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마음이 정말 드루이드를 향한 순결한 마음이라 생각하는가?”
이를 들은 엘더 마음의 파장이 미친 듯이 흔들렸다.
“우수한 개체와 짝을 이루고 싶어 하는 마음은 종족 번식에 의거하여 아주 자연스러운 현상이지. 물론 같은 드라이어드일 때에 한하지만.”
그 목소리는 마치 유혹을 넘어 엘더를 조롱하는 듯했다.
“모든 식물의 탄생을 세계수가 관여하니 애써 종족 보존을 위해 힘쓰지 않아도 되나, 이지가 있는 존재들에겐 자연의 이치를 넘어서 머리론 이해하지 못해도 마음이 멋대로 움직이는 것들이 있지. 상대를 애틋하게 여기고 결실을 맺고 싶어 하는 그런 순간들. 물론 그것도 종이 같다는 전제가 필요하지만.”
맞잡은 손이 뜨거웠다. 체온이 올라감에 따라 엘더는 약한 반항을 보였다. 잡은 손을 놓고 도망가고 싶어 하는 마음이 담겨 있었다. 그건 마치 은밀하게 숨겨 둔 비밀이 탄로 났을 때 제 발 저린 자가 보일 법한 행동 같았다.
“드루이드를 향한 우리의 감정의 기반은 단 하나로 설명이 가능하지. 드루이드는 일생을 다 바쳐 지켜야 할 존재기에 더없이 소중한 존재라는 것.”
영혼의 연결을 맺지 않은 드라이어드조차 처음 보는 드루이드이라도 작은 세계수라 여기며 숭상하는데, 영혼이 연결된 드라이어드에겐 드루이드란 삶의 그 자체나 다름없었다. 자신의 생명보다 소중한 존재.
이 모든 감정의 기반은 세계수에서 비롯됐다고 생각한다. 드라이어드들이 드루이드를 ‘작은 세계수’라고 부르는 데에서 알 수 있었다.
만물을 창조한 신인 세계수가 드라이어드를 만들었으니 당연히 신을 숭배하고, 드루이드는 이 신을 대신하여 영혼의 보금자리를 제공하니 세계수를 향한 마음과 드루이드를 향한 마음이 세상 밖으로 나온 순간 치환되는 것이다. 각별한 감정은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수많은 드루이드들과 드라이어드들은 여러 모험을 겪으며 각기 다른 방향으로 감정이 심화된다.
그러나 결국 모든 감정은 궁극적으로 드루이드를 위한다는 목적하에 존재한다.
세계를 지키는 일이 곧 그 세계에서 살아갈 드루이드를 위한 일이라 생각하여 오랜 세대를 거쳐도 조상들이 이룩한 진리를 절대 어기지 않으려는 드라이어드도 있고, 드루이드를 위해서라면 탄생부터 모든 것에 관여한 세계수를 반목하고 저버리는 드라이어드도 있었다.
그런 맹목적인 감정에 기반 된 관계를 표현하는 데에는 특별한 말이 필요 없었다. 이 세상의 누구라도 드루이드와 드라이어드의 관계라고 하면 모두 이해할 수 있었다. 드라이어드의 드루이드를 향한 맹목적인 감정이 무척이나 당연하다는 뜻이었다.
물론 엘더의 마음도 이와 같다면 굳이 가디언이 그 점을 캐내어 엘더를 흔들어 놓진 않았을 것이다.
“간혹 소유욕이 강한 드라이어드는 드루이드의 관심이 오롯이 자신에게 집중되길 바라지. 같은 영혼에 속한 다른 드라이어드에게 드루이드가 조금이라도 관심을 더 준다면 힘들어하는 꽃들은 의외로 흔하다. 그건 단지 드라이어드의 성격 특성일 뿐이니까. 물론 드루이드가 자신을 더 특별하게 여기는 걸 거절할 수 있는 드라이어드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 목소리는 꼭 경험담을 풀어놓는 듯했다. 과할 정도로 애정을 표현하는 드라이어드라 하면 내 마거리트와 제퍼의 도깨비바늘이 떠올랐다.
