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인세티아는 곧바로 아티팩트로 돌아가 제 구역을 꾸미는 데에 열중했다. 내 아티팩트의 마이 룸 공간은 처음에 비하면 정말 화려해졌다. 색색의 꽃들과 다양한 필드가 아울러져 꾸미기 게임을 들여다보는 듯했다. 조만간 아티팩트 공방에 방문해 새로온 내 드라이어드들을 위한 가구들을 잔뜩 사들이는 것도 좋을 듯하다.
“…….”
포인세티아의 주의를 돌리는 데는 성공했지만… 실새삼이 삐져 버렸다. 차마 자기 선물은 없냐는 질문은 하지도 못하고 입술을 삐죽이는 게 상당히 귀여워 보인다면… 난 어미 고슴도치인 걸까?
에르바 길드원들은 모르겠지. 룽카에게 들어서 내게 노멀 필드의 가디언이 있다는 사실은 알겠지만, 내겐 필드의 가디언이 셋 더 있다는 것을. 룽카는 노멀 필드 가디언의 이야기만 크게 기억에 남고, 내 다른 드라이어드들이 무의식중에 대화로 술술 퍼뜨린 정보에 대해선 기억 못 하는 게 분명하다.
이제 10그루의 필드 가디언들 중 넷을 모았다. 어찌 보면 여섯이나 남은 거지만 긍정적으로 보자면 반에 가까운 수치였다. 처음 순례자에 대해 알게 되고 메스키트가 데저트 필드의 가디언임을 알게 되었을 때, 나머지 9그루를 언제 다 모으나 막막했었던 것이 떠오른다.
내게 처음으로 부여된 메인 퀘스트였으나 지금은 목표가 바뀌어 카수스에 대항하고자 가디언을 모으고 있었다. 솔직히 더 이상 세계수의 대리자가 되고자 하는 길을 걷지 않는 지금, 반드시 10그루의 가디언을 모두 모을 이유는 내게 없었다.
카수스 역시 10그루를 모두 모아야 다시금 영생의 힘을 얻을 수 있게 된다면, 내게 4그루가 있는 지금 그 꿈은 파훼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물론 세상이 좀 더 바르게 굴러가기 위해선 직무 유기 중인 가디언들을 일깨울 필요가 있었고, 악당이나 다름없는 카수스가 굳이 영생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쁜 목적으로 필드를 이용할 수 있으니 선수 치는 게 맞다.
하지만 뭔가 내가 확고한 목표 의식을 가질 만한 당위성이 좀 부족하지 않나 하는 생각은 차마 지울 수 없었다. 내가 세계수에 버금가는 신이 되고 싶다 하더라도 10그루를 모두 모으면 뚝딱 그 목표가 완수되는 것도 아니지 않을까? 10그루의 가디언이 모두 모이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 걸까?
전대 노멀 필드의 가디언과 데이지가 했던 대화를 떠올려 보면 언젠간 대의를 위해 가디언들을 떠나보내야 하는 순간이 올지도 모르는데, 그건 결국 내 드라이어드들을 떠나보낸다는 거잖아?
조용해진 분위기 속, 침대에 누워 싱숭생숭한 마음에 천장만 바라보았다.
여행의 결과를 가다듬는 시간이 되자 감회가 남달라 이러는 게 분명하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심각하게 해?”
“악!”
바로 옆에서 들려오는 엘더의 목소리에 깜짝 놀란 나머지 침대에서 굴러떨어지고 말았다.
“제희!”
“괜찮으세요?”
아프게 떨어진 날 걱정하며 몰려든 드라이어드들에게 차마 새빨개진 얼굴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힐끔 바라보니 침대 위에 놀란 얼굴로 엎드려 반쯤 몸을 일으킨 엘더가 보인다. 내 드라이어드들이 나와 같이 침대에 눕는 건 흔한 일이었다. 엘더 또한 자주 곁을 지켰으니까.
그런데 지금은 이전처럼 평상심을 유지할 수가 없었다.
당황스럽다. 왜 유독 엘더에게만 이 난리인지. 메스키트의 부축을 받아 자리에서 일어나고 괜시리 옷을 털며 민망한 마음을 숨기려 노력해 봤다.
“갑자기 옆에서 소리가 들리니까 놀라서. 아직 땅굴에서 돌아온 지 얼마 안 돼서 긴장했나 봐.”
어설프게 변명하는 나를 실새삼이 이상하다는 눈으로 바라봤다.
“그것보다 더한 것도 겪어 본 네가?”
“이번에는 좀 심각했으니까.”
그렇게 자연스럽게 데이지가 사용하게 된 리플레이 기술에 대한 화제로 넘어갔다.
“그런 대단한 기술을 사용할 수 있게 된 걸 보면… 이미 가디언의 재목은 충분했다고 봐도 되겠네요. 목숨이 위험할 뻔했다니. 제희가 아직까지 긴장이 풀리지 않은 게 이해돼요.”
“그렇지? 아직도 꿈만 같아.”
“노멀 필드 녀석, 끝까지 마음에 안 드는 놈이야.”
다행히 그냥 넘어갔다. 물론 여전히 침대에 모로 누워 날 바라보는 엘더의 표정은 떨떠름해 보이긴 했다. 난 덕분에 침대에 눕지도 못하고 살짝 걸터앉은 채 애써 아무렇지도 않은 척했다.
“그래서 넌 노멀 필드에 어떤 규율을 내세울 것이냐? 전대가 만든 규율은 퇴색된 지 오래일 테니 전부 네가 세워야 하는데.”
