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86화 (486/604)

이젠 오래된 기억이나 다름없는 어닝과 인동덩굴의 대화였다.

어닝은 살기 위해 16번째 테라리움에 인동덩굴과의 영혼의 연결을 끊어 숨겨 두었고 오랜 시간이 지나 다시 꽃을 찾으러 돌아왔다.

하지만 금은화라고도 불리는 꽃의 특성으로 인해 인동덩굴은 영혼의 연결을 맺지 않은 기간 동안 다른 자를 드루이드와 버금가는 인연으로 마음속에 새겼다. 그 마음은 죽어 가는 그자를 위해 기꺼이 자신의 목숨까지 바칠 수 있는 마음이었다.

인동덩굴이 마음속에 품은 자는 드루이드가 아닌 평범한 인간이었으므로, 실새삼의 말처럼 드라이어드가 추구하는 궁극적인 관계인 영혼의 연결에 전혀 부합하지 않았다. 하지만 분명히 말도 통하지 않는 그자를 인동덩굴은 사랑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 사랑을… 드루이드인 어닝에게 배웠다고 했다. 소중히 여기고 아끼며 사랑하는 존재를 대하는 방식. 그런 극단적인 방식이 어닝의 스케어크로우를 향한 마음에서 비롯됐음을 알게 됐지.

그렇다면 인동덩굴의 마음은 결국 어닝을 흉내 낸 것에 지나지 않다고 말할 수 있는 걸까?

“난 엘더에게 내가 사랑하는 모습을 보여 준 적 없어. 그러니 내 감정을 흉내 냈다고 볼 수 없어.”

“정말 그럴까?”

확신이 가득한 물음에 도리어 어이가 없어졌다.

“넌… 엘더가 사랑에 빠진 거라면 반드시 내 감정을 흉내 냈을 거라 확신하는 거야?”

실새삼은 대답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말도 안 돼.”

견본이 없잖아, 견본이. 이 세계에 와서 내가 그런 성애적인 사랑의 모습을 보인 적이 없는데? 얼굴 보고 반한 적은 많지만 그건 단순히 호감을 느낀 것에 지나지 않잖아? 따로 내가 스킨십을 한다거나 그런….

그러자… 수없이 많은 장면들이 파노라마처럼 지나갔다.

엘더의 외모를 칭찬할 때마다 틈틈이 볼을 쓰다듬고 껴안고 손길이 닿았던 과할 정도로 오지게 많은 순간들이….

“어…? 설마….”

실새삼의 말을 듣고 의식한 직후 단번에 떠오른 장면들이니 깨닫고 만 것이다. 정말 그를 향한 모든 손길에 한순간도 그런 감정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고 단언할 수 있나?

결국 원인 제공은… 내가 한 거였다.

엘더를 처음 봤을 때, 그의 예쁜 얼굴이, 그의 모든 것이, 물론 성격 빼고, 지나치게 취향에 들어맞았던 걸 의심했어야 했다. 가끔씩 대범하게 스킨십을 하는 그에게 가슴이 두근거리고 가까이하는 거에 전혀 거리낌이 느껴지지 않고 오히려 호감을 느꼈던 매 순간을 말이다.

그의 커다란 품이 좋고 단점이라 여겼던 성격도 나중엔 알기 쉽고 솔직한 성격이라 오히려 귀여워 보일 지경이었지.

엘더는… 내가 엘더를 바라보는 눈에서 배운 것이다. 나조차도 의식하지 못했던 감정을 말이다.

그러고 보니 내 연애는 어땠더라? 사랑에 빠졌을 때의 난 어땠지?

살면서 겪어 본 제법 많은 연애 경험 속에서 상대의 자리를 단순히 엘더로 치환했을 때 전혀 이질감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였다. 그렇다면 난 엘더에게 첫눈에 반했던 걸까?

“…….”

지금 입을 열면 실새삼의 말이 맞는다는 걸 증명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엘더가 단순히 내 감정을 흉내 내는 거라면 조금 비참할 것 같다.

“하지만 엘더는 내게 다가왔던 남자들을 전부 질투하고 부러워했다고 했어. 그건 흉내만으로 나올 수 없는 감정이라고 생각해. 너는 어떤데? 내가 다른 인간과 결혼한다고 하면 어떤 기분이 드는데?”

“네가 결혼한다고 해서 우리의 영혼의 연결이 끊어지는 건 아니잖아?”

