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의 데이지가 합류하자 믿었던 대로 허공을 나는 검들은 더 이상 데이지에게 문제가 되지 않았다.
더구나 이번엔 데이지의 수가 더 늘어서 전투가 수월해졌다. 물론 그중 가장 막내인 어린 데이지는 혼자서 겨우 작은 불을 잡을 수 있던 수준이었기에 간간이 견제를 하는 데 그쳤다.
훌쩍 성장한 미래의 데이지들이 기량을 최대로 펼쳐 싸우는 전투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린 데이지가 주눅 들거나 겁먹지 않고 끝까지 제 할 일을 찾아 해내는 게 기특할 따름이었다.
다중 회복이 특기인 엘더의 능력 역시 드라이어드가 늘자 진가를 발휘했다. 그의 버프 스킬인 행운 증가를 아낌없이 사용하여 데이지는 단검을 휘두르는 족족 치명타를 터뜨렸다. 가디언의 검은 순식간에 폐품처럼 너덜너덜해졌고 공격 속도도 현저하게 느려졌다.
이쯤 되자 드디어 본체를 노릴 수 있는 순간이 찾아왔다. 다른 세 송이가 검을 붙잡을 동안 데이지가 무방비 상태의 가디언을 노리고 뛰어올랐다.
그녀가 노리는 것은 가디언이 아니라, 바로 등 뒤의 구슬들이었다.
와장창!
데이지의 단검이 적중하자 붉은 구슬이 유리 깨지는 소리를 내며 처참하게 박살 났다. 동시에 안에 든 붉은 액체가 구슬에서 쏟아져 나왔고 곧이어 허공을 날던 검 중 하나가 홀연히 사라져 버렸다.
“크윽…!”
구슬이 깨지자 가디언은 괴로워하며 비명을 질렀고 이내 검은 액체를 왈칵 토해 냈다.
여러 명의 찢어지는 비명 소리와 광적으로 읊조리는 기도 소리가 사방에서 들려왔다.
“우리를 구원하소서….”
비명의 주인들은 알 수 없으나 기도는 교단원의 것임을 알 수 있었다. 가디언의 시체를 향해 부활을 기원하며 울부짖던 기도와 많이 닮아 있었다.
가디언은 곧바로 검을 회수해 남은 구슬을 지키려 했으나 남은 데이지들이 이를 가만히 두고 볼 리가 없었다. 그 틈을 타 데이지는 두 번째 구슬을 노리며 단검을 들었다.
와장창!
“크아악!”
또 한 번 붉은 구슬이 박살 났고 사방에서 울리는 기이한 소리는 커졌으며 가디언은 더욱 괴로워했다. 또한 가디언의 미의 신처럼 아름다웠던 외형이 처참히 망가지고 있었다.
바짝 마른 흙처럼 피부가 갈라지고 조각조각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머리카락은 푸석해지고 두 눈은 점점 생기를 잃어 갔다.
“이 땅엔 더 이상 희망이 없습니다….”
“우리도 여기까지가 끝인 듯하군요….”
“한평생 살아온 고향이 이렇게….”
비명 소리와 기도하는 목소리들 속엔 이질적인 목소리가 끼어 있었다. 집중하지 않으면 캐치해 내기 힘든 목소리였다.
“아이들만이라도 테라리움으로 보낼 수 있다면….”
“어떤 테라리움도 우리를 받아 주지 않을 거예요. 우리에겐 더 이상 세금을 낼 수 있는 다이아는커녕 아무것도 남지 않았으니까.”
“불이 사방에서 옥죄어 오고 있습니다. 아무도 이곳에서 나갈 수 없을 거예요.”
“지원은 오지 않는 겁니까? 최소한 사람들을 옮겨 줄 마차만이라도….”
“어제 그것이 마지막 마차였을지도 몰라요. 테라리움은 우릴 버렸습니다.”
와장창!