실새삼이 데이지를 향해 툭 말을 던졌다.
“규율이라면… 너희들이 드라이어드들을 향해 말했던 그거 말이지?”
규율이란 이미 정해져 있는 게 아닌가 싶다가도, 포인세티아가 스스로 깨달아 스노우 필드 드라이어드들을 자신의 규율로 통치하려 했던 걸 떠올려 보면 규율은 전적으로 수호하고자 하는 가디언의 의지대로 세울 수 있는 듯했다.
“사막의 전사들이여, 나를 따르라! 우리의 뿌리가 굵고 곧은 이유는 뜨거운 대지에 망설임 없이 첫발을 내딛기 위함이다! 언제까지나 떨어질 비를 하염없이 기다리지 말라! 우리가 강인한 마음으로 버티는 한 언젠간 영혼을 적실 비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데저트 필드의 드라이어드들을 향해 장군처럼 호통하던 메스키트의 규율이 떠올랐다.
“군림하는 자들이여, 머리를 굴려라. 지혜롭고 현명하게 대처하라. 우리의 뿌리가 가늘고 길며, 그 어떤 것들보다 널리 뿌리를 펼칠 수 있는 이유는 사방의 모든 환경을 우리의 무기와 다름없이 다룰 수 있기 때문이다. 내놓지 않는다면 빼앗고 그래도 내놓지 않는다면 파괴하라. 아군이든 적이든 이용할 수 있는 모든 걸 이용하라. 그리고 살아남아라. 마지막에 몸을 적시는 비는 오직 끝까지 살아남은 자들을 위한 것이다.”
바이오 필드의 드라이어드들을 향해 명령하던 실새삼은 왕좌에 앉은 왕 같았고.
“스노우 필드의 드라이어드들아, 부디 내 이야기를 들어 줘. 우리의 뿌리가 추위를 잘 견뎌 낼 수 있는 이유는 누구도 찾지 않는 추운 대지에 반드시 피어나야 하기 때문이야. 그게 우리 스노우 필드 꽃들이 굳이 특별함을 내세울 필요 없는 이유고. 우린 다른 필드의 꽃들처럼 비를 기다리지 않아. 우리에겐 눈이 있으니까. 우리가 변함없는 마음으로 제 자리를 지키는 한, 가끔은 눈이 녹아 우릴 적셔 줄 거야.”
스노우 필드의 드라이어드들을 향한 포인세티아는 마치 친구처럼 다독이고 설득하는 느낌이었지.
가디언만 봐도 그 필드의 성격과 이미지를 알 수 있었다. 그렇다면 데이지가 만드는 노멀 필드는 어떤 이미지가 될까?
“으음….”
실새삼의 말에 데이지는 고민하는 얼굴이 되었다.
“납득할 수 있는 규율이어야 소속 드라이어드들이 따를 것이다. 물론 그러려면 너부터 인정을 받아야 하겠지만.”
“이제 막 가디언으로 피어난 꽃이랍니다. 성급하게 굴지 않아도 돼요.”
메스키트가 인자한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오랜 시간 동안 방치한 전대의 책임과 의무를 전부 끌어안은 것만으로도 대견해요. 물론 제희도 그렇게 생각하겠죠?”
메스키트는 가시가 돋은 데이지의 화관을 손끝으로 살짝 건들며 말했다.
“당연하지.”
“그래요. 하루아침에 까마득한 세월부터 미뤄 왔던 일을 해결하라는 건 말이 되지 않지요. 지금은 한 발자국씩 내딛는 일에 집중해요. 어쩌면 당신이 사는 삶 동안 해결할 수 없을지도 몰라요.”
당장을 걱정한 실새삼과 달리, 메스키트는 데이지가 살아가는 동안 가디언의 의무를 모두 완수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고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후대의 가디언이 이뤄 줄 수도 있어요. 가디언의 자리가 영원하지 않고 계승이 존재하는 건 바로 이 때문이에요. 더 나은 자에게 자리를 물려주는 것, 오랜 세월을 거쳐 필드의 수호는 이렇게 이뤄져 왔어요. 그러니 너무 조급하게 생각하지 말아요. 오히려 일을 그르칠 수도 있답니다.”
조곤조곤, 조언하는 모습은 그녀에게 교육받은 엘더와 마거리트를 떠올리게 했다.
“네, 무리하지 않을게요. 하지만 레드 데이지 중에 이런 큰 자격을 받은 건 제가 처음이니 최대한 위대한 선례를 남기고 싶기도 해요.”
실새삼이 뭐라고 할 때와 달리 눈을 빛내며 메스키트의 말을 경청하던 데이지가 화사하게 웃으며 답했다. 그 말을 통해, 데이지가 노멀 필드의 가디언 자리를 쟁취한 또 다른 이유에 대해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레드 데이지 꽃에 대한 이미지를 바꾸려는 거구나.
“정말 무리하면 안 돼. 넌 가디언이기 전에 언제까지나 내 소중한 드라이어드니까.”
“네, 제희 님.”
저렇게 사랑스러운 꽃을 노멀 필드의 가디언으로 인정하지 않는 녀석들은 다 패 줄 거야.
“흠….”
그때 바로 옆에서 불만이 담긴 콧소리가 들려왔다.
“그렇게 네 관심을 독차지할 걸 알았다면 역시 나도 가디언의 자격에 도전해 봐야 했던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