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76화 (476/604)

과거와 달랐다. 가디언을 처음 만나게 되는 시점은 끔찍한 시체를 고이 모셔 둔 제단에서 교단원들이 부활을 기원하는 제를 올렸을 때였다.

제단을 부수는 데 시간을 많이 소모하긴 했지만, 이전엔 길을 오래 헤맸던 걸 생각해 보면 기다림에 지친 가디언이 직접 제 발로 행차할 만큼 너무 많은 시간을 보낸 건 아니었다.

가디언은 마치 우리가 올 것을 미리 알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물론 자신의 영역이니 침입 사실을 알고 있을 수도 있으나 하는 행동이 우리가 올 거라는 걸 미리 알고 있던 듯하다는 게 문제였다.

어쨌든 전혀 예상 못 했던 상황에 당황스럽긴 해도, 전에는 7개의 구슬을 활성화시킨 채 우리와 맞닥뜨렸으나 지금은 6개뿐이라는 사실이 다행이었다.

데이지가 3개의 구슬까진 버텨 냈으니 이제 과거의 데이지를 찾을 수만 있다면 저 드라이어드를 물리치는 게 아예 불가능한 일은 아니리라.

그런데 그렇게 열심히 제단을 부수고 다녔는데도 과거의 시간들을 지키는 데 실패했다는 건가? 구슬을 모은 속도가 너무 빠른 것 같은데.

사아아.

귓가에 바람 소리가 들렸다. 아니 갈대가 흩날리는 소리 같기도 했고 뱀이 매끄럽게 기어가는 소리 같기도 했다.

소리의 파장은 나를 지나쳐 내 등 뒤의 드라이어드들에게 향했고 그들은 곧바로 끔찍하단 표정을 지었다. 이에 그들이 다시 한번 혼란을 유도하는 유혹 공격을 받았음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데이지는 물론 엘더도 이제 그런 사탕발림 따위에 넘어가지 않을 것이다. 믿었던 대로 엘더는 귀를 막을지언정 전처럼 힘들어하는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죄책감에 나를 제대로 바라보지 못했던 전과 다르게 갈구하는 눈으로 올곧게 나를 바라보았다. 그 눈빛에 오히려 내가 유혹에 넘어갈 것 같아서 문제였다. 쟤 얼굴이 잘생긴 건 예전부터 알고 있었으니….

찰싹찰싹, 아프게 양 볼을 두드리고 마중 나온 가디언을 바라봤다.

“우리만 과거로 돌아온 게 아니지?”

이곳이 아무렇지도 않게 리플레이가 가능한 게임이 아닌 현실이기에 어떠한 여파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시간을 과거로 돌린다는 게 진정으로 이뤄질 수 없으니 그것이 실현 가능한 방향으로 흐름이 일어났을 거란 말이다.

“과거라… 진정 지금이 과거라 생각하는가?”

중성적인 목소리가 땅굴에 윙윙 울렸다.

지금이 과거가 아니다?

“어쨌든 그때의 일을 너도 기억하고 있는 거 아냐? 그렇다면 이번엔 네게 승산이 없단 것도 알겠네. 그래서 내 드라이어드들을 기를 쓰고 회유하려고 하는 거잖아.”

가디언은 이상하게도 내 다른 드라이어드인 민들레들은 건들지 않았다. 솔직히 두 아이들은 혼란에 노출된다면 고민을 하기도 전에 바로 유혹에 넘어갈 수 있을 만큼 연약했다. 즉, 가장 공략하기 쉬운 먹잇감이란 이야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디언의 혼란 공격은 오직 데이지와 엘더에게만 향했다. 가디언이 전투에서 가장 신경 쓰이는 전력이란 뜻이겠지.

이번엔 데이지에게까지 유혹의 손길을 뻗은 걸 보면 어지간히 애가 달았나 보다.

“과연… 그럴까?”

가디언이 손을 휘젓자 허공에서 무언가 후드득 떨어져 내렸다. 공격이라 생각해 다들 바짝 긴장했지만 공격은 아니었다. 땅에 떨어진 것들을 살펴본 나는 기겁했다. 그건 교단원들이 착용하는 가면들이었다. 다들 어디 갔었나 했는데….

