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77화 (477/604)

다시 데이지와 가디언이 맞붙었다. 가디언은 이전처럼 붉은 구슬을 활성화시켜 허공을 떠다니는 검을 만들었고 여유롭게 데이지를 상대했다. 다만 데이지가 감당 가능한 것으로 보일 때마다 검의 개수를 늘렸던 이전과 달랐다.

데이지가 마지막으로 상대할 수 있었던 한계인 3개의 검을 한 번에 활성화시켜서 시작부터 그녀에게 맹공격을 펼쳤다.

그래도 포레스트에 권속이 늘어나며 능력이 상승한 데이지였기에 서포트를 받아 간신히 3개를 상대했던 전과 다르게 충분히 여유로운 모습을 보여 주었다. 그녀는 단검에 매달린 사슬을 적극 활용하여 전투에 임했다.

이리저리 움직이는 검을 사슬로 옭아매고 반동을 이용해 날아오는 다른 검을 받아쳐 내기도 했다. 이게 숙달되자 오히려 적의 무기를 자신의 무기로 사용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그녀는 손목에서 뽑아낸 줄기를 자유자재로 다루는 주특기가 있었기에 쇠사슬 역시 원래부터 있었던 것처럼 쉽게 다루는 듯했다.

사슬은 데이지의 필요에 따라 끊었다가 이을 수 있었다. 그녀는 양팔에 사슬을 감아 갑작스러운 공격에 팔을 들어 대비하거나 철퇴처럼 휘둘러 단검에 부족했던 파괴력을 갖추는 등 응용력을 발휘했다.

무기의 범용성이 늘어난 데이지는 비유적으로도 마치 날개를 단 듯했다.

“역시 데이지야!”

칭찬이 절로 나올 수밖에 없었다. 전멸한 직후였는데 또 한 단계 성장했다. 지금 그녀의 강함은 누구에게 빗댈 수 있을까?

시들링의 드라이어드 중 유일하게 날개가 있는 드라이어드인 칼미아 라티폴리아가 떠올랐다. 벨라돈나가 부재할 때면 자연스레 다음 리더 행세를 했었지. 총을 무기로 사용하는 드라이어드였는데, 확실히 우성종임을 한눈에 알 수 있는 대단한 전투력을 보여 줬었다.

그녀는 데이지와 달리 완전한 날개를 가지고 있었기에 데이지보다 포레스트에 훨씬 더 많은 권속을 두고 있을 터였다. 시들링의 드라이어드들과는 협력만 해 봤지 제대로 대립해 본 적이 없는데, 지금의 데이지라면 같은 공격형이자 포레스트의 왕인 칼미아를 꺾을 수 있지 않을까?

“이전과는 다르다는 건가?”

가디언의 조소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럼 보여 주거라, 내 필드의 아이야. 어디까지 발버둥 칠 수 있는지.”

위잉.

가디언의 등 뒤에 있는 남은 3개의 붉은 구슬이 일제히 빛이 났다. 데이지가 활성화된 검을 모두 제압하고 본체에 공격을 가하려 할 때쯤이면 수를 한 개씩 늘리더니 이번엔 패턴을 바꾸어 남은 구슬을 모두 활성화하려 들고 있었다.

“저 새끼 반칙을….”

물론 약속된 패턴이 아니기에 어떻게 공격할지는 가디언의 마음이었지만, 내내 동일 패턴으로 기믹을 내다가 갑자기 뒤집는 건 치사한 마음이 들지 않을 수 없잖아?

이제 겨우 3개의 검에 무리 없이 대응할 수 있게 된 데이지였다. 그런데 갑자기 그 두 배가 되는 검이 쏟아져 나와 데이지가 미처 대응할 틈도 없이 마구잡이로 그녀를 공격했다. 엘더가 틈틈이 서포트를 했지만 상처가 늘어나는 속도가 눈에 띄게 빨라졌다.

하다못해 이 자리에 전처럼 연금탑에서의 데이지가 존재했다면 한 개의 검 정도는 방해해 줄 수 있을 텐데 말이다.