그사이 데이지가 3번째 구슬을 박살 냈고 가디언은 본래의 시체와 같은 모습으로 되돌아가고 있었다. 아마 구슬은 생명들의 시간을 붙잡아 두는 용기와 같았으니 깨뜨리자 내용물이 모두 흩어져 힘을 잃어 가는 걸지도 모른다.
구슬이 하나 더 박살 나자 이질적인 목소리들의 대화도 더 선명해졌다.
“아아… 며칠이나 마시지도 먹지도 못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아요….”
목소리의 주인은 매번 달랐기에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대화하는 것임을 알 수 있었다.
“혹시 근방을 여행하는 드루이드가 우릴 발견해 주지 않을까요?”
“아무리 드루이드라도 우리 모두를 지켜 줄 순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테라리움이 모두 전소된 이런 위험 지역까지 내려올 멍청한 드루이드가 있겠습니까….”
테라리움이 모두 전소된 위험 지역? 문득 이 대화의 주체들이 누군지 알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정녕 세계수는 우릴 버린 것일까요? 세계수는 드루이드도 아닌 평범한 우리 인간들은 신경 쓰지 않는 걸까요?”
목소리에 담긴 절망은 더욱더 깊어졌고 듣는 이들도 어깨를 늘어뜨릴 만큼 고달프게 들려왔다.
“모두들 이것 보십시오. 행정 관리원의 자택을 털었는데 이런 책이….”
“어쩌면 우리에게 이 책이 한 줄기 빛이 되어 줄지도 모릅니다.”
책? 대화의 주제가 달라지고 있었다.
“데이지! 남은 구슬도 박살 내 버려!”
구슬이 박살 나면 날수록 이 기이한 대화들을 더 선명하게 들을 수 있다. 어쩌면 이 땅굴에 얽힌 비밀을 알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가디언은 남은 구슬이라도 지키려는 것처럼 심하게 몸부림을 쳤다. 허공을 나는 검들이 붙잡혀 쓸모가 없어지자 제 팔을 날카로운 검처럼 변형시켜 휘두르기 시작했다.
모든 구슬이 온전할 때라면 모를까, 이미 망가지기 시작한 가디언은 팔팔한 데이지에게 대단한 상대가 되지 못했다.
“책을….”
의문의 책이 등장하고 난 이후부터 절망만 가득하던 그들의 목소리에 어렴풋한 희망이 담기기 시작했다.
“정말 이렇게 하면… 우리를 위한 새로운 신이 탄생하는 겁니까?”
“하지만 방법이 너무 잔인해요… 어떻게 우리가 살고자 다른 이들을….”
“아직도 그런 약한 소리를 할 겁니까? 주변을 둘러보십시오. 가장 도움이 절실한 우리에게 손을 내미는 곳이 있는지. 물 한 모금도, 빵 한 조각도 감사히 받을 수 있는 우리인데 다들 못 본 척하고 있지 않습니까?”
“힘없는 우리들이 살아남기 위해선 뺏고 빼앗는 방법밖에 없어요. 아니면 다들 이렇게 포기할 겁니까? 그대로 죽을 거예요?”
“어제도 어린아이가 끝내 목숨을 잃었습니다. 이렇게 버텨 봤자 굶어 죽든가 불에 타 죽든가 둘 중 하나입니다.”
목소리는 희망을 얻음과 동시에 광기도 얻었다.
“일단 지하로 가 봐요. 그곳에 신의 틀이 있다는 이야기 아닌가요? 가서 보고 판단하면….”
“지하라면 지상보다 불의 위협으로부터는 안전할 거예요.”
그 후의 대화들로 그들이 지하라고 지칭한 이 땅굴에서 썩은 시체 상태의 가디언을 발견한 일, 버티다 못한 이들이 결국 약탈과 납치를 일삼던 일들의 전말을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예상했던 대로 대화의 주체는 전소된 77번째 테라리움의 주민들이었다.
그들은 사망한 행정 관리원의 자택에서 부활과 관련된 책을 얻었다. 책에는 그뿐만 아니라 책에는 77번째 테라리움 아래에 노멀 필드 가디언의 시체가 묻혀 있다는 사실까지 적혀 있었다.