“역시 너도 과거로 돌아왔어. 아니, 미래의 일을 알고 있어.”

가디언과의 전투를 기억하는 건 우리뿐이라 생각했는데 가디언도 이를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현재는 과거가 아니란 말이 철학적으로 들리긴 하나 그저 사실이라 생각해 보면 우린 과거로 돌아간 게 아닐 수도 있었다. 미래를 엿본 게 되는 듯했다.

일어날 수 있는 흐름, 그건 꿈이나 예언처럼 미리 엿본 형태와 비슷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우리는 모두 그 자리에서 실제로 전멸이 났고 데이지는 새로 포레스트에 권속을 두며 그 증거로 날개가 생겼다. 하지만 처음 가디언을 만나기 전의 시간으로 돌아갔으니 엄연히 말하자면 그 시간은 존재하지 않는 거나 다름없었다.

시간은 존재하지 않으나 경험은 그대로 남아 있다. 인삼 군락지의 멈춰 버린 시간과 듬성듬성 빠진 퍼즐처럼 틈이 생겨 불안정한 시간 덕에 내가 그곳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음에도 불구하고, 나와 헤어졌던 드라이어드들과 길드원들에겐 그다지 오래 걸리지 않았다고 느끼는 것과 비슷한 현상이었다.

삼인성호라고, 없던 호랑이도 세 사람만 있으면 만들 수 있다는데 우리에게 일어난 흐름이 바로 이것일 것이다. 혼자 상상하면 망상이 되고 둘이 상상하면 이심전심이 된다. 세 사람부터는 ‘설마 그게 진짜 일어났던 일이야?’가 되는 거고.

그때 그 자리에 없었던 자들은 모르고, 그 자리에 있었던 이들은 모두 기억함으로써 기억 속에 사라져 버린 시간을 묻고 현재의 시간은 아무런 이상 없이 그대로 흐르게 되는….

미래를 안다는 건 커다란 전력이 될 수 있으나 적 또한 미래를 알고 있다면 행동력 싸움이었다. 누가 먼저 많이 알고 있다는 이점을 이용해 선수를 치느냐에 따라 허를 찌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제단을 부순 행위가 그러했고, 가디언이 선수를 쳐 예정보다 빠르게 직접 교단원들은 물론 제물들을 쓸어 모은 행위가 그러했다.

“살아 있는 사람들은 어떻게 한 거야?”

교단원들이 부활의 제를 올릴 때까지 기다리지 않고 먼저 쓸어 버렸다면, 그 방과 일방통행으로 이어진 포로들이 모여 있던 방이 문제였다. 가디언이 이곳까지 직접 온 걸 보면 반드시 포로들의 방을 통과했을 텐데….

라운은 물론 모두 포박되어 있던 상태라 저항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으니 최악의 경우….

“…….”

그러나 가디언은 이번 질문에 대해선 답을 해 주지 않았다. 마치 대답할 가치가 없다는 것처럼 여상한 태도였다. 그래서 더욱 열이 받았다.

“널 결코 필드의 가디언이라 부를 수 없어. 가디언은 필드의 규율을 수호하는 존재이지, 너처럼 필드의 생명들을 하찮게 여기는 드라이어드가 어떻게 가디언일 수가 있겠어? 넌 그저 썩어빠진 망령일 뿐이야.”

내가 10그루의 가디언들을 모두 모으려 한다 해도 도저히 저자를 내 영혼에 담을 수가 없었다.

기이하다. 타인의 생명을 희생하여 자신의 생명을 늘리는 일은 실새삼도 동일했는데 어째서 저 노멀 필드의 가디언만큼은 용납할 수 없다는 기분이 드는 걸까?

실새삼의 행동은 모체의 특성과 많이 닮아 있었다. 모체 자체가 주변 식물들에 기생하여 수액을 빨아먹으며 생존했으니 따지고 보자면 먹이 사슬에서 초식 동물과 육식 동물의 관계와 비슷하다고 볼 수 있었다.

이지를 가진 드라이어드가 되어 그 행동이 더욱더 잔인하게 느껴지지만 일차원적으로 식물의 행동이라 놓고 보면 그렇게 이상한 일은 아니게 되는 것이다.

