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마음을 따라도 돼. 난 네가 뭘 선택하든 항상 지지하고 응원할 준비가 되어 있어.”
자격 적합 판정이 날지 안 날지 모르겠으나 이왕 도전해 보는 게 좋고, 도전하는 김에 자격을 쟁취할 마음으로 열심히 임하는 게 낫지 않을까? 내가 섣불리 그녀의 판단을 걱정하고 노멀 등급에서부터 시작한 그녀의 실력이 다른 가디언들에 비해 부족하지 않을까 전전긍긍할 필요가 없었다. 데이지가 직접 부딪혀 보면 된다. 그리고 난 그녀의 옆에 서고 뒤에 서며 지지해 주고 도와주면 되는 거다.
무언가 결심했는지 눈빛이 반짝거린다. 난 그녀의 의지가 확고해졌을 때 보석처럼 반짝거리는 저 눈빛을 사랑한다. 데이지의 눈빛은 생기를 잃는 일 없이 항상, 언제나 반짝거린다. 그건 그녀가 매 순간마다 굳은 내면으로 임한다는 걸 뜻했다. 그러니 난 데이지의 매 순간을 사랑한다.
“살아 있는 생명이라면 욕망을 갖지 않을 순 없다는 그 말에 동의해요. 하지만 필드를 수호하기 위해 욕망을 버려야 한다는 말에는 동의하지 않아요.”
데이지는 저벅저벅 가디언을 향해 걸어가며 굳건한 목소리로 말했다. 가디언은 원하는 답변이 아니었는지 눈을 찌푸렸다.
“필드의 가디언은 드루이드와 영혼의 연결을 하지 않아야 된다는 말 역시 동의하지 않아요. 전 욕망을 좋은 방향으로 발전시켜야 한다고 생각해요. 당신의 욕망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해 그릇된 일을 행했지만, 다양한 길로 나아간 욕망을 모두 겪어 본 건 아니니 확언해선 안 되는 거잖아요?”
어떤 심판이 와도 시련을 내려도 이겨 낼 수 있다는 것처럼 등을 곧게 세운 그녀의 모습이 그 어떤 나무들보다 거대해 보였다.
“난 내 드루이드가 그 무엇보다도 소중해요.”
“그 시절 우리 가디언들 모두 드루이드를 소중히 여기지 않는 꽃은 없었다.”
“그래서 내 드루이드가 살아가는 세계도 소중해요. 내 드루이드만을 소중히 여기기만 해선 드루이드를 행복하게 해 줄 수 없다는 걸 깨달았어요. 그녀가 살고 있는 세계가 행복해져야 그녀도 행복해질 수 있어요.”
그녀가 말하는 세계의 행복은 작게 말하면 나와 내 드라이어드들이 함께 여행하는 것이 되겠고 크게 말하면 불의 위협이 모두 사라져 세상 사람들이 근심 없이 평화롭게 살아가는 걸 의미했다.
“노멀 필드는 세상을 이루는 10가지 필드의 한 부분에 지나지 않지만 가장 규모가 크고 내 드루이드가 가장 많이 밟는 땅이기도 해요. 그러니 제게 수호할 힘이 생긴다면 그녀가 가장 많이 걷게 될 땅을 올바르게 만들고 싶어요.”
“하지만 결국 드루이드와 필드 수호 중 하나만 선택해야 하는 순간이 올 수 있노라.”
“필드 수호를 선택한다고 그것이 제 드루이드를 버리는 길이라 생각하지 않아요. 그날이 와서 필드 수호를 선택했다면 그것 역시 나의 드루이드를 위해 한 선택일 거예요. 그리고 내 드루이드도 그 선택을 바랐을 거예요.”
힐끔 날 바라보는 데이지를 향해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당신의 욕망이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던 건, 자신의 욕망뿐만 아니라 그 위에 드루이드의 욕망까지 짊어졌기에 너무 무거워진 탓이 아닌가요? 내 드루이드가 자신의 욕망으로 세계를 파멸할 미래를 만들 드루이드가 아니기에, 그녀의 드라이어드인 나 또한 그런 미래를 만들 드라이어드가 아니에요.”
