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79화 (479/604)

설마 지금 이곳에 있는 노멀 필드의 드라이어드들을 가디언 후보자로 생각한다는 건가?

난 가디언의 시선을 따라 데이지와 엘더를 바라보며 자연스레 그들이 가디언이 된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어쩐지 가슴이 벅차올랐다. 둘 중 하나가 가디언이 된다면 더없이 기쁘겠지만… 그게 가능한 일일까 하는 의문이 든다.

그동안 만나온 필드의 가디언들을 떠올려 보니 더욱.

실새삼은 카수스가 활동하던 시절부터 자리를 이어 오고 있었고 메스키트는 전대에게 계승을 받았다. 포인세티아는 전대에게서 갈취했다고 볼 수 있었고. 그런데 이들의 공통점이 있으니, 다들 필드의 단 하나뿐인 꽃이라는 점이었다.

세상에 실새삼은 그다지 희귀한 꽃이 아니기에 많이 퍼져 있다. 워낙 번식력이 뛰어나기도 하고. 그러니 수가 많은 만큼 드라이어드 자연 발생 확률도 높았다. 하지만 실새삼에서 태어난 드라이어드들은 잠정적으로 단 한 그루의 드라이어드를 위한 여분의 몸뚱어리가 될 수 있었다. 게다가 그 드라이어드는 의도적으로 또 다른 드라이어드가 태어나는 걸 막을 수도 있는 자이니 따지고 보면 세상에 실새삼 드라이어드는 단 하나뿐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은둔자의 정원에서 실새삼이 동종의 드라이어드들의 몸을 옮겨 다니며 도망쳤던 걸 떠올리니 소름이 돋았다.

메스키트는 자신의 입으로 현재 필드에 존재하는 벨벳 메스키트 드라이어드는 자신 하나뿐이라고 말했었다. 그 증거로 야생종을 찾아 줄 수 있는 나비가 메스키트를 선택하지 않고 엘더를 선택했었지.

포인세티아 역시 실새삼처럼 그다지 희귀한 꽃이 아니었다. 다만 그것이 포인세티아의 자생 필드인 트로피컬 필드에서 피어나는 꽃들로 보자면 그랬다. 스노우 필드의 가디언인 포인세티아는 아이러니하게도 트로피컬 필드 출신이며, 현재는 유일하게 스노우 필드에서 피어나는 단 한 송이의 포인세티아였다. 그러니 눈의 포인세티아는 단 하나라고 볼 수 있었다.

이는 드라이어드들의 등급 개념과도 연관이 있다고 볼 수 있는데, 메스키트는 애초에 단 하나이기에 스페셜 등급이었고 포인세티아 또한 동종 중 스노우 필드에서 피어나는 유일한 종이기에 스페셜 등급이었다. 실새삼은 동종이 많이 존재한다는 점 때문에 유니크 등급이었으나 원한다면 언제든 스스로 스페셜 등급까지 올릴 수 있는 자였다.

드라이어드의 등급은 세계수 밖에 얼마나 많은 동종의 드라이어드가 나와 있느냐에 따라 매겨진다고 메스키트가 알려 줬었다. 모든 종들의 힘은 동일하나 세계수 밖에 드라이어드가 많이 나오면 나올수록 그 힘을 나눠 가져가기 때문에 노멀 등급으로 갈수록 드라이어드 한 그루가 갖는 힘이 약해지는 것이다. 그렇다고 노멀 등급의 드라이어드가 평생 약한 것은 아니었다. 동종의 드라이어드를 포레스트로 흡수하면 영혼을 위탁받는 것과 동시에 힘도 위탁받아 강해질 수 있었다.

실새삼이 포레스트를 형성하지 않아도 강한 이유가 이런 원리 때문이었는데, 그는 동종의 드라이어드를 모두 자신의 휘하로 컨트롤할 수 있으니 애초에 힘과 영혼을 나눠 가지지 않는 지극히 욕심쟁이 드라이어드인 셈이다.

어쨌든 필드의 가디언은 이처럼 동종의 힘을 오롯이 혼자 누릴 수 있을 만큼 강한 존재여야만 될 수 있을 거란 인식이 있었다. 필드를 수호하는 존재이니 그만큼 힘도 강해야 하는 건 맞았다.

그래서 아이러니가 발생하는 거다. 노멀 등급에서 시작한 데이지와 그보다 훨씬 등급이 높은 유니크 등급의 엘더라도 지금까지 존재하는 가디언들의 특수성과는 거리가 많이 먼 드라이어드들이기 때문이다.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는 게 아니라 감당하기 어려울 거란 생각이 들었다.