관계의 우위, 실새삼은 내가 이성을 만나 교제하거나 결혼까지 가더라도 전혀 상관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하지만 엘더는 그게 안 될 거 같은데? 사랑하는 상대에게 접근한 자에 대한 질투나 시기의 감정은 엘더에게 가르쳐 준 적 없어.”

내가 엘더를 향한 타인의 시선을 보고 그런 감정을 느낀 적 없다 자부하니 확신했다.

“그 남자들이 너의 무엇을 보고 접근했다고 생각하는데?”

“접근했다고 하니 말이 이상하긴 한데. 내가 다이아가 많고 사회적 지위가 높으니 껄떡대는 놈이나… 처음으로 제대로 대화해 주고 인간 대 인간으로 바라봐 줬다고 마음에 두게 된 경우나….”

파필리온의 경우 대놓고 어필했으니 이유를 잘 알았고 시들링은 유추였다. 그 밖에도 미미르가 있긴 했지만 이건 그 나이대의 아이가 연상에 느끼는 호감 정도라 생각하고.

“그리고 그들이 네게 품은 감정이 하얀 꽃과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하는 거고?”

“그렇지.”

“그리고 넌 하얀 꽃을 대할 때와 달리 거절했고 말이야.”

“그래, 그때는 모험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으니까.”

“정말 더 중요한 게 있어서 거절한 게 맞아? 드루이드가 함께 여행하는 건 드문 일이 아니잖아?”

실새삼의 말처럼 함께 여행하면 해결될 문제이긴 했다. 오히려 드루이드가 여럿 여행하는 게 더 안전하니까 굳이 솔로 플레잉을 고집하는 건 미련해 보일 수도 있었다.

“그럼 다른 문제가 있는 거겠지.”

다른 문제라….

“네가 그들의 마음을 받아 줄 수 없는 이유가 그게 전부가 아니니 그런 게 아닌가?”

파필리온은 얼굴은 엘더 얼굴만큼 내 취향이었는데 너무 가벼운 데다 성격도 이상했지. 엘더 성격도 이상하긴 한데 걘 귀여운 수준이라니까?

반면에 시들링은 너무 무거워 보였어. 연애가 아닌 그를 ‘감당’하는 것이 최우선 목표로 여겨질 정도였으니까. 물론 엘더도 등급 차별하며 예의 없게 굴던 시절이 있긴 했지만 성장하며 성격도 함께 성장했으니까.

아, 그래. 전부 엘더를 기준으로 재고 있는 날 발견하니… 답이 나온다.

무의식중에 계속 엘더를 떠올렸던 내 마음을 그가 배우게 되어, 그 또한 내게 이성이 접근할 때마다 의식하게 되었다고 보는 건가.

“하지만 그런 식이라면…. 미묘한데.”

실새삼의 말처럼 엘더의 감정이 단순히 내게서 배워 날 흉내 내는 데 그친 거라면 어쩐지 슬플 것 같다. 결국 날 좋아한다는 게 그의 진심이 아니라는 거잖아. 인간과 드라이어드는 사랑할 수 없다더니, 내 감정에 동화되었던 것이 전대 노멀 필드 가디언을 계기로 증폭된 거라면 나 혼자 북 치고 장구 치고….

그럼 어떡해. 이미 난 그를 보는 것만으로도 얼굴이 화끈거릴 정도로 의식하게 되어 버렸는데.

차라리… 차라리 실새삼에게 미리 이런 언질을 받았다면 내 마음은 이미 사전에 벽을 세웠을 것이다. 하지만 난 아직도 땅굴에서 그가 애처로이 제 마음을 고백할 때를 떠올리면 머리가 붕 뜬 기분이 든다.

다시 한번 듣고 싶다. 보석 같은 눈물을 달고 새빨개진 예쁜 눈으로 나만을 바라보며 절절하게 사랑을 말하는 목소리를. 마치 다이아를 펑펑 사용할 때처럼 기분이 짜릿해져 그때의 엘더를 자꾸만 떠올리게 된다.

“그럼… 엘더가 내 감정을 흉내 낸 게 아니라는 증거를 찾게 되면 기대해 봐도 되는 거 아냐?”

