가 영원토록 어긋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러니 엘더의 감정에 대한 진위 여부를 확인하고 받아들이고 싶은 내 마음은 욕심인 게 아닐까?

지금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여상한 관계를 유지하려면 실새삼의 말처럼 그의 마음이 내 감정을 흉내 낸 거라 치부하고….

다시금 땅굴에서의 엘더 모습이 떠오른다. 머릿속의 엘더는 그때의 애처로운 모습으로 내게 다시금 애원하고 있었다. 감정은… 너무 어렵다.

“끝나면 말해 주거라. 당분간 아티팩트엔 얼씬도 하지 않을 테니.”

침대 한쪽이 가볍게 기우는 것이 느껴진다. 의도치 않게 엘더가 노렸던 자리가 실새삼의 차지가 되었다. 아티팩트 안은 지금 전쟁인 데다 메스키트를 무서워하는 실새삼이니, 물론 자긴 아니라고 하지만 당장 있을 곳은 내 옆뿐일 테니까.

“너무… 심하게 다루진 말라고 말해 줘.”

데이지가 아티팩트로 돌아가기 전, 안쓰러운 마음을 담아 말했다. 그런데 평소라면 ‘네!’하고 해맑게 대답해 줬을 그녀가 그저 빙그레 웃기만 하고 가 버렸다. 데이지는 메스키트가 내 부탁으로 인해 사정 봐주길 원치 않는다는 것처럼….

문득 소름 끼치는 생각이 들어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내 이부자리를 정리해 주고 있던 실새삼이 또 뭐냐는 얼굴로 날 바라봤다.

무리에서 비정상적인 행동을, 그것도 부정적인 방향에 가까운 행동을 보이는 존재는 배척을 받는다. 혹시 지금 엘더의 행동이 내 드라이어드들에게 부정적인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건 아닐까? 실새삼은 원래 모든 드라이어드들에게 부정적인 놈이니 제외하고.

데이지의 산뜻한 표정의 무응답을 보고 적잖이 충격받은 나머지 결국 새벽까지 뜬눈으로 밤을 새우고 말았다.

딱히 깨우는 사람이 없어서 늘어지게 늦잠을 자 버렸다. 일어났을 땐 이미 아침이라고 하기엔 너무 늦어 버린 시간, 다른 길드의 길드 룸을 빌려 하루를 묵어 놓고 모두가 활발히 활동하는 시간대에 뒤늦게 잠에서 깨어난 게 민망해졌다.

늦게 잔 탓도 있지만 아무도 깨우지 않아서 오랜만에 푹 잔 것 같다.

난 팅팅 부은 얼굴을 찬물에 푹 담그며 아직도 잠기운이 가득한 뇌를 깨우려 애썼다.

“메스키트와 엘더는… 아직도인가?”

침대에 일어났을 때 보인 건 방에 구비된 책들을 읽고 있던 실새삼뿐이었다. 그렇기에 어쩌면 밤새… 메스키트에게 훈련을 받았을 엘더가 미친 듯이 불쌍해졌다.

“뭐 봐?”

씻는 걸 끝내고 수건으로 물기를 닦으며 어울리지 않게 독서를 하고 있는 실새삼에게 물었다.

“이 방의 주인은 괴상한 독서 취향을 가지고 있군. 온통 고양이 이야기밖에 없다.”

그러고 보니 방의 곳곳엔 고양이 그림이 가득했다. 액자나 인형, 심지어 이불의 무늬까지 전부 고양이었다. 하지만 정작 살아 있는 고양이의 흔적은 느껴지지 않았다. 고양이 키우는 사람들의 집은 대개 아무리 노력해도 고양이 털을 완전히 제거할 수 없으니까.

그렇다는 건 고양이를 무척이나 좋아하지만 키우진 않는, 혹은 못 키우는 사람인 건가?

“왜? 고양이 귀엽잖아. 그게 괴상한 취향까지야?”

“책은 정보가 담긴 보고이다. 손쉽게 다른 이의 지식을 훔칠 수 있는 방법이지. 하지만 한 정보에만 집착하고 의사소통도 안 되는 동물을 이렇게까지 이해하고 찬양하려 들다니. 별로 가까이하고 싶진 않군.”

“가끔은 명확하게 의사소통을 할 수 없어도 이해가 전혀 불가능한 존재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

고양이 귀여운데 왜.

침대에 앉아 생각했다. 나처럼 어디 한 곳에 붙어 있질 못하는 사람은 개나 고양이를 기를 수 없겠지? 혹시 이 방의 주인도 그런 부류가 아닐까? 아니, 어쩌면 모든 드루이드들이 그럴지도 몰라.

거처하는 길드 룸이 있다 하더라도 드루이드는 언제 다치고 죽을지 모르는 존재들이었다. 말 못 하는 생물이 이걸 이해해 줄 순 없겠지.

“음, 식물 중엔 동물에게 해로운 식물도 꽤 많으니까 그런 드라이어드를 데리고 있다면 동물을 기르는 건 아예 불가능하겠네.”

드루이드는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정말 특수한 직업이었다.

