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83화 (483/604)

“우우!”

“멍청한 자식! 뒤 번대 지역에서 드라이어드들을 아티팩트로 돌려보낸 후 단독 행동을 하는 머저리가 어디 있어?”

이 부분에서 많은 야유와 질타가 이어졌다.

잠깐 상황을 살피고 도와주려다 잠복하고 있던 다른 사람에게 뒤통수를 얻어맞고 그대로 기절했고 정신을 차려 보니 땅굴이라고 했다.

아마 그 지점에 77번째 테라리움 아래의 땅굴로 통하는 비밀 통로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았던 거겠지. 그즈음 땅밑으로 움직이고 있었을 테니.

“정신을 차렸는데 주위에 아무도 없더라고요. 드라이어드는 아무리 불러도 답이 없고요. 그래도 몸은 멀쩡해서 탈출구를 찾으러 돌아다니는데… 어쩐지 좋지 않은 예감이 드는 방향이 있어서 의도적으로 그곳을 피했습니다….”

기이하게도 과거로 돌아간 건 우리뿐만이 아니었다. 좋지 않은 예감이 들었다고 하니, 포로의 방에 있던 라운 역시 리플레이의 영향을 받은 모양이었다.

“마침 길을 헤매고 있던 다른 사람들을 만나게 됐고…. 자신들을 지키던 사람들이 갑자기 사라져서 간신히 도망 나왔는데 같은 길만 계속 헤매고 있던 상태라고 했어요. 그래서 혹시 다른 사람들이 남아 있는 건 아닌가 싶어서 그들이 왔던 방향으로 가 보려고 했는데….”

그의 겁 없는 행동에 다시금 야유가 터져 나왔다.

“자신들 말고 남아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하더라고요.”

문득 포로의 방에서 라운을 막 발견했을 때, 그에게 힘없이 기대어 있던 데이지3의 모습이 떠올랐다. 기운이 아예 없으니 어깨를 빌리고 있는 걸 수도 있지만, 드루이드를 무척 두려워하던 그녀가 그토록 평이하게 붙어 있던 건 라운의 도움을 받았기 때문이 아닐까?

어쩌면 데이지3의 존재 역시 자리가 바뀌게 되며 라운의 선택에 영향을 준 게 아닌가 싶었다. 데이지3은 드라이어드니 포로가 된 평범한 사람들과 말이 통하지 않을뿐더러 무척이나 기운이 없던 상태라 함께 행동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니 홀로 남겨졌을 테고 라운이 이를 알게 되어 찾으러 간다면 포로의 방에 잡히게 되는 일이 벌어졌을 수도 있다.

물론 일이 꼬였으니 예상이 완전히 정확하진 않을 것이다.

“갑자기 땅굴에 크게 지진이 나면서 연이어 큰소리도 들리길래 무너지는가 싶어서 사람들을 이끌고 최대한 불길한 예감이 드는 방향을 피해 앞만 보고 달렸는데.”

아마 그가 들은 소란은 데이지가 제단을 박살 내는 소리였을 것이다.

“운 좋게 탈출구를 발견하게 되어서….”

그 후 날도 어두워지고 주변에서 길드원들을 찾기엔 무리라, 근방에 살던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66번째 테라리움으로 돌아오게 되었다고 한다.

여기까지의 이야기를 듣고 난 생각했다. 그는 사고를 부르는 사람이 아니라… 지독히도 운이 좋은 사람이 아닐까? 그렇게 많은 사고를 겪고도 그가 목숨을 부지하고 멀쩡하게 살아 있을 수 있는 이유가 아이러니하게도 무척이나 운이 좋기 때문이 아닌가 싶었다.

우린 원흉이 되는 가디언을 해치우고 나서야 바깥공기를 맡을 수 있었는데 뛰어다니다 탈출구까지 발견했다고? 그토록 돌아다녀도 보이지 않았던, 꼭꼭 숨어 있던 탈출구를?

조금 억울한 기분이 들었지만 어쨌든 실종자들도 구하고 라운도 살아 있었다면 됐다. 그렇게 생각하자 긴장이 단번에 풀려 미약한 잠기운이 올라왔다.

피곤했지만 66번째 테라리움의 여관으론 도저히 돌아갈 수 없었다.

테라리움 중 가장 고급 여관이라곤 하나 언제 세탁한 건지 알 수 없는 이불이 깔린 침구와 알 수 없는 묵은내가 가득 나는 방은 차라리 야영을 하는 게 나을 정도였다. 뒤 번대 테라리움으로 갈수록 여행자가 뜸해지니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는 게 분명하다.

