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를 상처 내어 강해지는 힘이라니. 너무 잔악한 힘이잖아.
“노멀 필드는 전대 가디언이 그런 꼴이 되어 자격을 붙들기만 하고 있던 탓에 다른 필드들보다 방치된 시간이 아주 길어요.”
가디언은 이곳 77번째 테라리움의 땅 아래에 죽지 못한 시체 꼴로 존재하고 있었다. 거동하지 못하니 필드를 수호할 겨를이 없었을 것이다. 물론 의지 또한 없었겠지만. 그러니 극단적으로 보자면 노멀 필드는 세계에 재앙이 일어난 후부터 지금까지 가디언이 아예 부재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10개의 자생 필드 중 가장 범위가 크며 속한 생명들이 가장 많은 필드가 헤아리기 힘든 시간 동안 방임되어 있다니. 그렇다면 엇나간 드라이어드들도 가장 많다는 말일까?
그런데 그토록 오랫동안 가디언이 부재했는데 지금 와서야 가디언이 나타났다고 하면… 다들 납득할까?
이 필드도 정말 산 넘어 산이었다.
“이 가시들은 전대가 저지른 죄악과 무너져 내린 필드의 규율들로 느껴져요. 제가 자리를 이어받았으니 감내해야 될 벌이 된 거예요.”
“네가 잘못한 게 아닌데!”
“제가 선택한 일인걸요.”
대단한 바람의 힘을 얻었지만 무기 사용에 큰 페널티를 받았기에 양날의 검이라고 볼 수 있었다. 어쩌면 데이지는 앞으로의 전투에서 단검을 사용하는 데 큰 어려움을 겪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데이지는 전혀 후회하거나 탓하는 표정을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가시는 지금의 제게 가디언의 자리는 버겁다는 걸 의미하기도 하고요.”
“설마 노멀 등급이기 때문이라던가 그런…!”
“아니요! 그런 게 아니에요.”
데이지가 놀란 얼굴로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전 더 성장해야 해요. 같은 필드의 가디언인 메스키트 님이나 포인세티아 님처럼요!”
데이지는 자연스럽게 실새삼을 언급하지 않았다.
“그만큼 강해져야 진정한 가디언이라 볼 수 있는걸요. 전 아직 그분들에 비하면 묘목이나 다름없어서…. 단둘이 맞붙어서 호각을 이룰 때까지 성장해야 해요. 이 가시는 동시에 제가 분에 넘치는 힘을 사용하는 걸 제재하는 역할인 거예요. 강한 힘엔 큰 책임이 따른다잖아요?”
데이지를 억압하는 가시는 그녀가 짊어져야 할 의무와 책임을 형상화한 것이었다.
“그리고 언제까지나 이 가시들이 계속 있을 거라 생각하진 않아요. 제가 모두가 인정하는 어엿한 가디언이 된다면, 그동안 전대의 죄악으로 방치되어 있던 노멀 필드의 규율을 바로잡고 제대로 수호해 낸다면… 가시는 사라질 거라고 확신해요.”
작은 풀꽃은 단단한 바위를 뚫고 솟아날 다짐을 하고 있었다. 너무 큰 짐이 그녀의 어깨에 얹어진 건 아닌가 하는 걱정이 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데이지가 가디언의 자리를 선택하지 않았으면 하는 생각 따윈 들지 않았다. 데이지라면 잘 해낼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내가 항상 곁에서 성심성의껏 지지해 줄 거니까!
데이지는 화사하게 웃으며 단검을 검집에 집어넣었다.
“그래도 역시 아픈 건 싫어요. 가급적 전투 때가 아니면 안 꺼낼래요.”
이런 상황에서도 장난기 가득한 통통 튀는 그녀의 목소리가 무거운 분위기를 봄바람처럼 날려 버렸다.
노멀 필드의 가디언이 바뀌며 지역을 통제하던 힘이 사라지자 아티팩트에 갇혔던 드라이어드들이 필드로 나올 수 있게 되었다. 다들 밖으로 나오기만을 오매불망 기다리고 있었는지, 막 나왔을 때의 표정들이 무척이나 다급해 보였다.
“제희!”
메스키트가 밖으로 나오자마자 내 안위를 살폈다. 이내 내가 멀쩡하다는 걸 확인하곤 안도하는 얼굴이 되었다. 아티팩트 안에서 밖의 상황을 살피며 얼마나 초조했을까?