어쩐지 눈물이 날 것 같다. 데이지를 향한 복합적인 감정들이 내 마음을 완전히 녹여 버리고 있었다. 그녀를 아주 작디작은 꽃으로 만났을 때부터 지금까지의 모든 순간들이 떠오르며, 그녀를 만나서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나의 사랑스러운 봄의 요정.
“마음가짐이 가장 중요하나….”
데이지의 말은 가디언의 마음도 흔든 것이 분명하다.
“노멀 필드는 오랫동안 가디언이 부재한 것이나 다름없어 규율을 처음부터 세워야 한다. 하나 가디언이 되었다 하더라도 모든 노멀 필드의 드라이어드들이 이를 따라 주진 않을 것이다. 너는 내 필드의 아이들 중에서도 작은 꽃, 어디서나 볼 수 있기에 특별하지 않으며 연약하지. 그런 꽃이 노멀 필드의 대표하는 걸 가만히 지켜보겠느냐?”
가디언의 말에 엘더가 울컥하여 뭐라 하려다 내 만류에 멈췄다. 당장 뭐라고 하고 싶은 건 나였다.
내가 걱정했던 부분이기도 했다. 역대 스페셜 등급의 드라이어드들이 가디언을 맡았던 전적을 떠올려보면 어쩌면 노멀 등급의 데이지가 이를 감당할 수 있을지에 대한 걱정이었다.
필드의 드라이어드들이 가디언을 따라 주지 않는 상황은 이미 스노우 필드에서 겪어 봤다. 포인세티아가 오랫동안 필드의 의무를 저버리고 놀러 다닌 탓도 있지만 이방인이라 외면당하고 무시당했던 것도 그녀가 가디언의 자리를 확고히 하지 못했던 이유가 되기도 했다.
물론 전대의 세뇌가 더더욱 그녀를 고립시켰던 것이지만, 어쨌든 가디언이란 직함을 달고 있더라도 모든 필드 드라이어드들의 인정을 받는 것은 또 별개였다.
“난 작고 연약한 꽃이 아니에요.”
하지만 데이지가 겨우 그런 소리를 들었다고 기가 죽을 꽃이었다면 지금까지 성장하지 못했다. 그녀는 자신이 노멀 등급 출신이라는 점을 약점으로 여기지 않고 정면으로 돌파해 전설까지 피워 낸 꽃이었다.
“잠재력이 많은 꽃이에요.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성장하고 있고요. 물론 난 다른 꽃들처럼 희귀하지 않지만 특별해요. 왜냐면 난 드루이드 제희 님만의 레드 데이지니까.”
그 말이 갖는 힘은 예전이라면 몰라도 지금의 내가 있는 한 아주 강력했다. 머리를 한 대 맞은 기분이었다.
그렇다. 난 지금까지 잘못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드라이어드들의 등급은 그것이 세계수에서 의해 태어난 일반 꽃들에게나 크게 작용했다. 나 또한 세계수와 다를 바 없이 신이 되고자 하는 자. 그렇기에 내가 데리고 있는, 직접 키우고 있는, 내 영혼에 담긴 꽃이라면 일반적인 룰을 벗어난다.
“그래, 필드에 레드 데이지 꽃은 만발하지만 내 손 안엔 단 세 송이만 있는걸. 그리고 가장 탐스럽게 핀 꽃이 여기 있네.”
데이지는 나만의 스페셜 등급 드라이어드였다. 그러니 태생이 주는 약함은 크게 문제 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보여 주거라. 필드를 대표할 수 있는 거룩한 꽃임을.”
휘이잉. 사르르….
불길한 바람 소리와 모래 알갱이들이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니? 저게 왜!”
가디언의 등 뒤로 데이지가 모두 박살 냈던 10개의 구슬들이 다시 재생되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런데 이번엔 뭔가 달랐다. 겨우 시체의 모습이라도 유지할 수 있었던 것과 달리 가디언의 모습이 한 줌 먼지로 돌아가듯 완전히 조각조각 떨어져 내려… 구슬 속으로 흡수되고 있었다.