그런 나를 구원해 준 것이 에르바 길드였다. 그들은 피곤할 테니 길드 룸의 빈방을 쓰라고 말했다. 나를 보는 눈엔 호의와 경외가 가득했는데, 단순히 다이아 부자나 길드 마스터라는 것 외에 다른 이유가 있는 듯했다.

알고 보니 룽카가 땅굴에서 있었던 일들을 모험담 늘어놓듯 길드원들에게 죄다 털어놓은 것이다. 필드의 가디언을 만나서 싸워 이기고 내 드라이어드가 그 자격을 계승했다는 이야기를 듣고도 아무렇지 않는다면 드루이드라 할 수 없긴 했다. 우리가 땅굴에서 겪었던 모든 일들은 드루이드의 모험심을 자극하는 소재였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길드 룸에 일부러 날 머물게 하려던 것이었다.

“저기 혹시….”

마주치는 사람마다 저런 반응이었다. 데이지를 보여 주면 안 되겠냐는 요구부터 직접 내 입으로 땅굴에서의 일을 듣고 싶다는 등, 연예인이 된 기분이 이러할까 싶다. 조금만 더 있으면 사인도 해 달라고 할 기세였다.

“룽카를 지켜 주셔서 감사합니다.”

물론 다른 반응을 보이는 사람도 있었다. 그들은 드라이어드 없이 홀로 동떨어지게 된 룽카를 무사히 지켜 내 줘서 고맙다며 인사했다. 따지고 보면 난 그를 지키기 위해서라기보단 나 역시 살아남기 위해 아등바등했던 거지만 어쨌든 공로가 큰 건 맞았으므로 기꺼이 감사 인사를 받았다.

“당장은 방해받지 않고 쉬고 싶어요.”

난 결국 길드 간부를 통해 거절의 의사를 전해야만 했다. 단호히 의사 표현을 하지 않으면 파티까지 열 기세라 어쩔 수 없었다.

무사히 살아 돌아온 것도 기쁘고 데이지가 가디언이 된 것도 기쁘다. 모두에게 자랑하고 축하를 받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피로도가 맥스를 찍은 것인지 갈수록 몸이 축축 늘어졌다.

“방은 3층 남쪽 끝 방을 사용하시면 됩니다. 그쪽 복도로는 사람들이 드나들지 않도록 각별히 주의하겠습니다. 아, 테라스로 나가면 뒤뜰로 내려갈 수 있는 간이 계단이 있으니 산책이 필요하시다면 그쪽을 이용하셔도 됩니다.”

설명하는 사람의 뒤로 내게 말을 걸고 싶어 옹기종기 모여 안절부절못하는 사람들이 보였지만 애써 무시한 채 배정받은 방으로 향했다.

길드원들이 실제로 사용하는 공간이기 때문인지 여관보단 훨씬 사정이 나았다.

“그럼 빨간 꽃이 우리 막내라는 거군.”

기다렸다는 듯이 아티팩트에서 나온 실새삼이 데이지를 보며 말했다.

“막내라니. 가디언에 그런 게 뭐가 필요가 있어.”

“전 아직 많이 부족한걸요.”

설마 서열을 나누려나 싶어 실새삼을 타박하고 있는데 데이지가 그의 말을 거들었다. 그녀는 가시 화관을 쓰고 있는 한, 그녀 스스로 가디언의 자리에 만족할 만큼 강해졌다고 느끼지 않는 한 실새삼의 막내라는 말에 전혀 반박하지 않을 터였다.

“이젠 웃어른 공경하라고 하겠어. 찬물도 위아래가 있다면서.”

슬슬 기미를 보이려는 실새삼의 꼰대 기질에 비꼬았는데 그는 뭘 당연한 소리를 하고 있냐며 나를 바라봤다.

“가르칠 것이 산더미다. 성목으로서 묘목들을 이끄는 버팀목이 되어 주는 건 당연한 일이지.”

“물론 데이지와 너는 세월 차이가 많이 나긴 하는데… 묘목 취급을 하는 건 좀 그렇지 않아?”

못마땅한 나와 달리 오히려 데이지는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 것처럼 무념무상한 얼굴이었다. 와… 실새삼에 대한 데이지의 호감도가 참….

“그만. 레드 데이지도 이젠 우리와 같은 가디언입니다. 먼저 동등하게 대우해야 할 필요가 있어요.”

이에 메스키트가 끼어들며 실새삼의 꼰대력을 중화시켰다.

이젠 필드의 가디언이 되어 나란히 서 있는 메스키트와 데이지를 보니 몽글거리는 기분이 들었다. 불과 몇 달 전만 해도, 메스키트는 뿌리가 곧은 드라이어드가 되어야 한다며 작은 데이지의 허리를 번쩍번쩍 안아 올렸었는데.