“자격을 순순히 넘기긴 할 거야?”

하지만 감당할 수 있는지 없는지는 겪어 봐야 알 수 있는 거고…. 문제는 광기가 모두 빠져 차분해졌다 하더라도 아직까지 어디로 튈지 모르는 저 노멀 필드 가디언의 속내였다. 가디언은 가디언의 자리를 짐 덩어리처럼 여기는 말투였고 당장이라도 자신을 끝내 달라고 말하고 있지만, 정말 순순히 넘겨줄까?

가디언은 아직 카수스를 그리워하고 있었다. 드라이어드가 함께했던 주인을 그리워하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지만 주인과 다시 만나려면 완전한 힘과 신체가 필요했다. 현재는 우리에게 막혀 모든 힘을 잃어가고 있지만, 껍데기만 남아 있다면 언제든지 교단원들과 같은 사악한 의도를 가진 이들이 다시금 부활시킬 수 있었다.

한번 부활해 봤으니 가능성을 알 테고. 주인과 다시 만날 수 있는 길이 생겼는데 이를 정말 고이 포기한다고?

내 물음에 가디언은 잠시간 아무 말이 없었다.

“나를 살린 것은 구원받고자 하는 욕망들이었고 그 욕망에 이 껍데기 안에 오랫동안 잠들어 있던 나의 욕망이 반응하여 깨어났었다.”

77번째 테라리움의 사람들은 가디언을 부활시켜 자신들을 구원해 줄 신으로 모시려 했다. 그 욕망은 시체만 남은 가디언에게서 카수스와 함께하고 싶다는 욕망을 깨웠다. 그 욕망은 더 많은 제물들을 얻어 강해지고 싶다는 마음이 들도록 하고 앞을 가로막는 우릴 처리하게 움직였다.

“그러나 그 욕망들을 다 토해 내는 건 물론… 난 내 욕망조차도 감당할 수 없을 만큼 깨진 상태였다. 난 더 이상 무언가를 담을 수 있는 그릇이 될 수 없지.”

그릇, 그건 포레스트의 왕이 될 자질이 있는 드라이어드를 나타낼 때도 쓰는 말이었다. 동종의 영혼을 담을 수 있을 만큼 그릇이 커야 왕이 될 수 있는데, 하물며 필드를 대표하는 드라이어드가 되려면 그 그릇이 얼마나 커야겠는가? 가디언을 제단에서 처음 만났을 때, 교단원들의 광기 어린 기도를 받으며 일어났으나 쉴 새 없이 왈칵 검은 물을 게워 냈던 것이 떠올랐다.

“이미 노멀 필드의 수많은 생명들의 시간을 삿된 마음으로 허락 없이 담아냈을 때부터 깨졌던 것이다. 그때의 우리들은 시간뿐만 아니라 생명의 모든 것들을 빼앗아 버린 거지. 삶의 욕망, 꿈, 모든 것을….”

카수스에게 영생을 주기 위해 자신들의 필드의 생명들을 제물로 쓴 가디언들….

“이대로 깨진 상태로 있어 봤자 난 의도하지 않아도 끊임없이 주변을 삼키려 들고 그걸 다시 토해 낼 것이다. 내 주인에게 돌아가도 마찬가지겠지. 아니, 주인이라고 할 수도 없겠군. 연결은 아주 오래전에 끊어졌고 이 나에겐 더 이상 주인이란 것도 존재하지 않으니까.”

카수스를 떠올리는지 그리운 표정을 지었으나 금방 지친 표정이 되었다. 그 순간에도 쉴 새 없이 모래성에서 떨어져 내리는 마른 흙처럼 그의 피부가 조각조각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욕망이란 건 이토록 무섭도다. 그릇된 선택을 하게 만든 것도 카수스와 오래 함께 지내고픈 내 욕망에서 비롯되었으니. 죽은 존재를 되살리는 것은 욕망이나 파멸시키는 것도 욕망이고 영원히 안식에 들지 못하게 만드는 것 또한 욕망 때문이니라….”

중얼중얼, 기도문을 읊듯 생기 없는 눈으로 허공을 바라보며 이야기하던 가디언이 돌연 목소리에 힘을 주었다.