밖으로 나온 다른 드라이어드들의 행동도 메스키트와 크게 다를 바 없었다.
“역시 다른 필드의 가디언이 있었던 거죠? 어째서 단번에 알아차리지 못한 거지? 솔직히 전대와 같은 기분 나쁜 기운이 살짝 느껴지긴 했지만 뭔가 애매해서….”
포인세티아가 폴짝폴짝 땅굴을 뛰어다니며 사방을 살폈다. 그녀가 발을 딛는 땅마다 하얗게 서리가 피어났는데 목소리는 발랄해도 저렇게 서리가 피어오를 만큼 자신을 드루이드와 떨어뜨려 놓은 가디언에게 분노했던 모양이다.
“어떤 녀석이야? 지금은 기운이 완전히… 달라진 것 같은데.”
포인세티아의 분노가 서리를 피워 내는 분노라면 실새삼의 분노는 고요히 끓어오르는 분노였다. 그는 맛이 간 눈빛으로 땅굴을 쓱 훑다 이내 놀라움이 가득 담긴 눈빛으로 데이지를 바라봤다. 그녀가 차기 가디언이 됐음을 알아본 것이다.
겨우 밖으로 나온 그들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잔뜩이었다. 새로운 노멀 필드의 가디언이 된 데이지에 대해서도 양껏 자랑하고 싶었고 이곳에서 대체 무슨 끔찍한 일이 일어나고 있었는지 등등. 그들이 없는 사이 겪은 책 한 권을 쓸 수 있을 정도로 가득 채운 이야기를 털어놓고 싶었다.
당장이라도 축배를 터뜨리고 싶은 마음이었지만 당장 상황이 녹록지 않았다.
“드루이드님!”
룽카 쪽의 상황도 나와 마찬가지였다. 그쪽은 노멀 필드 드라이어드가 한 그루도 없는 바람에 오랜 시간 홀로 지내야 됐는데, 그의 드라이어드들의 속이 아주 까맣게 타들어 갔을 것이다.
“지키지 못해 죄송해요. 갑자기 알 수 없는 힘에 의해 아티팩트로….”
“그래그래, 난 괜찮아. 많이 놀랐지? 이제 모든 상황이 끝났으니까….”
“정말 잘못되는 줄 알고….”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로 제 주인의 몸을 샅샅이 살피는 드라이어드들을 보며 어쩐지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그가 잘못됐다면 저 드라이어드들도 다신 세상 밖으로 나오지 못했겠지.
“이제 라운을 찾을 수 있는 겁니까?”
그래, 우린 이 때문에 아직 모든 일이 마무리된 것이 아니기에 오롯이 마음을 놓을 수 없는 것이다.
좀 더 재회의 기쁨을 느껴도 될 텐데, 그는 상황이 정리되자 곧바로 라운의 안부를 걱정했다.
“이젠 이곳이 더 이상 위험하지 않을 테니 수색해도 좋을 거예요.”
차마 그에게 라운의 상황에 대한 부정적인 추측이 담긴 말을 할 수 없었다. 미래에 일어났어야 할 일이 상당 부분 바뀌었다. 우리가 과거로 돌아가 미래에 대한 일을 알고 있듯 전대 노멀 필드의 가디언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전대 가디언은 앞서 나가기 위해 부활을 앞당겼고 교단원들을 미리 제물로 써 버렸다. 적어도 과거로 되돌아오기 전에는 룽카와 포로들의 안위를 확인하는 과정을 겪었지만 이번엔 땅굴을 돌아다니는 교단원을 단 하나도 만나지 못할 만큼 일이 성급하게 진행되어 틀어져 버렸다.
가디언이 우릴 향해 오는 길목엔 포로들이 잡혀 있는 방이 있었다. 예상했던 것과 달리 더 이른 시간에, 다른 장소에서 가디언을 마주했으니 아마 포로들은 이미 제물로….
“포로들이 몰려 있던 방이 있었어요. 그곳을 찾는다면 라운은 물론 그간 실종됐던 사람들도 찾을 수 있을 거예요….”
하지만 정황상 그러하다 해도 눈으로 확인하기 전엔 사실이라 단정 지을 수 없었다.
어쩌면 운 좋게 포로들이 있는 방이 아닌 다른 통로로 가디언이 지나왔을 수도 있고….