이젠 데이지가 다 커 버려서 그런 모습을 볼 수 없지만 괜히 아쉬운 마음이 들기도 하고, 더 이상 메스키트의 직접적인 가르침을 받지 않아도 될 만큼 성장했다는 사실에 대견하기도 했다. 눈물이 날 것 같기도 하다.

“재수 없어.”

불쑥 포인세티아가 끼어들며 훈훈하게 마무리되려던 분위기가 깨졌다.

“여기서 생긴 걸로만 따지면 네가 제일 묘목이거든?”

“이래서 스노우 필드 태생들이란. 차가운 눈을 뚫고 태어났다고 인성도….”

“빌붙어서 사는 네놈들이 우리 스노우 필드를 모욕할 자격이…!”

“그만.”

메스키트의 목소리가 좀 더 단호해졌다. 포인세티아는 약이 바짝 오른 표정으로 물러났지만 실새삼은 언제든지 2차전을 벌일 준비가 되어 있다는 기세였다. 아기의 모습으로 내게 안겨 다닐 땐 내 드라이어드들이 해코지할까 봐 무섭다고 하던 실새삼이었는데, 이젠 제법 성장을 했기 때문에 꿀릴 것이 없어진 것이다.

가디언이니 자신의 자생 필드가 더욱 각별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실새삼과 포인세티아의 이러한 공방은 기시감이 들었다. 마치 자신이 응원하는 팀을 목에 핏대를 세우며 두둔하던 친구들의 대화가 떠올랐다. 바이오 필드가 최고라느니 스노우 필드가 최고라느니.

물론 메스키트가 이런 유치한 대화에 끼진 않겠지만, 필드 경쟁이 일어난다면 꽤나 난잡한 싸움이 되지 않을까? 그때만큼은 데이지도 노멀 필드를 두둔하며 나서게 되는 걸까?

한 필드를 대표하는 가디언이라고 해 봤자 도란도란 떠드는 대화는 여타 다른 드라이어드에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메스키트의 중재도 그다지 크게 효력을 발휘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포인세티아는 그녀를 존중하지만 실새삼에 대한 반발감이 컸고 실새삼은 머리가 커지니 메스키트를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다.

그러니 조용히 쉬고 싶은 내 마음도 몰라주고 언제든 2차전이 발발할 가능성이 다분했다. 그렇다면 둘 중 하나의 관심을 아예 돌려 버리는 게 최선일 수도 있었다.

“아, 포인세티아. 네게 줄 선물이 있어. 본래는 스노우 필드에서 숨뭄데이 콘셉트에 맞춰 계속 숨어 있는 널 꼬드길 선물로 줄 거였는데 예정이 달라져서.”

“선물?”

내 말에 포인세티아가 바로 반응을 보였다.

난 주머니에서 작은 아티팩트 가구 상자를 꺼냈다. 네모난 투명 케이스 안에 몽글몽글 눈송이를 뿌리는 구름이 담겨 있었다. 드디어 이 아티팩트 가구가 주인을 찾아가는구나 싶었다.

26번째 테라리움에서 루비 반지 경품을 노리며 추첨권을 사들였던 적이 있었다. 안타깝게도 난 추첨운이 몹시 좋지 않아 추첨권을 물량으로 밀어붙여도 상위 경품들에 하나도 당첨되지 못했었는데, 이 예쁜 아티팩트 가구 또한 마찬가지였다.

스노우 필드의 드라이어드에게 심리적 안정감을 준다는 이 ‘눈송이를 뿌리는 구름’은 당시 내게 스노우 필드 드라이어드가 없었음에도 그저 아기자기하고 예쁘다는 이유로 거금의 다이아를 들여 당첨자에게서 사들인 거였다.

그때 당시만 해도 내게 스노우 필드의 드라이어드가, 그것도 가디언이 내 영혼에 오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지. 그렇게 주머니 한편을 차지하다가 마침내 주인을 찾아가게 되었다.

“세상에… 너무 예뻐!”

사실 선물은 더 빨리 쓰일 예정이었다. 포인세티아를 꼬셔 내기 위해 축제를 벌이며 추가로 숨뭄데이 콘셉트에 맞는 선물까지 준비하면 더 효과를 증폭시킬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녀는 축제만으로도 잘 낚여 주었다. 그래서 이 아티팩트 가구의 존재를 잊어버리고 말았다.

“내 구역에 꾸밀래. 정말 잘 어울릴 거야.”

심리적 안정감도 준다고 하니 실새삼과 덜 부딪히겠지. 더구나 날 위해 카수스를 찾느라 동분서주한 그녀에게 위안을 줄 수 있다면 더욱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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