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더의 농담 반 진담 반 섞인 발언에 미쳤냐는 소리가 절로 나올 뻔했다.
지금까지 가디언이 얼마나 대단하고 어려운 자린지 이야기하고 있는데, 그걸 단순히 내 관심을 받기 위해 도전했어야 한다는 소리가 나오니?
평소라면 넌 얼굴만으로 노멀 필드의 얼굴을 수호하는 가디언이라고 장난치며 볼도 토닥여 주며 다이아도 좀 쥐여 줬을 테지만….
“오호? 혹시 저 하얀 꽃이 네게 잘못이라도 한 게냐?”
실새삼이 슬쩍 내 곁으로 다가와 귓속말로 물었다. 역시 나에 대해 눈치채는 건 오지게 빠르다.
“잘못은 아니고….”
엘더를 보는 실새삼의 눈빛이 묘했다. 그는 눈썹을 삐죽대며 엘더의 표정을 관찰하더니… 이내 내 무릎 위로 털썩 앉았다.
“야! 너 이제 아기가 아니라서 안아 줄 무게가 아니란 말이야. 내 다리 부러지는 꼴 보고 싶어?”
그동안 내 부상으로 인해 풋풋한 청소년 수준으로 훌쩍 자란 실새삼은 더 이상 내가 안고 다니던 아기라고 볼 수 없었다. 물론 예상했던 무게보다는 가벼워서 의외긴 했지만.
“아하. 넌 다른 꽃들보다 집착이 심하긴 했지만 유독… 웁.”
황급히 실새삼의 입을 손으로 틀어막았다.
실새삼이 묘하게 구는 건 다 이유가 있기 때문이었다. 이놈은 분명 엘더를 떠보기 위해 돌발행동을 해 본 것이다. 그리고 너무나 뻔하게 엘더가 표정으로 반응한 바람에 실새삼이 무언가 눈치챈 것이 분명하다.
“오냐오냐해 주니까 이게.”
“네가 날 언제 오냐오냐해 줬다는 거야? 몸집이 자랐다고 도외시한 건 네가 아니더냐? 아기의 모습일 땐 품에서 떼지 않고 안고 다니더니.”
내 드라이어드들이 괴롭힐까 무섭다며 자신이 먼저 따라붙어 놓고는 이런 망발을. 물론 작을 때의 실새삼은 인형 같아서 안고 다닐 맛이 있긴 했다.
“혹시 작은 게 더 좋은가? 여기서 다시 작아지는 건 무린데. 이왕 한 번 다시 태어난 거, 또다시 태어나 줄까?”
“야 이… 천벌 받을 소리를.”
날 보며 실실 웃으며 장난을 치곤 있지만 눈빛은 틈틈이 내 뒤쪽의 엘더를 살피는 것이 보였다.
“안 되겠어. 나 실새삼이랑 이야기 좀 하고 올게.”
실새삼의 손을 잡아끌고 뒤뜰로 나가는 간이 계단이 있다는 테라스로 향했다.
“그래, 이왕 하는 거 따끔하게 혼 좀 내 줘. 걔 너무 버릇없어. 아예 이파리를 다 뜯어 버려. 줄기도 다 꺾어 버리고.”
“…그런 거 아니야.”
실새삼의 장난에 내가 화가 난 걸로 오해한 포인세티아가 열심히 부채질을 했다.
“엘더.”
테라스의 문이 닫히는 등 뒤로 짧게 엘더를 부르는 메스키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심정을 알 수 없는 목소리였다. 그래서 더욱더 뒤를 바라볼 수 없었다.
뒤뜰로 나오니 살짝 이질적인 열기가 섞인 차가운 밤공기가 곧바로 날 맞이했다. 기온이 다른 밤공기가 이곳이 다시금 세계수에서 멀리 떨어진 곳임을 인지하게 만든다.
“그래, 이제 이야기해 보거라.”
실새삼이 능글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저 생긴 것과 다른 말투가 매번 날 어이없게 만든다.
“다른 드라이어드들을 다 떼어 놓고 널 혼자 독차지하고 싶다고 말하더냐? 아니지. 드라이어드에게 그 정도 집착은 오히려 평범한 수준이니 네가 그렇게 하얀 꽃을 의식하며 당황하진 않았을 거야.”