난 초조하게 룽카가 뛰어간 방향과 가디언의 남은 구슬을 번갈아 바라보며 기도했다. 여기서 더 이상 구슬이 붉게 변하지 않기를 그리고 룽카가 빨리 데이지를 찾아오기를.

다행히 남은 4개의 투명한 구슬에는 붉은 기가 보이지 않았다. 가디언이 더 이상 제물을 흡수할 수 없는 상태라는 거다. 전과 같은 무지막지한 전멸 기술은 10개의 구슬이 모두 붉게 활성화됐을 때 사용했으니 조금은 안심해도 되겠지.

가디언이 갑자기 공격의 강도를 올린 건 상대를 유린하며 가지고 놀았던 이전과 달리 정말로 자신이 퇴치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가 아닐까 싶었다.

그때는 완연한 강자였으니 데이지의 한계에 맞춰 검의 수를 늘려 준 것이고, 지금은 우리에게 돌파구가 생겼으니 빛을 보기도 전에 무너뜨리려는 거다.

“제발 빨리….”

데이지는 정말 쉴 새 없이 검과 맞부딪혔다. 6그루의 강한 드라이어드와 다중 전투를 벌이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라 그녀가 조금도 멈춰 있는 틈을 볼 수 없었다.

가디언은 허공을 떠다니는 검을 사용하는 것 외에 다른 양상을 보이진 않았다. 어쩌면 생각했던 대로 노멀 필드의 가디언은 공격형 특성을 가지고 있는 듯하다. 다만 메스키트와 실새삼이 각각 방어형과 공격형임과 동시에 지원형 특성을 서브로 가지고 있는 것처럼 노멀 필드의 가디언 역시 두 가지 특성을 가지고 있을 확률이 컸다.

아직 방심해선 안 됐다. 가디언은 정체를 알 수 없는 불길한 바람, 마치 칼날을 품은 듯한 바람을 사용할 수 있었다. 지금 6개의 검을 다루며 바람을 다루는 공격까지 추가된다면 데이지가 더 이상 버티기 힘들었다.

우리가 서 있는 공간에 엘더의 치유의 힘이 하얀 파도처럼 넘실거렸다. 데이지는 실시간으로 수혈을 받듯이 엘더의 서포트를 받아야만 겨우 버틸 수 있는 수준이었다. 게다가 거의 한계에 다다른 듯했다.

차라리 6그루의 드라이어드와 대결을 펼치는 것이 훨씬 나았다. 적어도 리타이어시키면 다시 덤비지 않으니 하나씩 집중적으로 쓰러뜨리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날아다니는 검엔 생명이 없었다. 망가지지도 않는다. 검은 상처를 입지 않을뿐더러 시간이 오래 갈수록 상처 입는 건 오히려 데이지 쪽이었다.

6개의 검을 모두 떨쳐 낸 후 대피한 데이지가 격하게 숨을 헐떡였다. 치열한 공방이 끝나고 아주 잠깐의 대치 시간이 생겼다.

검들이 사방으로 퍼져 일제히 데이지를 향했다. 상하좌우 대각선까지, 데이지가 빠져나갈 틈을 주지 않은 채 쏘아질 준비를 하고 있었다. 마치 산 채로 갇히는 고문 기구, ‘아이언 메이든’처럼 말이다.

이번에 운 좋게 빠져나가더라도 그녀가 치명상을 입는 건 피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난 전멸을 맞이하기 직전 내 손으로 만들어 냈던 세이프티 룸을 다시 만들 수 있을까 전전긍긍하며 손을 바라봤다. 그게 있으면 지금 있을 공격을 한 번은 막아 주지 않을까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극한의 위기에서나 겨우 발휘될 수 있는 힘이었다. 애초에 내가 무의식으로 발현했던 힘이기에 아무리 손을 바라봐도 무언가 생길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핑!

결국 6개의 검이 데이지에게 쏘아졌다. 절체절명의 순간….

검을 막는 또 다른 붉은빛이 보였다. 데이지의 붉은 머리카락이었다.

“너는…!”

6개의 검 중 하나의 경로를 방해하여 틈을 만든 것은 연금탑의 데이지였다. 이전처럼 그녀가 먼저 우리와 접선하게 되었다.