“그러나 모든 드라이어드들을 제치고서라도 드루이드 옆에 홀로 남고 싶다는 그릇된 감정은 성격 특성을 넘어 욕망에 가깝지 아니한가? 드루이드에게 곁을 지키는 드라이어드가 많다는 건 보다 안전한 방법임에도 불구하고.”
독차지하고 싶고 자신만 바라보게 만들고 싶고 다른 이들은 생각도 하지 못하게….
지금이라도 손을 놓고 마음을 감추고 싶어서 약하게 반항하던 엘더의 움직임이 뚝 끊겼다.
“그들은 주종 관계 그 이상은 아니야. 종종 드라이어드와 사랑에 빠지는 해괴한 드루이드들이 있긴 하지만 아무리 사람과 똑같이 생겼다고 하더라도 애초에 종 자체가 다른데, 대체 사랑이란 감정이 어떻게 생긴다는 건지.”
파필리온이 은밀하게 연애 감정을 드러내며 드루이드와 드라이어드 사이의 사랑을 지적하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다. 그때 난 엘더를 운운하며 은근한 분위기를 풍기는 그를 사전에 밀어내고자 했기에 단순히 질투에 비롯된 담화가 아닌가 싶었다.
“뭐, 그대 스스로가 경계하고 있다면 다행이지만. 하지만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이니 명심해. 아무리 그대가 갈망해도 드라이어드는 절대 같은 그것과 같은 감정으로 보답할 수 없어. 인간과 생각 체계가 달라.”
모습이 인간과 다를 바 없고 특별한 능력을 사용하는 것 외에 모든 게 같다고 생각했는데. 그가 정말 말이 되지 않는다는 식으로 말해서 얼떨떨한 기분이 들었었다.
그때 내가 어떻게 대답했더라.
“사랑의 종류도 여럿이지.”
그 누구도 사랑에 대해 정확히 정의 내릴 수 없다. 사람들이 사랑이라 표현하는 감정이 제각각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런 대답을 했던 건 어느 정도 나의 일방적인 마음을 대변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오랫동안 함께하니 좀 더 각별한 감정이 생길 수밖에 없었고 그 각별한 감정이 파필리온이 말하는 그런 성애적인 사랑은 아닐 거란 뜻이었다. 난 내 드라이어드들을 모두 사랑한다. 그리고 내 드라이어드들도 나를 주종 관계 이상으로 사랑한다고 자부할 수 있었다.
그런데… 계절을 어기고 태어난 꽃처럼 엘더의 감정이 다르다는 듯이… 가디언이 말하고 있었다.
“누구보다도 드루이드의 가장 가까운 곁에 있으면서 다른 이들을 부러워하고….”
그 말에 불현듯 여러 얼굴들이 떠올랐다. 이건 내가 떠올린 것이 아닌 엘더의 마음에 따라 연상작용이 발동한 것이었다.
엘더가 다른 이들을 부러워한다는 말을 들으며 떠올린 사람들은 시들링과 파필리온이 주를 이루었지만 그 밖에도 내 곁을 스쳤던 남자들의 얼굴이 빠르게 스쳐 갔다.
단순히 얼굴만 떠올린 건 아니었다.
그들이 포함된 순간이 떠올랐다.
“내게 평생을 곁에 있고 싶은 사람을 묻는 거라면, 그건 너다.”
아스키아 길드에서 터진 결혼식 사건 때 시들링이 진지한 눈으로 말하는 순간과.
“사랑해.”
붙어있기만 하면 기회를 노리는 것처럼 시도 때도 없이 파필리온이 들이대는 순간.
엘더는 아티팩트 안에서 모든 순간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리고 이를 떠올리면 떠올릴수록 억누르는 데 실패하여 가시처럼 튀어나오는 들끓는 감정이 느껴졌다.
“자신에게도 같은 자격이 있기를 간절히 바라지. 그 마음이 정말 드루이드를 향한 순결한 마음이라 생각하는가?”
이젠 차마 고개도 들지 못한 채 간신히 내 손을 붙잡고 있는, 아니 내 손에 붙들려 있는 엘더가 손을 들어 자신의 얼굴을 완전히 가렸다. 새하얀 피부와 백발 사이로 붉은 색감이 두드러진다.
