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75화 (475/604)

이상하게도 엘더를 제대로 바라볼 수가 없었다. 얼굴은 화끈거렸고 심장이 너무 크게 뛰어 귀가 먹먹해질 지경이었다.

지금처럼 누군가 날 향해 마음을 고백하는 일이 몇 번 있었지만, 그때마다 내 감정은 동일했다. 마음의 동요를 일으키려 하면 그보다 먼저 떠오르는 일이 있어 어렵지 않게 밀어낼 수 있었다.

지금은 연애보단 모험이 더 중요한 때라고, 그렇게 항상 내 마음이 먼저 답을 내렸었다. 어쩌면 연애를 함께한다면 더 즐거운 모험이 될 수도 있겠으나 항상 모험의 우선순위가 더 높았고 연애와 양립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 그만큼 마음이 동요되지 않았으니 내게 연애란 방해처럼 느껴졌던 것이다. 내 심장을 더욱더 뛰게 만드는 건 모험 쪽이었으니까.

그리고 지금, 또다시 두 개 중 하나를 선택해야 될지도 모르는 순간이 왔다.

그 대상이 엘더가 될 줄은 정말… 생각하지 못했다. 그동안 수없이 엘더의 얼굴이 내 이상형이라 말해 왔던 순간들이 떠올라 미친 듯이 부끄러워졌다.

그렇게 말할 수 있었던 것도… 어쩌면 나와 엘더는 그런 감정의 틀로 묶이지 않을 거란 확신이 기저에 깔려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그래서 여태 해 왔던 것처럼 지금은 모험이 더 중요한 때라고… 그러니 당장은 마음을 받아 줄 수 없다고 답변부터 해야 할 것 같은데, 입이 움직이지 않았다. 생각과 마음이 일치하지 않아 내 안에서 끊임없이 맞부딪히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고민을 한다는 것부터 내가 엘더를 특별하게 본다는 걸 뜻했다. 내게 마음을 고백해 왔던 다른 이들과 다르게 말이다. 난 엘더에게 모험이 더 중요하다 말할 수 없었다. 아니 말하고 싶지 않았다.

맙소사… 난 연애 대상자가 엘더가 되자 쉽게 모험의 우선순위를 높일 수가 없었다. 엘더와 연애를 할 거란 미래를 전혀 생각하지도 않았으면서 가랑비에 옷 젖는 줄도 모르게 그를 내 마음 한편에 담고 있었던 거야….

“미안해.”

엘더는 어쩔 줄 모르며 머뭇거리는 내게 낮게 깔린 목소리로 말했다.

노멀 필드의 가디언이 엘더에게 어떤 유혹을 보냈는지 확인한 후 상당한 시간이 흘렀다. 정확히는 그 유혹에 엘더가 보인 반응과 그로 인해 들켜 버린 그의 마음에 대한 내 답변이 나왔어야 할 시간이 한참이나 흘렀다고 볼 수 있었다.

질책이 됐든 격려가 됐든… 거절이 됐든 승낙이 됐든. 하지만 내가 보인 반응은 아직까지 침묵이었다.

침묵의 시간 동안 엘더는 더욱 더 움츠러들었고 반면에 그의 죄책감은 실시간으로 커져 가고 있었다. 심각해진 분위기에 누구 하나 입을 열지 못하고 있었다. 그가 유혹당했을 거라 밝혀낸 데이지 역시 안쓰러운 얼굴로 바라만 볼 뿐이었다.

다른 이들은 이 상황의 속내에 대해 꿈에도 모르겠지.

“네가 미안해할 일은…. 큽.”

다급하게 말하려다 혀를 깨물었다. 엘더만큼이나 나 역시 잔뜩 긴장해서 얼굴 근육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머리가 터질 노릇이었다.

이성은 지금은 이럴 때가 아니라고 외치고 있었지만 마음은 갈피를 잃었다. 엘더가 원했던 상황들을, 손을 잡고 끌어안고 더욱 가깝게 지내고 싶어 했던 순간들을 나도 모르게 떠올려 보며 행복한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그런 불결한 꼬임에 넘어가서… 이성적으로 행동하지 못해 미안해. 전투에 폐가 되고 결과적으로 널 위험하게 만들었어. 데이지처럼 곧바로 떨쳐 냈어야 했어. 하지만 그럴 수 없어서…. 난 이번에도 똑같이 갈등할 거야. 그러니 전투에서 빠지는 게 낫다고 말한 거야.”