그가 나를 사랑하기 위해 인간이 되길 원했던 것처럼, 나 역시 그가 인간처럼 감정을 갖길 바라게 된다. 엘더의 마음이 내게서 비롯된 감정이 아니라면, 내가 그의 마음을 허락하고 나 역시 그에게 다가가 연애 같은 걸 해 볼 수 있는 게 아닐까?

내 물음에 실새삼은 한숨을 억지로 참은 듯한 표정으로 잠시간 말없이 날 바라봤다.

“네가 원하는 게 그것이라면 마음대로 해. 네가 내 조언을 듣고 하얀 꽃과 예전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정상적으로 생각하기를 바랐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달라지기를 원하니 나는 지지할 수밖에. 넌 내 드루이드고 난 너의 드라이어드니 네가 염원하는 일이라면 나 또한 염원하는 일이다. 우린 당연히 너의 안정과 행복을 비니까.”

나와 엘더 사이의 관계 변화가 일어난다면 나와 다른 드라이어드들과의 관계도 변화가 생길 수 있다. 그동안 모두에게 공평하게 전해지던 나의 애정이, 이젠 어느 한쪽을 향해 두터워질 수 있으니까. 어쩌면 어린 민들레들이라면 예민한 사춘기 시기이니 반발이 일어날 수도 있다.

우리의 관계 변화는 내 모험에 커다란 영향을 끼치겠지.

정말 내가 엘더의 감정이 오롯이 그 자신만의 것이라고, 모조품이 아닌 원본이라고 기대를 해도 되는 걸까?

엘더는 알고 있을까? 자신의 감정이 어쩌면 내 감정에서 기반된 것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난 뒤뜰에 오래 머무르며 열심히 감정을 추슬렀다. 아까처럼 사랑에 빠져 날뛰는 망아지 같은 기분을 제어하지 못해 실새삼 같은 자에게 들키는 건 사양이었다. 또한 매번 엘더를 보고 펄쩍펄쩍 놀라면 민폐기도 하고.

엘더의 마음에 대한 제대로 된 확신을 얻기 전까진 내 마음을 잘 갈무리해야 한다.

“새삼 이런 기분 엄청 오랜만이다.”

돌을 깎아 평평하게 만든 벤치에 앉아 별이 촘촘히 떠오른 밤하늘을 올려다봤다. 저 반짝거리는 별을 보고 엘더의 보석 같은 눈이 떠오를 정도니 완전 중증이었다. 막 자각한 사랑은 이토록 열병이 너무 심하다.

이런 감정을 느낀 것이 정말 오랜만이었다. 학업과 아르바이트에 치여 살고 하다못해 취미인 게임에서까지 치열하게 살았으니 연애는 자연히 뒷전이었다. 그러나 일에 치이는 지금보다 여유가 있던 어렸을 적엔 자연스레 이성에 눈을 두어 좋아하는 마음을 앓았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간의 연애는 상대가 먼저 나를 좋아해 시작된 거니, 생각해 보면 이토록 어쩔 줄 모르겠는 기분은 교복 입었을 때 이후로 정말 오랜만이잖아?

“후, 이제 들어가자. 다들 기다리겠다. 피곤하기도 하고.”

화르륵 타오른 만큼 뒤늦게 밀려오는 체력의 후폭풍도 대단했다. 워낙 복잡하게 생각해야 되는 상황이다 보니 머릿속은 금방 피로해졌고.

간이 계단을 통해 방으로 돌아가니… 방 안 분위기가 이상했다.

한바탕 혼나기라도 한 건지 메스키트를 향한 엘더의 태도는 완전 뚱해 있었다. 새빨간 입술을 부루퉁하게 내민 모습이 미치도록 사랑스러울 정도면 난 지금 중증인 게 아닐까?

애써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던 그가 내가 방에 도착하자 고개를 홱 돌려 나를 바라본다. 마치 현관문 앞에서 주인이 오기만을 기다렸다는 강아지처럼, 엘더에게 꼬리가 있다면 미친 듯이 흔들리고 있을 것이다.

감정을 추스르겠다고 마음먹은 게 불과 몇 분 전이었는데, 저렇게 날 향해 열렬히 감정을 표할 때마다 깜짝깜짝 놀라게 된다.

“…….”

그리고 그럴 리 없겠지만, 이를 바라보는 메스키트에게서 마치 맹견 같은 목 울림이 들리는 듯하다. 상대를 향해 적대를 내세울 때 으르렁거리는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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