팔다리가 사라지고 몸통의 반이 사라지더니 이내 머리까지 전부 구슬 속으로 흡수되어 버렸다. 그리고 10개의 구슬들이 모두 빨갛게 차오르고 말았다. 구슬 모두가 활성화된다면 결과는 뻔했다. 우리를 전멸시켰던 무시무시한 공격이 올 게 분명했다.
심판이라더니…. 그게 결국 자기를 이겨 보라는 뜻이었나? 전처럼 리플레이하는 편법을 또 쓸 수 있을지, 그게 정말 필요한 상황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데이지가 저 전멸기를 스스로 돌파해 내야 한다면… 그녀에게 가장 필요한 힘은….
데이지는 망설임 없이 지옥의 문이나 다름없는 10개의 구슬을 향해 뛰어들었다.
공격 기술 중 가장 악독하며 큰 피해를 줄 수 있는 것으로 자폭 기술이란 게 있다. 제 생명을 바쳐 시전하는 기술이기에 대가가 대가인 만큼 피해가 큰 것이다. 자폭 기술을 사용할 줄 아는 드라이어드를 만나 보기도 했으니 그 위력은 잘 안다.
가디언이 자신을 제물로 바쳐 10개의 구슬을 모두 활성화할 줄은 전혀 생각하지도 못했다. 물론 생명들의 시간을 제물로 바쳤을 때보다 색이 연하고 불안정해 보이나 중요한 건 그 기술을 다시 사용할 수 있게 된 상황이란 거다.
위력이 줄었을지라도 방어형이 아닌 데이지 홀로 저 기술을 막기란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방어하는 것이 아닌 똑같이 강력한 기술로 맞받아친다면?
구슬들의 중앙으로 뛰어든 데이지는 어쩌면 그럴 생각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녀에겐 안타깝게도 대규모 기술이 존재하지 않았다. 단일 공격 특화 딜러이기에 바곳의 기술처럼 범위가 큰 공격에 카운터로 받아칠 기술을 현재로서는 보유하고 있지 않았다.
“데이지….”
물론… 아주 방법이 없는 건 아니었다.
나와 데이지에겐 실마리가 보이지 않는 큰 과제가 존재하고 있었다. 바로 그래프트였다. 드라이어드의 육성이 상위에 도달하고 드루이드와 드라이어드의 교감도가 최고가 된다면 사용할 수 있는 그 기술.
엘더가 첫 그래프트를 터뜨리고 막막할 것만 같았던 메스키트와도 끝내 그래프트를 해냈다. 세계수의 힘을 빌려 그래프트를 사용했던 가막살나무는 제외하고, 팀의 초창기 멤버나 다름없는 데이지와의 그래프트는 수많은 전투를 거쳐 왔으나 사용할 수 있는 기미가 보이지 않았었다.
우리 사이의 교감도는 그래프트를 몇 번이나 펼칠 수 있을 만큼 차고 넘친다고 생각한다. 데이지의 성장도 문제가 없다고 생각한다. 화관과 날개가 없는, 데이지와 같은 노멀 등급의 드라이어드가 그래프트를 펼치는 모습도 수없이 많이 봐 왔기 때문이다.
그러니 부족했던 건 신호탄이 아닌가 싶었다. 모든 게 준비되어 있지만 막힌 둑을 무너뜨릴 수 있는 돌 하나. 데이지의 잠재된 힘을 터뜨릴 수 있는 작은 지점을 찾지 못해 우리가 그동안 그래프트를 쓰지 못했던 건 아닐까?
콰아아앙!
데이지가 어마어마한 힘이 응축되고 있는 지점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 손길은 마치 공격을 막기보단 무언가를 갈취해 내려 하는 사냥꾼을 닮아 있었다. 자격을 가져가라고 했으니 그 힘 모두 제가 가져가겠다는, 용기가 가상하면서도 한편으론 무모한 행동이었다.
“데이지!”
당장 피하라고 해도 이미 폭발을 눈앞에 두고 있는 시점에서 피할 곳은 없었다. 그리고 이곳에서 그녀가 아니라면 저걸 어떻게 해 볼 수 있는 존재도 없었다. 결국 데이지뿐이었는데, 데이지는 처음부터 끝까지 우리의 희망이 되는 셈이다.