기껏 일어난 게 무색하게 침대에 벌렁 드러누웠다. 당장 할 일이 완료되어 약간의 여유가 허락된 상황이었다. 만약 내가 애초에 목적했던 일을 달성했다면 지금쯤 바쁘게 신전형 던전을 찾으러 돌아다니고 있겠지. 그래서 지금은 약간 머리가 붕 뜬 상태였다.

“이제 뭘 해야 하지.”

해야 될 일은 많다. 다만 그 일들이 대부분 기간을 길게 잡아야 할 대형 프로젝트거나 정보를 기다려야 해서 섣불리 선택할 수 없다는 것뿐.

고개를 돌리니 침대 시트의 새하얀 털에 녹색 눈을 한 고양이 그림이 내게 눈을 마주해 온다. 엘더를 닮은 고양이란 생각이 들자 다시금 볼이 뜨거워진다. 큰일 났다, 큰일 났어.

“좀 쉬는 게 어떻겠느냐? 물론 길게는 아니고 하루 이틀 정도는 아무 생각 없이 지내도 되지 않겠느냐? 아무것도 하지 않고 네가 좋아하는 잠만 푹 자도 뭐라 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으음….”

실새삼의 말처럼 쉬는 것도 좋겠지만 내가 그렇게 여유를 가져도 될지 불안함과 조급함이 든다. <테라리움 어드벤처>에 막 도착한 초기의 나라면 그게 가능했을 것이다.

게임도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뉴비는 며칠 게임에 접속하지 않아도 큰 문제가 없지만, 고인 물들은 게임에서 할 게 없다고 노래를 부르고 다녀도 막상 접속하면 기계적으로 숙제처럼 콘텐츠를 뚝딱뚝딱 완료하다가 몇 시간을 우습게 보내는 존재들이었다.

그렇게까지 목을 매지 않아도 되지만 술에 떡이 된 날에도 일일 퀘스트를 하기 위해 게임을 켜는 게 고인물들 아닌가.

지금의 나 또한 그랬다. 더 이상 뉴비 제이는 존재하지 않고, 해도 해도 끝이 보이지 않는 퀘스트만 산더미처럼 남은 고인 물 제희가 되어 버린 것이다.

“그럴까…? 그럼 어차피 또 일을 시작하면 밤을 새우거나 침대는커녕 마차나 땅바닥에서 겨우 잠드는 일이 허다할 텐데 하루 정도만….”

66번째 테라리움에 아티팩트 공방은 있을까? 아니면 오늘 아티팩트 공방이 있는 다른 테라리움으로 떠나 간만에 다이아를 펑펑 쓰면서 스트레스 해소도 하고, 엘더와 데이트를 빙자한 나들이를 하면서 그의 마음을 면밀히 관찰하는 시간을 갖는다면….

똑똑똑.

“제희 님, 일어나셨습니까?”

그렇게 둘 순 없지. 꼭 세상에 내게 그렇게 말하는 듯하다.

“네, 무슨 일이세요?”

어쩐지 다급한 목소리에 이야기를 듣기도 전에 불안한 마음이 생겼다. 바삐 문을 열자 묘한 표정을 짓고 있는 에르바 길드원이 서 있었다.

“혹시 큰일이라도 생겼나요?”

전해 듣기론 에르바 길드는 테라리움의 지원을 받아 우리가 발견한 땅굴을 전수 조사하는 의뢰를 수행하게 되었다. 한동안 주위 테라리움을 시끄럽게 만든 실종 사건들의 원흉이기도 하고 워낙 심상치 않은 일들이 많이 일어났던 곳이니까.

아직까진 그곳에 노멀 필드 가디언의 시체가 잠들어 있었다는 소식이 외부로 흘러나가진 않았고 미친 집단의 광기 어린 행동이었다는 형식상 보고로 인해 구조해 낸 실종자들 외에 혹시나 있을 다른 실종자들을 찾는 데 주력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1번째 테라리움에서 충분히 이단 문제로 개입할 수 있는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테라리움 측은 아직 심각성을 모르기에 소속 길드들에 단순히 의뢰만 맡긴 상태였다.

그래서 땅굴에서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음… 제가 듣기론 28번째 테라리움의 전속 길드인 가이아 길드의 마스터이시라고…. 맞으시죠?”

조금은 뜬금없는 물음이 첫머리를 뗐다. 에르바 길드에 의뢰를 맡기며 간부들에게 내 신상을 어느 정도 밝혔기에 딱히 숨길 일은 아니었다.

“네, 그런데요?”

“그럼 뭔가 이상한데…. 저기… 당신이 저희를 속였다곤 생각하지 않지만 현재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거든요.”

길드원은 그렇게 말하며 등 뒤에 숨기고 있던 소식지를 내게 건넸다.

“66번째에서 발행되는 소식지는 아니고 좀 더 앞 번대에서 발행되는 소식지예요. 저희는 상당히 다양한 테라리움의 소식지를 일주일 간격으로 받아보고 있는데 그중 하나에 이런 내용이….”

대체 무슨 일인가 싶어서 건네준 소식지를 황급히 살펴보았다. 바로 1면에 두 눈으로 봐도 믿기지 않는 기사가 실려 있었다. 누군가의 부고를 알리는 기사였다. 그것도 나에 대한 부고를.

아스키아 길드와의 길드전으로 유명세를 탄 가이아 길드의 마스터가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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