하지만 룽카와 합세하여 땅굴을 수없이 뒤졌으나 안타깝게도 라운을 발견할 수 없었다. 뒤늦게 77번째 테라리움 근방까지 실종된 우릴 찾으러 도착한 지원군과 합류하여 2차적으로 땅굴을 수색했지만 좋은 소식은 없었다.
급히 땅굴의 지도까지 간이 제작되어 샅샅이 살폈으나 그 어디에도 라운은 물론 포로들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이런 상황이니 모두 제물이 되어 버렸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그러나 한 가닥 희망이라도 잡듯 룽카를 비롯한 에르바 길드원들은 끝까지 땅굴을 떠나지 못했다.
뒤 번대 테라리움에서 길드를 운영하며 임무를 수행한다는 건 언제든 죽음이 곁에 있다는 걸 염두에 둔 상태라지만, 이번 의뢰는 어찌 보면 단순한 마차 수송 및 호위였고 내 일에 그들이 휘말렸다는 죄책감에 마음이 썩 좋지 않았다.
그래서 먼저 이만 돌아가자고 말을 꺼내지 못한 채 그들을 기다리며 지켜봤다.
“데이지가 가디언 자리를 물려받은 건 좋지만… 가디언을 무찔러 버렸으니 일이 좀 꼬였네.”
원래 이리스 파티가 겪은 의문의 혼란에 대해 알아내고, 그들이 찾았다는 신전형 던전을 찾는 게 최종 목표였다. 혼란은 아무래도 이리스 파티가 이곳에 책을 찾으러 왔을 때 이 땅굴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 추측된다.
거대한 제단이 도사리고 있는 땅굴은 가면이 없다면 길을 헤매게 되어 있으니, 땅굴에 직접 가지 않았더라도 바로 위의 지상까지 약한 영향을 받았을 수도 있다. 아니면 전대 가디언의 힘이 새어 나갔을 수도 있고.
어쨌든 혼란의 원인이 되는 모든 것들이 사라져 버렸으니 의도적으로 길을 잃겠다는 목적은 물 건너간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래서 피로도 풀 겸, 에르바 길드에 적절한 위로 보상이라도 전해 줄 겸 66번째 테라리움에 돌아가기로 마음먹었다.
떠나지 않으려던 룽카는 길드 마스터도 라운에 대한 소식을 알아야 하지 않겠냐는 다른 길드원들의 설득에 겨우 떨어지지 않는 발을 뗐다. 그들은 라운을 찾을 때까지 땅굴을 뒤엎어야 속이 시원하겠다는 표정이었지만 이미 그들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한 터라 어쩔 수 없음을 알고 있었다.
돌아가는 마차 안의 분위기는 더없이 가라앉아 숨소리도 들리지 않을 정도였다. 에르바 길드원들은 침울한 얼굴로 마차 바닥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을 위로할 수 있는 수많은 말들이 머릿속을 맴돌았지만 어쩐지 입이 전혀 떼어지지 않아 한마디도 할 수 없었다.
땅굴에서의 일이 지쳤던 탓도 있지만 내가 과거로 돌아오며 반작용으로 라운이 죽은 건 아닌가 하는 의문도 들었기 때문이다. 본래라면 라운은 포로들과 함께 그 방을 빠져나갔어야 하는데….
그렇게 그의 죽음이 기정사실화되어 있었는데…. 어이없게도 우린 길드 본부에서 멀쩡한 모습을 한 라운의 환영을 받아야 했다.
“다들 왜 이렇게 늦게 오셨어요?”
처음엔 우리 모두 귀신을 보고 있는 건 아닌가 했다.
“저보다 먼저 도착했을 줄 알고….”
퍽! 라운의 머리에서 둔탁한 소리가 짧게 터져 나왔다. 얼굴이 시뻘게진 룽카의 주먹이었다. 그는 웃음과 눈물이 한데 섞인 기괴한 표정으로 씩씩거리며 라운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 후 라운은 룽카와 다를 바 없는 표정을 한 길드원들로부터 좀 더 얻어맞은 후 상황 설명을 해 주었다.
처음 우리와 헤어지게 된 계기는 다른 길드원들이 예상했듯이 트러블 메이커라는 그의 별명에 걸맞은 돌발 행동과 오지랖이 섞인 결과물이었다.
불과의 전투를 치르다 본래 있던 곳에서 멀리 떨어지게 되었는데, 그곳에서 곤경에 빠진 사람을 보게 되었다고 한다. 막 전투가 끝났던 터라 드라이어드들은 치료와 휴식을 위해 아티팩트로 돌려보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