데이지의 손이 붉게 활성화된 구슬 중 하나에 닿았다. 어쩌면 저걸 깨부수는 것이 해답이라 여겼는지도 모른다. 역시나 데이지는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않는다. 끝내 답을 찾아내려 하는 모습이 그녀다웠다.
우리에게 신호탄이 필요할지도 모른다고 했던가.
데이지는 개량종이란 껍질을 벗어 내고 오롯이 레드 데이지가 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오리지널 꽃들의 역사에 비하면 레드 데이지 종의 시간은 막 태어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 짧은 시간 동안 오리지널 꽃들이 오래전에 이룩하고 오랜 세월 동안 다져온 신화를 만들고 종의 특수성을, 가장 앞서 나가는 데이지가 전부 만들어 내야만 했다.
‘원래의 내 능력이라면 비가 아니라 잠깐의 안개였을 텐데….’
엘더와의 그래프트를 처음 사용한 날, 그는 자신의 그래프트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러니 오리지널 종의 그래프트는 그들의 고유 능력이나 다름없었고 어떤 형태로 발현될지 이미 정해져 있는 것이라고 볼 수 있었다.
나와 만나 그래프트의 형태가 기존보다 훨씬 극대화된 모습으로 나타나긴 했으나 본질은 달라지지 않는다.
그렇다면 데이지가 그동안 그래프트를 사용하지 못했던 건…. 레드 데이지 중에 그래프트를 사용한 역사가 없었기 때문에 애를 먹었던 게 아닐까? 그게 신호탄이었던 것이다. 어떻게 발현해야 될지, 종에 잠재된 기억이 없기 때문에 모르니 우리의 조건이 모두 만족되었어도 사용하지 못했던 거다.
글을 모르는 아이에게 다짜고짜 최상품의 종이와 펜을 쥐여 주고 시를 쓰라고 한 것이나 다름없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두근두근, 절박한 상황과 어울리지 않게 심장이 평온하고 기분 좋은 울림으로 두근거린다. 이 심장 소리는 나만의 것이 아닌, 데이지의 심장 소리와 함께 공명하여 울리는 듯했다.
결국 데이지는 찾아낸 게 분명했다. 그녀만의, 레드 데이지 종의 그래프트를.
이 열연한 두근거림이 그 신호였다.
온몸의 피가 뜨겁게 달아오르며 내면의 힘이 초봄의 따뜻한 비를 맞은 씨앗처럼 기분 좋게 태동하는 것이 느껴졌다. 상쾌한 봄바람을 타고 날아오르는 것처럼 들뜬 기분이 들었고 가슴속에 레드 데이지 꽃을 잔뜩 피워낸 것처럼 향기로운 내음이 속에서부터 퍼져 나오는 듯했다. 데이지도 이를 느꼈는지 아주 잠깐이지만 공감을 담은 우리의 두 눈이 마주쳤다. 그 어떤 때보다도 우리는 마치 처음부터 하나로 태어난 것처럼 깊게 교감하고 있었다.
그 찰나의 순간에 그녀가 그 어떤 때보다도 화사하게 웃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데이지 또한 그토록 기다려왔던 순간이었다. 그래프트는 증명이나 다름없었다. 내가 나무가 되고 드라이어드가 접붙인 가지가 되어 하나가 되는 순간이 바로 그래프트였다.
난 재빨리 달려 나가 전장 속에 홀로 빛을 내며 피어 있는 붉은 꽃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녀를 닮아 생명력이 충만하고 굳은 의지로 꼿꼿하게 피어 있던 꽃이, 내 손길에 어떠한 저항 없이 붙잡혀 주었다.
온몸의 힘이 요동치며 다른 드라이어드들과 그래프트를 사용했을 때처럼 착실히 연료가 되기 위해 가쁘게 순환하기 시작했다.
우우웅.
내 등 뒤로 가디언의 것과 다를 바 없는 10개의 구슬들이 떠올랐다.
차르르….
구슬 하나하나에 내 다이아의 힘이 담기며 차곡차곡 붉은 빛이 아닌, 보는 것만으로도 빨려 들어갈 것 같은 새까만 빛으로 차올랐다. 분위기를 깨는 것 같지만 그걸 바라보며 웃음이 나오지 않을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