팔짱을 낀 채 실새삼이 하는 양을 그대로 지켜봤다. 아무래도 아티팩트가 차단된 땅굴에서의 모든 일들을 안에 있던 드라이어드들은 모르는 게 분명했다.
그러나 실새삼은 자주 내 정신을 침범했던 전적이 있고 무려 나의 본래 세계와 이 세계를 잇는 로그인 역할을 하는 드라이어드니, 교감이라는 시스템을 떼어 놓고 본다면 내 정신에 가장 근접한 드라이어드는 실새삼이라고 볼 수 있었다. 내가 엘더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음을 긴밀하게 눈치챌 수 있는 드라이어드라는 거다.
“그런 단순한 것보단… 너와 같이 열매를 맺고 싶다고 하더냐?”
“큽, 콜록콜록!”
난데없는 찌르기에 사레가 들리고 말았다.
“그것보다 더 간 느낌이군. 넌 인간이고 하얀 꽃은 드라이어드니… 혹여 인간이 되고 싶다고 하더냐? 아, 표정을 보아하니 알겠군. 전대 노멀 필드의 가디언이 속살거렸나 보지. 그 녀석은 욕망을 상징하던 녀석이었으니까. 필드에 있던 드라이어드들의 욕망을 죄다 들쑤셔 놨을 게 분명하군.”
“카수스와 있던 시절의 기억들이 희미해져 간다고 하지 않았어?”
“별난 녀석인데다 워낙 강렬한 기억이 남아 아직까지 어렴풋이 생각날 뿐이다. 인간들처럼 카수스와 결혼하고 싶다고 굴던 녀석이었거든.”
“뭐…? 그, 드라이어드랑 인간은….”
생각 체계가 다르다고 하지 않았어? 아니 그것보다 전대 가디언이 그런 행동을 했었다고…? 엘더를 유달리 잘 가지고 놀았던 건… 자신과 그의 욕망이 같았기에 그랬던 건가.
“그래, 완전히 다르지. 인간들이 보기 좋은 모습을 하고 있다 하더라도 인간이 꽃을 보고 결혼하고 싶다는 마음이 들겠느냐? 반대로 드라이어드 역시 마찬가지이다. 어쨌든 하얀 꽃이 네게 그런 유의 욕망을 들켰나 보군. 하아, 재밌군. 재밌어.”
역시나 눈치가 빠른 드라이어드였다.
재밌다고 말하고 있지만 어쩐지 실새삼의 얼굴은 전혀 웃지 않고 있었다.
“그래, 나도 그렇게 알고 있어. 인간과 드라이어드는 생각하는 게 다르다고. 그런데 어째서 엘더는 다른 걸까?”
이미 들킨 마당에 아니라고 잡아뗄 수도 없는 노릇이라 고민 상담처럼 되고 말았다.
“직접 겪었지만 나 역시도 이해가 가지 않아. 어째서 영혼의 연결을 맺은 드라이어드가 우리 관계의 하위 호환이나 다름없는 관계를 갈구하는지.”
“하위 호환?”
실새삼은 정말로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더불어 마치 무지한 자를 목도한 것과 같은 짜증이 섞여 있기도 했다. 물론 짜증의 대상은 내가 아니었다.
“우린 인간들이 어떠한 관계를 맺고 사회를 이루는지 관심 없어. 그저 인식만 하고 있을 뿐이지. 우리에게 중요한 건 오직 단 하나의 드루이드니까. 하지만 달리 말하자면, 네가 어떤 인간과 관계를 맺든 드라이어드와의 관계가 그 모든 관계보다 우선되는 위치에 있기 때문에 따로 생각하지 않을 뿐이야.”
실새삼은 관계에 우위가 있다고 말하고 있었다.
“인간들끼리 영혼의 연결을 맺을 수 있나? 서로의 영혼을 느끼고 교감하며 생각도 공유할 수 있냐는 말이다. 한날한시에 죽고 절대 떨어지려야 떨어질 수 없는 사이지. 우리는 마치 육체만 따로 쓸 뿐 하나의 영혼을 공유하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는 관계가 아닌가? 인간들 사이에서 가장 궁극적인 관계를 맺는 결혼도 결국 우리의 관계에 비할 바 못 되지.”