“안일하게 생각했군. 끝을 원하나 자격을 순순히 넘기겠냐는 질문에 생각이 다시 들었노라. 나는 욕망으로 인해 파멸한 꽃. 그러니 내게서 자격을 가져갈 자는 욕망에 지배되지 않을 꽃이다. 단순히 드루이드와 함께하고 싶다는 욕망이라도 세계를 재앙에 빠뜨리는 짓을 벌일 수 있다. 제대로 된 노멀 필드의 가디언이 되고자 하는 자, 내 심판에 응하라.”

“심판…?”

“애초에 필드의 가디언은 드루이드와 영혼의 연결을 하지 않아야 할지도 모른다. 지켜야 할 드루이드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드라이어드는 매 순간 욕망에 사로잡히니까. 하나 이 자리에 있는 건 전부 영혼이 연결된 꽃들이니 증명할 수만 있다면 가져가 보거라. 이 자리에 적합한 꽃이 없다면 이곳에 영원히 날 봉인시키고 자격이 되는 꽃이 찾아올 때까지 잠들겠노라.”

욕망으로 인해 수호해야 할 필드를 통째로 말아먹은 가디언이 같은 일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자격을 심판하여 넘기겠다고 한다. 옳은 판단이긴 했다. 제2의 카수스 꼴이 나지 않으란 법이 없으니까.

만약 데이지나 엘더 중 이 자격이 가지고 싶다면 가디언의 심판에 응해야 할 것이다. 어떤 심판이 기다리고 있는지 모르나 둘 모두 탈락한다면 노멀 필드의 가디언 자리는 누구나 도전할 수 있는 오픈된 자리가 된다. 이를 카수스가 손에 넣거나 카수스와 같은 자가 가지게 된다면…?

“난 이미 너희들의 영혼 깊숙한 곳에 자리한 욕망까지 이미 전부 엿봤노라.”

내 드라이어드들을 혼란 속으로 끌고 가기 위해 마음을 들쑤셔 놨던 가디언이었다. 다른 가디언들과 달리 전투 방식이 상당히 특이하다고 볼 수 있었는데, 애초에 꽃말이 욕망과 관련이 있을 정도로 마음을 다루는 데 특화된 모체가 아니었을까?

“살아 있는 생명이라면 욕망을 갖지 않을 순 없으니, 속에 품은 그 욕망을 노멀 필드를 수호하기 위해 버릴 수 있는지 증명해 보거라.”

“난 그딴 거 필요 없어.”

엘더가 단번에 거절했다.

“내 꽃말은 열중, 타오르는 욕망에서 비롯된 꽃말이라고 볼 수 있지.”

언젠가 다이아에 환장하는 엘더에게 그의 꽃말을 들어 다이아를 향한 열중이 아니냐며 속으로 놀렸던 일이 떠올랐다.

“물론 노멀 필드의 가디언 자리가 욕심이 나지 않는 건 아니야.”

엘더의 단호한 목소리를 들으며 그가 왜 가디언의 자리에 욕심을 내는지 생각해 봤다. 가장 큰 이유는 바로 곁에서 그를 키운 메스키트를 보고 자랐기 때문이 아닌가 싶었다. 엘더는 그녀를 존경하면서 한편으론 그녀와 동등해지고 싶어 하는 욕망을 가졌으니까.

데저트 필드의 가디언인 메스키트와 동등해지려면 똑같이 가디언이 되는 수밖에 없었다. 그는 항상 메스키트에게 더 이상 업어 키운 묘목이 아니란 걸 어필하고 싶어 했고, 메스키트의 눈에 엘더는 여전히 살뜰히 키운 묘목에 지나지 않았다.

한땐 유니크 등급 자부심이 대단했던 그에게 가디언의 자리는 수호자라는 의미보단 필드의 대표자라는 권력의 의미가 더욱 강하기도 하겠고. 파라다이스 테라리움에서 필드 휘하의 드라이어드들을 지휘하던 메스키트와 실새삼을 바라보던 엘더의 눈빛을 떠올려보면 그랬다.

“하지만 난 노멀 필드의 생명들을 위한 드라이어드가 되고 싶지 않아. 내가 되고 싶은 건….”

엘더가 올곧게 날 바라봤다.

“단 한 사람만의 드라이어드야. 그러니 심판 같은 거 받을 생각 없어.”

쟤는 저런 부끄러운 소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난 확 달아오르는 얼굴을 손으로 가렸다.