그는 데이지에게까지 뻗쳤던 유혹의 손길이 단번에 잘렸던 걸 언급하며 말했다. 단순히 환상 속에 안주하자고 우리가 여태 시련을 겪어 왔던 것이 아니다. 데이지는 그걸 알기에 단번에 혼란의 조짐을 파훼할 수 있었다.

환상이 아닌 실제로 만들기 위해. 모든 고난을 이겨 내고 우리가 평화롭게 함께할 수 있는 시간을 만들기 위해.

하지만 엘더는 그럴 수 없었던 이유. 그건 환상이 아니면 절대 이뤄질 수 없다고 믿었기 때문인 건 아닐까?

드라이어드가 인간이 되는 건 불가능하다. 그리고 엘더는 자신이 인간이 되지 못한다면 그가 원하는 나와의 그림이 나오지 않을 거라 생각한 것이다. 그가 인간이 되어야만 꿈꿀 수 있는, 나와의 사랑.

그럼 환상이 이뤄진다면… 엘더는 그 환상 속에서 나와 대체….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얼굴이 터질 것처럼 달아올라서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이 세계에서 통용되는 상식이라 하더라도 세계의 외부인인 내겐 크게 와닿지 않는 것들이 많았다. 이 세계의 사람들이 태어날 때부터 살아가는 내내 접하게 되는 상식이지만 나는 이제 와서 배워 가는 입장이니까.

그러니 인간과 드라이어드의 사랑이 환상의 힘을 빌려야 할 만큼 불가능한 일이란 점에서 부조화가 오고 있었다.

감정이 쌍방향이니 그냥… 하면 되지 않아? 엘더가 이렇게까지 날 좋아하니 그냥 내가 받아 주면…. 아니… 난 결국 받아 줄… 받아 주고 싶은 마음이 있는 거야? 세상에. 내가 왜 이러는 거지?

“엘더.”

이번엔 혀를 깨물지 않도록 침착하고 차분히 그의 이름을 부르자 열렬히 날 바라보던 눈빛이 처분을 기다리는 것처럼 촉촉하게 젖어 들어간다. 그는 이미 마음의 준비를 끝낸 것이다.

내게 사랑을 표했던 이들의 모습을 봐 왔다면 그 끝이 어떻게 됐는지도 봤을 것이다. 여태 해 왔던 내 대답은 전부 거절이었으니까.

그는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로 내가 할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표정을 보아하니 당연히 내게서 매몰차고 실망이 가득 담긴 답변이 나올 거라 예상한 듯하다.

“난… 네가 인간이 아니어도 상관없어. 네가 드라이어드라는 점이 내게 어떠한 감점 요인으로도 작용하지 않아. 그러니까 그런 쓸데없는 혼란에 넘어가지 마.”

내 말을 들은 엘더의 녹음을 가득 담은 눈이 혼란으로 파르르 떨린다. 혼란에 넘어가지 말라고 했더니 곧바로 혼란스러워하면 어떡해.

불가능이라 여겨 환상에 집착해야만 한다면 불가능이 아니게 해 주면 된다.

물론 지금 당장 그의 마음을 받아 주겠노라고 말하면 모든 게 해결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 상황은 그의 마음이 강제로 내게 들춰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엘더나 나나 충분히 감정을 정리하고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은 것이다.

또한 지금 당장 두근거리는 마음에 제대로 된 선택을 하지 못할지도 모른단 두려움이 있었다. 나도 사실 같은 마음이었나 봐, 하며 당장이라도 그의 손을 잡아 주고 싶어도 불나방처럼 뛰어들기엔 고려해야 될 상황이 많이 있었다.

모험과 연애는 우리가 항상 함께하는 드루이드와 드라이어드라는 점에서 충분히 양립할 수 있었다. 애초에 엘더의 마음을 알게 된 뒤에도 둘 중 하나의 우선순위를 높이지 못한 순간부터 내 마음은 결정 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항상 함께한다는 점이 문제가 될 수 있었다. 불타는 사랑이라도 끝이 존재할 수 있는데 만약 우리의 사랑이 좋지 않게 끝난다면…?