실새삼의 생각은 엘더에게 고백을 들었을 때 고민했던 것과 같은 성질이었다. 드루이드와 드라이어드의 이런 관계 때문에 내가 생각하는 연애는 완전히 재정립되어야만 했다.
“인간과 인간 사이엔 부정적인 감정들이 존재한다. 다툼, 질투, 증오 등…. 하지만 우리의 생각은 기본적으로 드루이드가 중점이 되어 기쁠 때도 함께 기쁘고 슬플 때도 함께 슬프지. 설령 우리가 견해의 차이로 다툰다고 인간들의 관계처럼 끝이 생길 수 있겠는가?”
10년이 넘게 만나도 헤어질 수 있는 게 연인이었다. 완전히 안 볼 사이가 되는 게 대부분의 루트지만 좋은 친구로 남는 관계도 있지. 하지만 그 관계가 정말 이전과 같다고 볼 수 있을까? 조심성이 생기고 인식이 달라지겠지.
하지만 드루이드와 드라이어드는 헤어질 수 없다. 좋은 친구로 남는 방식의 관계의 재정립이 일어날 수 없다는 말이다. 실새삼의 말처럼 드라이어드가 기본적으로 드루이드의 모든 기분에 맞춰 준다면, 드루이드가 곧 법인 것이나 다름없으니 내가 추구하는 동등한 연애 관계가 될 수 없는 게 아닐까?
수많은 드루이드와 드라이어드가 있고 그들이 함께한 지 오랜 세월이 지났는데, 정말 둘 사이에 연애 관계가 이뤄진 경우가 단 하나도 존재하지 않는 걸까?
“하지만 엘더는 정말 다른 관계를 원했어. 그런 특별한 경우가… 네 말처럼 전대 노멀 필드 가디언에게서도 생겼고 엘더에게도 생겼으니, 그 밖에도 네가 모르는 경우들이 있는 게 아닐까? 사랑이란 게 종류도 많고 복잡하잖아. 알아차리지 못한 걸 수도 있어.”
실새삼은 날 빤히 바라보며 한동안 말을 하지 않다가 이내 입을 열었다.
“그런 ‘사랑’ 말이지. 드라이어드는 기본적으로 동종이라 해도 인간들이 말하는 그런 사랑을 하지 않아. 열매를 맺는 건 종족 보존의 본능일 뿐이다. 물론 그 본능에 굳이 짝이 필요하지 않은 경우도 더없이 많지. 홀로 열매를 맺을 수 있는 식물들도 많으니 말이다. 어쨌거나 그 이상은 없어. 말했듯이 인간들 사이의 궁극적인 관계가 결혼이라면 드라이어드의 궁극적인 관계는 영혼의 연결이니까. 이미 영혼의 연결을 맺은 드라이어드도, 맺지 않은 드라이어드도 전부.”
“그 말은 꼭….”
주인이 없는 드라이어드라도 언젠가 맺을 영혼의 연결에 대비해 굳이 사랑 따위를 하지 않는다는 것처럼 들렸다.
“그리고 그런 ‘사랑’은 결국 드루이드의 감정을 흉내 내는 거나 다름없어. 사랑하는 존재를 어떻게 대하고 어떻게 특별하게 여겨야 하는지, 전부 드루이드에게서 배우는 거다. 단순히 흉내 내는 것에 지나지 않는 감정을 네가 말하는 그 사랑이라 볼 수 있을지 모르겠구나.”
드루이드의 감정을 흉내 낸다는 말에 문득 떠오르는 게 있었다.
“제가 아끼고 사랑하는 하얀 인간에게, 제게 인연을 선사해 준 고마움을 전하고 싶습니다.”
“제게 소중히 여기고 아끼며 사랑하는 존재를 대하는 방식을 알려 준 것은 다름 아닌 드루이드님이 아니십니까? 드루이드님이 그렇게 하셨듯 저 또한 소중한 존재에게 똑같이 대하려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