확실히 엘더는 욕망이 그득그득한 드라이어드라 가디언이 말하는 자격을 갖추지 못했다. 그렇다면 데이지는…? 데이지 또한 나와 함께 오래도록 여행하는 것이 그녀의 욕망이 아니었나? 가디언이 바라는 건, 그녀가 그 욕망을 포기해야 한다는 건데…. 난 데이지가 어떤 결정을 할지 궁금한 마음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데이지는 내가 아닌 가디언을 보고 있었다.

그때 문득, 실새삼이 내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참고로 네 드라이어드들의 의견은 반반이었다.”

실새삼은 내게 본래 살던 세계에 그대로 남을 것인지, 테라리움 어드벤처 세계로 돌아갈 것인지를 물으며 내 드라이어드들이 각기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말해 주었다.

내가 본래 세계에 그대로 남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드라이어드들과 다시 자신들의 곁으로 돌아오길 바라는 드라이어드들. 영원히 함께하자던 영혼의 약속을 잊지 말기를. 다시 자신들의 곁으로 돌아오기를.

그렇다면 데이지는 둘 중 어느 쪽이었을까?

드라이어드가 내가 본래 세계에 남길 바란다는 게 나쁘다는 건 아니다. 그건 다른 방법의 애정 표현이라고 볼 수 있었다. 내가 본래 세계로 넘어가기 직전의 상황이 매우 좋지 않았으니, 테라리움 어드벤처의 세계는 내게 몹시 위험한 곳이라고 생각한 거겠지. 그러니 내가 본래 세계에서 평화롭고 안전하게 지낼 수 있기를 바란 것이다.

물론 그렇게 된다면 난 더 이상 드라이어드들과 만날 수 없게 된다. 우리가 사는 세계는 다르기 때문에. 드라이어드들은 언제나 날 생각하고 걱정하고 함께하기를 바라기에 만날 수 없게 되는 걸 좋아할 리가 없었다. 그러나 그 마음을 포기하면서까지 내가 더 행복하기를 빌어 주는 것이다.

엘더는 내가 테라리움 어드벤처의 세계로 어서 빨리 돌아오기를 바라는 드라이어드 중 하나였을 거라 확신한다. 그리고 지금 고찰하는 순간이 오기 전까지 데이지도 그럴 거라 생각했었다. 그러나 가디언을 흐트러지지 않는 눈빛으로 주시하는 데이지를 보니 그 생각이 틀렸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디언이 그녀를 유혹하기를, 영원토록 드루이드인 나와 함께 지내게 해 주겠다고 한 걸 보니 그녀의 큰 욕망은 그것이었다. 그러나 내가 원래 세계에 남기를 바랐던 것이 증명하듯 데이지는 더 큰 목표를 위해서 그 욕망을 버릴 수 있는 드라이어드였다.

“데이지.”

아주 작게 그녀를 부르자 곧바로 가디언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날 바라본다. 그녀의 눈빛이 내게 무언가를 말하고 있었다. 직접적으로 입을 열지 않은 건 그녀의 내면에서 갈등이 일어난 거라 볼 수 있었다.

데이지는 고민하고 있었다. 가디언의 자격에 도전할지, 엘더처럼 깔끔하게 포기할지를.

가디언이 말하는 욕망을 버리라는 말의 뜻은 곧 그자의 현실과 다름없었다. 지나친 욕망이 불러온 결과물이었으니까.

데이지가 가디언의 자리에 도전한다는 건 우선순위에 나와 수호의 의무를 두고 끊임없이 싸워야 한다는 걸 뜻했다. 현재까지의 가디언들은 결국 드루이드를 선택했고 장시간 필드의 규율이 어그러진 탓에 많은 이치들이 혼란에 빠진 상태였다. 그러나 실새삼도 메스키트도 포인세티아도 이젠 제 의무를 저버리지 않을 거라 선언했다. 그리고 착실히 그들의 인도가 필요한 상황에서 뜻을 보여 줬었다.

그들은 언젠가 나와 필드 수호의 의무 중 하나를 선택해야 될 순간이 왔을 때…. 기꺼이 수호의 의무를 선택해 낼 것이다. 데이지가 가디언이 되고 싶다면 이걸 항상 염두에 둬야 한다.

고민하는 것 자체가 가디언의 자격에 욕심이 난다는 거니 날 생각해서 그 자리를 포기하진 말았으면 좋겠다. 데이지가 노멀 필드를 수호하게 된다면 무척이나 잘 어울릴 것 같았다. 쓰러져도 몇 번이고 다시 일어나는 올곧은 마음은 재활이 필요한 필드에 큰 힘이 되어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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