“그렇다면 같은 자격을 가지면 되지. 네가 인간이 되면 되는 거다.”
엘더가 그런 마음을 갖게 된 것이 언제부터였을까? 그의 유별난 행동들이 단순히 성격 특성이 아닌 날 향한 마음으로 바뀌게 되어 버린 날이 언제부터였을까? 난 정말 이전의 그의 행동에서 그런 여지를 조금도 눈치채지 못했던 건가?
“다음에도 나랑 해야 돼.”
“나와 제이가 힘을 합쳐 만든 거. 내 힘이 담겨 있어, 여기에.”
“제이의 영혼이 내 힘을 불러와 여기에 담았다고. 둘이 같이 이걸 만들었어. 부럽지?”
엘더와 함께 탄환에 그래프트의 힘을 담아냈을 때, 그는 당부에 가까운 부탁을 했었고 그때 만든 탄환을 마거리트에게 크게 자랑했었다.
“하지만 쟤 말하는 것 좀 봐! 저거 생긴 것도 그렇고, 어떤 꽃이 들어도 씨앗을 만든 건데?”
그리고 엘더와 내가 만든 탄환을 보고 마거리트는 그런 표현을 했었고.
“그만. 제이는 드라이어드가 아니라 드루이드예요. 엘더가 당신을 놀리기 위해 오해하게끔 말했다는 사실 정돈 깨달아야죠.”
메스키트는 이를 보며 마거리트의 오해였다며 달랬었다.
“제이는 다음에도 나랑 만들기로 했어. 네 차례는 없어.”
상황은 이전부터 아웅다웅했던 마거리트를 약 올리기 위한 말이었지만 이를 말하는 엘더에겐 정말로… 진심이 담겨 있었다.
과거 회상을 끝낸 난 엘더와 붙잡지 않은 손으로 소리를 지를 뻔한 내 입을 틀어막았다. 걘 정말 진심이었다. 드루이드가 드라이어드와 씨앗을 만들 수 있을 리 없다. 하지만 그런 상징적인 행동에 엘더가 진심으로 집착했던 것이다.
“인간이 되는 거다. 나와 함께라면 넌 인간의 모습으로 드루이드의 옆에 설 수 있다. 네가 부러워 한 그들의 행동을 너도 할 수 있게 되며 드루이드와 드라이어드의 관계를 넘어 네가 진정으로 원하는 걸 쟁취할 수 있게 되지.”
‘영원토록 함께하고.’, 그가 바라는 영원은 데이지와 달랐다.
‘세상이 멸망해도 헤어지지 않는.’, 그가 바라는 관계의 결합 역시 데이지와 달랐다.
손을 잡는 것이 더 이상 영혼의 연결을 굳건히 하는 태도가 아니게 되며 끌어안아도 심장이 두근거리며 바라는 이와 그 누구보다도 심적으로나 물리적으로나 가깝게 붙어 있기를. 나 또한 같은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고 사랑의 결실을 맺는 미래를 꿈꿀 수 있기를.
엘더가 인간이 될 수 있다는, 그런 환상 따위에 마음이 흔들린 이유. 엘더는 나를 향한 연애 감정을 갖게 되었고 나와 같은 인간이 되어 함께 사랑을 하는 꿈을 꾸고 있었기 때문이다.
혼란스럽게 만들려는 의도가 가득 담긴 유혹이었어도 엘더는 결국 흔들리고 말았고 이로 인해 죄책감을 크게 갖게 되었다. 그가 전투에 빠지겠다고 말한 건, 다시 그런 유혹이 온다면 똑같이 흔들릴 수 있는 상태란 뜻이었다.
“엘더.”
내 부름에 엘더가 얼굴을 가린 손을 치운 채 올곧게 날 바라봤다. 의식하고 나니 날 향한 그의 눈빛에 얼마나 많은 욕망이 가득 담겨 있는지, 얼마나 뜨겁게 타오르는지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이를 알게 된 나는 그 어떤 때보다도 미친 듯이 뛰는 심장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