사람이라면 헤어지고 다시 안 볼 수 있으나 내 영혼에 담긴 드라이어드가 그게 가능할까?

그리고 드라이어드에 대한 애정은 공평해야만 했다. 사랑을 하게 된 내가 엘더만 편애하지 않을 거란 자신이 있는가? 이를 본 다른 드라이어드들이 느끼게 될 소외감은?

그래, 어쩌면 드라이어드와 사랑이 불가할 거라 했던 말은 파필리온이 말한 것과 다르게 이런 점들을 염두에 두고 나온 말이 아닌가 싶었다. 우리의 관계는 연애 관계 이전에 훨씬 더 특별하고 특수한 관계로 묶여 있었으니까.

그러니 당장은… 보류였다.

“네 말이 그렇다면….”

엘더가 손을 들어 자신의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러자 가면을 벗은 것처럼 눈빛이 달라졌다. 버림받을 거라 덜덜 떨던 애처로운 눈빛에서 기대와 열망을 가득 담은 눈빛으로 바뀌었다. 그는 도망가려고 훌쩍 물러났던 거리를 단번에 좁혀 왔다.

“나 기대하게 될지도 몰라. 내가 생각했던 대로라면… 넌 거절을 했어야 해.”

그러곤 날 끌어안았다. 그 품에 많이 안겨 봤지만 지금만큼은 느낌이 달랐다. 그는 이대로 시간이 멈춰 버렸으면 좋겠다는 것처럼 숨 막힐 정도로 강한 힘으로 안았다. 욕망이 절실히 느껴지는 포옹에 애달은 울음이 목 끝까지 차올랐다.

“감정은 허락받는 게 아니야….”

“좋아해.”

귓가로 열기가 가득 담긴 엘더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거리 때문에 핥듯이 속삭이는 듯했다. 이젠 눈시울이 뜨거워져 입술을 깨물었다. 엘더도 분명 미친 듯이 뛰는 내 심장 소리가 들리겠지? 품에 이마를 비비고 싶은 걸 간신히 참으며 그를 떼어 냈다.

“이제 엘더는 혼란에 넘어가지 않을 거야. 아니 갈등하는 일도 없을 거야.”

애써 분위기를 환기해 보려 아무렇지도 않은 척 데이지와 룽카에게 말했다.

“그럼 다행이네요! 그런데 엘더에게 제안한 환상은 뭐였어요?”

데이지의 천연덕스러운 물음에 식은땀이 났다.

“그냥… 너와 비슷해. 그런데 엘더가 받아들인 건 너와 좀 달랐나 봐. 아무래도 엘더가 힘든 일이 많았으니까 더욱더 내게…. 그러니까….”

주절주절 되는 대로 내뱉고 있지만 데이지는 이해한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제희 님이 안전하게 우리와 오래도록 함께 지내는 건 저 말고도 누구나 바라는 일이니까요.”

다만 엘더가 말하는 오래도록 함께는 의미가 좀 달랐지만.

“그건 그렇고 감언이설로 내 드라이어드들을 가지고 놀려고 하다니. 보면 볼수록 이번 가디언은 정말 정떨어지는 구석밖에 없네. 반드시 본때를 보여 줘야만….”

휘이이잉.

상상 속에서 백 번도 넘게 가디언을 지르밟아 주고 있는데 갑작스럽게 불길한 기운을 담은 바람이 불어왔다. 그동안 자신의 위치를 숨기려는 것처럼 잠잠했는데. 내 드라이어드들에게 유혹이 통하지 않았기 때문인가?

“바람의 방향을 기억해 둬!”

난 이번에도 헤어질까 봐 민들레들의 손을 붙잡으며 소리쳤다. 가면을 얻을 수도 없는 지금, 바람의 방향이 유일한 단서였다. 제단이 대부분 박살 나 방향만 제대로 잡으면 헤매지 않고 가디언을 찾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스르륵….

그런데 더 이상 기다림은 용납하지 않는다는 것처럼….

“세상에, 저게 드라이어드라고요?”

노멀 필드의 가디언이 직접 우리를 찾아왔다. 등 뒤에 떠 있는 10개의 구슬 중 6개를 붉게 활성화시킨 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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