대체 누가 만든 책이길래 그런 내용이 적혀 있는지, 어째서 가디언의 시체가 테라리움 아래 묻혀 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대화를 통해 정확히 알게 된 사실은… 가디언의 부활은 당사자가 원해서, 직접 지시해서 일어난 일이 아니었다는 거다.
사람들은 저 드라이어드의 시체를 정말 신의 틀이라 착각했고 힘든 현실에서 구원받고 싶다는 광기 어린 망상으로 땅굴을 파 제단을 만들고 산 제물들을 바치기 시작한 것이다.
퍼걱, 파스스….
데이지는 끝내 붉은 구슬을 단 하나만 남겨 두고 모두 박살 내는 데 성공했다. 가디언의 모습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끔찍한 형태를 하고 있었고, 지켜보고 있던 룽카는 이를 처음 목도한 나처럼 끔찍한 표정으로 토악질을 했다.
그 역시 드라이어드의 시체는 처음 보는 것일 테니 말이다.
지쳤기 때문인지 가디언의 움직임도 상당히 둔해졌고 기분 탓인지는 몰라도 그의 기색 역시 차분해졌음을 느꼈다.
“이제 되었다. 끝을 내거라.”
갑자기 가디언이 모든 움직임을 멈추었다.
“내게 끝을 주거라. 내 이야기가 시작된 이곳에서, 영원히 끝나지 않고 있던 내 이야기에 끝을 다오.”
그러곤 순순히 데이지의 단검을 향해 무방비 상태로 두 팔을 벌렸다. 괴물처럼 날뛰던 이의 확 바뀐 태도에 모두들 당황했다.
“가디언은 죽지 않잖아. 네가 시체 꼴로 있던 건 그런 이유에서 아냐?”
죽고 싶다 해도 정말 죽을 수 있을까? 난 의문을 담아 가디언에게 물었다.
“내가 죽지 못한 건 벌을 받았기 때문이다. 난 이미 오래전에 가디언의 자격을 잃었노라.”
그 목소리가 어쩐지 슬프게 들렸다. 기괴하긴 하나 가디언이 드디어 ‘정상’으로 돌아온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를 여태 살아 움직이게 만들었던 건 사람들의 어긋난 광기와 강제로 빼앗은 생명들의 시간이었다. 말 그대로 사람들의 염원에 의해 움직이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오래전 내 주인이 영생을 살게 하기 위해 내 필드의 모든 것들을 주인을 위해 바쳤지. 그 순간부터 내겐 가디언의 자격은 사라진 것이다.”
“하지만… 넌 남아 있잖아? 그럼 다른 드라이어드가 현재 노멀 필드의 가디언이란 거야?”
“난 드라이어드가 아니고 노멀 필드의 가디언 자격 그 자체이니라.”
드라이어드가 아니라 자격 그 자체라고? 도통 이해하기 힘든 말을 한다 싶었는데….
“아, 설마 그래서 오래전 이름을 잃었다는 말이….”
문득 이해가 되었다. 현재 우리가 보고 있는 건 정말로 드라이어드가 아니라 노멀 필드의 가디언이라는 껍질만 남은 걸 보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그래서 어떤 모체를 가지고 있냐는 물음에 이름이 없다 답했고 몸을 원상 복구했을 때도 끝내 어딘가에서도 모체를 상징하는 꽃을 볼 수 없었던 게 아니었을까?
“그럼 진짜 널 없애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거야?”
가디언에겐 더 이상 생의 미련이 보이지 않았다. 교단원들도 아마 모두 죽었을 것이고 더 이상 그가 살아 있기를 바라는 존재가 없으니 살아 움직일 이유도 없을 것이다.
“다른 드라이어드가 이 자격을 가져간다면….”
그는 마치 가디언의 자리를 족쇄와 허울처럼 표현하며 데이지와 엘더를 바라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