물론 은둔자의 정원의 드라이어드들을 착취하던 그의 잔악함을 두둔할 생각은 없으나, 바이오 필드 태생도 아닌 노멀 필드의 가디언이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생명들의 시간을 빼앗아 가는 것과는 차이가 있기에 실새삼보다는 더욱 영혼에 담기도 싫을 만큼 끔찍하게 여겨지는 게 아닐까 싶었다.

그렇다면 만약 노멀 필드의 가디언이 실새삼처럼 모든 기억을 잃고 어려져 백지 상태로 다시 시작하게 된다면? 이 또한 모르겠다. 어쨌든 거부감이 느껴지는 건 사실이었다. 내게 저 가디언은 더 이상 존재하면 안 되는 무척이나 이질적인 존재로 여겨졌다.

“제단을 모두 박살 냈으니 그 구슬은 이제 더 이상 채워지지 않겠네?”

데이지가 단검을 빙글 돌리며 앞에 섰다.

차르르…. 그녀가 두 단검을 바로 쥐자 손잡이 부분에서 쇠사슬이 튀어나와 두 단검을 연결했다. 그러자 무기가 쌍절곤 같기도 하고, 철퇴처럼 보이기도 했다. 데이지2를 포레스트에 영입했을 때 데이지가 단검을 부메랑처럼 쓸 수 있게 되었으니, 아마 이번에 영입한 데이지3이 사슬을 이용한 무기를 사용했었나 보다.

사슬은 데이지가 원할 때마다 단검을 부메랑으로 만들어 쓸 수 있었던 것처럼 끊었다가 이어 쓰기를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듯했다. 그녀가 운용할 수 있는 무기의 형태가 늘어난 건 환영이었다.

“룽카 씨, 부탁 좀 드려도 될까요?”

“네, 말만 하세요.”

어차피 이 전투에 드라이어드도 없는 룽카가 큰 도움을 줄 거라고 기대하긴 어려웠다. 잘 훈련된 드루이드 자체도 큰 전력이 될 수 있으나 데이지 정도의 전력이 되어야 가디언이 다루는 움직이는 검에 맞서 싸울 수 있었다. 괜히 룽카가 참전했다가 부상이라도 당한다면 큰일이었다.

그러니 피해 있거나 다른 일을 수행하는 것이 맞았다.

“민들레들과 함께 가세요.”

이 전투에 민들레 아이들이 큰 도움을 주지 못할 거란 것도 사실이었다. 회복형인 민들레들의 상위 호환인 엘더가 자리하고 있었다. 더구나 민들레들은 엘더처럼 회복 특성보단 디버프 해제 쪽에 특화된 힐러이기도 하고.

“여기 어딘가에 저 데이지와 똑같이 생긴 드라이어드들이 셋 있을 거예요.”

26번째 테라리움의 어린 데이지, 16번째 테라리움의 연금탑에서 싸운 데이지 그리고 77번째 테라리움의 전설을 개화한 데이지.

“날개가 없을 뿐이지 완전히 똑같이 생긴 드라이어드가 필요해요.”

“찾아오면 되는 겁니까?”

“네, 이곳에 있다고 알려 주시기만이라도 해 주세요.”

아직 데이지 손목에 있는 푸른 고리는 전부 멀쩡했다. 가디언이 움직였어도 그녀의 과거의 시간들이 당하진 않았다는 걸 알 수 있는 증거였다. 데이지가 버틸 동안 우리의 히든 카드가 될 수 있는 또 다른 데이지를 찾아와 준다면 가디언을 이길 수 있었다.

휙!

데이지가 재빠르게 땅에 떨어진 가면 하나를 주워 이쪽으로 던졌다. 난 그걸 친히 룽카의 얼굴에 씌워 주었다.

제단이 박살 난 지금 얼마나 많은 효용을 보일진 모르겠지만 그래도 없는 것보다 나을 테니…. 그런데 마치 누가 노려보기라도 하는 것처럼 뒤통수가 상당히 뜨겁다.

내 부탁에 룽카는 비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곤 민들레들과 함께 가디언이 온 방향의 반대편으로 뛰었다. 전처럼 셋과 헤어지게 되었지만 그땐 강제였다면 지금은 자의였다. 그가 부디 제시간에 데이지를 찾아올 수 있기를 바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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