물론 달려와 준 그녀가 몹시나 고마웠고 그녀의 존재가 이 전투에서 도움이 된다는 건 사실이었지만, 기다렸던 히든카드가 아니기에 아쉬운 마음은 있었다.

그런데 눈앞에 미처 감지하기도 힘들 정도의 빠른 속도로 붉은빛이 하나 더 스쳐 지나갔다.

“제가 많이 늦었죠?”

또 하나의 데이지였다. 날개가 없을 뿐이지 지금의 데이지와 아주 똑같은, 현재의 데이지를 보는 것이나 다름없는, 우리의 히든카드 데이지가 말이다.

“찾았어요!”

“룽카 씨! 찾아내는 걸 성공하셨네요!”

“드루이드 님!”

그에게 신경이 팔린 나머지 소매 부근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을 감지하는데 늦었다. 누군가 약하게 소매를 아래로 잡아끌고 있었다. 놀란 마음에 바라보자…. 그곳엔 어린 데이지가 있었다.

“세상에… 너도 와 줬구나.”

“드루이드 님.”

26번째 테라리움에서 첫 부활을 겪은 어린 데이지였다. 처음 만났을 때처럼 체구가 작고 미소가 가득하며 두 눈에 성장 욕심이 가득 찬 어린 데이지 말이다. 이렇게 오랜만에 어린 모습을 다시 보게 되니 감회가 새로웠다.

아이의 둥그런 머리 위에 살짝 손을 올리니 손바닥이 감동으로 찌르르 울렸다. 이런 자리가 아니었다면 온몸으로 아이를 와락 끌어안아 주고 싶을 정도였다.

이로써 데이지의 모든 과거와 현재가 이곳에 모이게 되었다. 네 송이의 붉은 꽃들이 전부 무기를 꺼낸 채 노멀 필드의 가디언을 매서운 눈으로 바라봤다.

“대체 어떻게 전부 찾아낸 거예요?”

무엇보다도 난 여태 하나도 만나지 못했던 과거의 데이지를 전부 찾아온 룽카가 신기했다.

“가면이 많은 도움이 됐습니다. 무엇보다도 가이드를 받아서….”

데이지들이 전부 6개의 검에 역공격을 펼칠 동안 룽카가 데이지들을 찾게 된 경위를 짧게 설명해 주었다.

가면을 쓰니 그는 땅굴 안을 가득 채운 사람들의 허상을 보게 되었다. 물론 내 전생의 시간들이었다. 그러나 내가 앞서 표현했던 것처럼 좀비처럼 가만히 있지는 않고 모두 일어나 손가락으로 어딘가를 가리키고 있었다고 한다.

그들의 시선이 똑바로 룽카를 향했기에 그는 그들이 자신에게 무언가를 알려 주려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가리키는 방향으로 뛰어가자, 그곳에서 데이지들을 찾을 수 있었다고 한다.

“그들이… 데이지가 있는 곳을 알려 줬다고요?”

“네, 신기한 일이죠. 마치 제가 찾는 게 무엇인지 정확히 아는 듯했습니다. 라운까지 덩달아 찾을 수 있으면 좋았을 테지만… 레드 데이지 드라이어드를 모두 찾으니 사라져 버렸습니다. 가면을 다시 고쳐 써도 보이지 않더군요.”

“사라졌다고요?”

“네, 그냥 연기처럼 사르르?”

전생의 시간들이 사라진 것을 그대로 받아들여도 될까? 가디언의 투명한 구슬에 변화는 없으니 제물이 된 것은 아닐 테다.

그들은 대체 어떻게 룽카가 데이지를 찾는 걸 알고 방향을 알려 줬던 걸까? 전생의 시간들과 나의 접점이라곤 같은 영혼을 공유했다는 것뿐인데….

“이제 이길 수 있는 겁니까?”

룽카가 희망을 가득 담은 눈으로 가디언들과 맞서 싸우는 네 송이의 붉은 꽃들을 바라봤다.

“그럼요. 이젠 쓰러뜨릴 차례예요.”

나 역시 이 전투의 희망적인 미래를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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